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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67/142)

67화

자석처럼 손에 착 감기는 엘코어를 쥐고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내 곧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는 속으로 전하고 싶은 말을 읊조렸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부디 제 생각을 전해 주세요.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많이 아팠지?

그런데 언제까지 참고 있을 거야?

더는 당하지 말자.

속에 담아 둔 것을 모두 털어놓고 나서야 감았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

우연일까?

다시 눈을 뜬 순간, 새카만 눈동자가 정면으로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던 것은.

푸르르릉―.

흑마의 탄탄한 목이 위아래로 작게 움직였다.

그 모습이 마치 진짜로 내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엘코어가 정말………?’

놀라움도 잠시, 어쩐지 움직임이 불편해 보이는 흑마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다쳤나?’

자세히 보니 한쪽 다리를 살짝 절고 있었다. 과한 마법 고삐 사용과 잘못 설계된 승마 용품들로 인한 부상 같았다.

“원한다면 이 고삐를 쥐고 직접 시승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겠소.”

당연히 그런 것에는 관심 없을 리아노 공작이 귀족들에게 시승을 권하고 있었다.

‘지금 올라탄다면 말은 물론, 말에 탄 사람도 다칠 텐데.’

우려가 앞서 다시금 엘코어를 손에 쥐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나는 조금 전 했던 방식대로 엘코어에 대고 간절히 외쳤다.

‘말아. 내 얘기가 들린다면, 저 나쁜 놈들이 널 호락호락하게 여기지 않게끔 본때를 보여 줘!’

제발 또 우연이 일어나 주길.

누군가 본다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혀를 차겠지만, 이렇게라도 우연에 걸어 보고 싶ㅇ…….

생각이 끝맺어지기도 전이었다.

푸드드득!

엄청난 소리와 함께 코를 마비시킬 정도의 엄청난 냄새가 진동했다.

……어?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모든 이들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악!”

흑마의 엉덩이에 손을 얹고 있던 리아노 공작이 비명을 내지르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품위 따위 챙길 겨를이 없었다.

새하얀 구두코를 타고 질퍽한 것이 미끄러져 내렸다.

리아노 공작의 낯이 잿빛으로 변하는 과정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각하!”

놀란 시종이 주저앉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그럴수록 점점 똥 냄새가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이, 이걸 어찌하죠?”

“어쩌긴! 얼른 이 불결한 걸 안 치우고 뭣 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리아노 공작이 주먹을 꽉 말아 쥐고서 부들부들 떨었다.

체면은 이미 구겨진 지 오래였다.

꼴좋네.

“뭐긴 뭐예요. 말 응가죠! 어디 보자, 응가의 크기랑 양을 보니까…… 대따 건강한가 보네!”

으흥흥,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약 올리는 듯한 내 말투에 고개를 돌리고 가까스로 꾹 깨물고 있는 귀족들 입술 사이에서 참다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흡!”

“……잠시 쉬었다 하지.”

핏대가 오른 이마를 부여잡은 리아노 공작은 시종들의 부축을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 *

아까 일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리아노 공작저의 응접실로 돌아온 나는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검은 야생마는 조금 전의 소란을 아예 잊은 듯이 평온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진짜 내 얘기를 알아들은 것 같았는데.’

창밖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엘코어를 다시 그러쥐었다.

‘얘! 내 말 듣고 있어?’

흑마는 내게 아예 관심도 없었다.

이쪽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이봐, 말아!

여보게, 말씨!

저기요, 말님?

몇 번을 거듭 불러 봐도 흑마는 풀을 뜯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뭐지? 이 방법이 아닌가?

푸시시, 바람 빠진 풍선처럼 등받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역쉬 우연이었나?”

저택에 돌아가면 엘코어에 관해서 조금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어.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대는데,

“무슨 연구?”

불쑥 끼어든 질문과 함께 코앞으로 작은 찻잔이 들이밀어졌다.

잔을 내민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 사이로 맑고 투명한 얼굴이 보였다.

아차차. 얘도 같이 있었지 참.

잠시 흑마에게 정신이 팔려 있느라 노아와 같이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또 딴생각하네.”

“우리 무슨 얘기 하고 있었찌?”

괜스레 미안해져서 노아가 건넨 찻잔을 호로록 들이켰다.

입술로 닿는 온기가 따뜻했다. 비강을 타고 은은하게 흘러드는 국화 향기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슬슬 질투가 나려고 해.”

응?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삐쭉 내민 노아가 창밖을 쏘아보고 있었다.

질투라니 갑자기 무슨?

“저 말이 대체 뭔데 네가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어.”

“아.”

그제야 노아의 시선에 걸린 것이 북반구의 야생마라는 걸 깨달았다.

“아까 전에 리아노 공작님과 대립했던 이유도 저 말 때문이고. 이 방에 돌아오고 나서도 쭉 저 말만 보고 있었던 거 알아?”

“내가 그랬써?”

“응. 그랬어. 내 눈은 한 번도 봐 주지 않았다고.”

노아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햇살에 반사되어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가 어쩐지 조금 비뚤어진 것처럼 보였다.

“저 검은 말이 루나 너한테 특별한 의미라도 있어?”

“으음, 어…….”

말문이 턱 막혔다.

동시에 내가 중요한 걸 깜빡하고 지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소설이 피폐물을 기반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이 속에도 나름의 로맨스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나, 노아의 첫사랑이었지 참.’

새삼스럽게 자각하자, 괜히 부끄러워졌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나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저렇게 잘생긴 말은 처음 봐서 신기했써.”

“말이 잘생겨서 관찰했다고?”

그의 눈동자가 점점 가늘어졌다.

“단지 그 이유뿐이야? 정말?”

“으응…….”

미안하지만, 노아.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지 말아 줄래?

부쩍 가까워진 노아의 얼굴을 피해 슬그머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거짓말.”

몹시 의문을 품은 눈동자가 아까보다 더 가깝게 거리를 좁혔다.

등 뒤로는 유리창이어서 더는 피할 수도 없었다.

“루나.”

“응.”

얜 또, 어디서 이렇게 사람 심장 떨리게끔 부르는 방법을 배운 걸까.

내색하지 않기 위해 눈을 살포시 내리깔았다.

키는 또 언제 이만큼 큰 거고.

이맘때쯤의 남자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금방금방 큰다더니, 노아의 키가 일전에 봤던 것보다 한 뼘 정도 더 자라 있었다.

고작 나보다 두 살 많을 뿐인데 벌써부터 연상자의 티가 났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애꿎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너 또 위험한 일 생각하고 있지?”

아. 우리 노아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걸까.

괜스레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론 거 아냐.”

“아니긴. 난 네 표정만 봐도 다 알아.”

노아가 빈 찻잔을 도로 가져가며 덧붙였다.

“나 속일 생각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 저 말이 어떤 위험한 일에 얽혀 있는 건지.”

“그론 거 정말 아니라니까.”

끝까지 부정하자, 노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 약속도 못 지키는 남자로 만들지 말아 줘.”

노아가 허리를 숙였다.

눈높이가 비슷해지자, 나는 그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쑥스러워져, 바닥 위에 발장난 치며 애꿎은 신발 앞코를 괴롭혔다.

“어떤 일인지 말해 줘. 그래야 내가 널 지켜 주지.”

집요한 시선이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아주 오래전,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빙의 전― 보았던 어떤 독자의 댓글을 떠올리고 말았다.

***

댓글

⦁ 이상해 어디갔지(soqlcnr**)

【Best】소설 속 남주들은 죄다 멜로눈깔은 기본인가 봄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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