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42)

68화

대신전에 다녀왔다고?

무슨 일로?

리아노 공작이 위험한 마법을 시키진 않았지?

혹시 모리스 대신관도 만났어?

아니, 그것보다 왜 나한테 말 안 한 거야.

묻고 싶은 것이 많아지면 사람의 뇌가 굳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도리어 나는 아무 질문도 뱉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 무수한 질문들을 내 혀끝에 묶어 두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러는 와중에도 ‘대신전 벽화 속 성녀 얘기는 뭘까?’ 하는 궁금증보다 노아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는 것만큼은 인지하고 있었다.

“루나, 괜찮아? 안색이…….”

노아가 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그제야 얼어붙었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 일 없었찌?”

“대신전에서?”

“응. 어디 다친 데나, 이유 없이 아픈 곳은 없써?”

의지와 달리 목소리 끝이 떨렸다.

나에 관해서는 아주 세심하고 예리한 관찰력을 지난 노아는 금세 내 상태를 알아봤다.

“보다시피 아주 멀쩡하고 건강해.”

그가 느닷없이 맨몸 체조를 해 보였다. 나름대로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행동인 것 같았다.

“이거 봐, 밥도 하도 잘 먹어서 벌써 키도 이만큼이나 컸다고. 루나 너도 분발하는 게 좋을걸?”

다정한 우리 노아.

널 어쩌면 좋을까?

노아는 코끝을 찡긋거리며 활짝 웃었다. 그건 나에게만 드물게 보이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였다.

내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나오는 특급 필살기랄까.

그는 곧잘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날 웃게 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내가 울적해할 때.

“치. 뇨아는 나보다 오빠쟈나.”

티끌 없는 미소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줄이 놓였다.

바짝 굳었던 안면 근육이 마치 시냇가에 퐁당 빠진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제야 웃네.”

줄곧 내 표정을 살피던 그가 작게 안도하며 덧붙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요즘 맨날 서재에서 틀어박혀서 예법서를 읽거나 수업을 받는 게 다거든. 다칠 일은 하나도 없어. 진짜 진짜 진짜로.”

이렇게까지 내 기분을 살피는 노아 때문에 표정은 전보다 조금 나아지긴 했다만…….

아예 백 퍼센트 마음 놓고 안심하는 건 아니다.

이곳은 까딱 잘못했다가는 불행한 전개로 흘러갈 수 있는 피폐 소설 속이니까.

“요즘 마법 수업도 듣는다묘?”

“혹시 헤리티지 집사장님께 들은 얘기야?”

“혹쉬 나한테 비밀로 하려고 했던 곤 아니지?”

“그게 있지…….”

어라. 정말 비밀로 하려고 했었나 보네.

당황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표정을 보고 나는 팔짱을 꼈다.

“뽕쟁이 뇨아. 나한테 우리 사이에 비밀 만들면 서운하다고 했쓰면서.”

“아냐, 일부러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왜 말 안 해써? 마법 수업을 듣는 것도 그렇고…….”

대신전에 갔다 온 것도 그렇고.

차마 뒷말은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아서 속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당황한 내색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노아가 한숨을 뱉듯 속 얘기를 털어놓았다.

“난 진짜 안 들으려고 했거든? 근데 공작님께서 강행하시는 바람에…….”

“그건 어쩔 수 없찌. 여긴 리아노 공쟉가니까.”

다른 가문이었더라면 마법 수업쯤은 빼먹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곳은 가장 위대한 마법사를 양성하는 데 혈안인 리아노 공작가다.

이곳에서 지내게 된 이상, 당연히 거칠 수밖에 없는 수순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리아노 공작이 노아를 입양한 이유부터가 그에게서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엿봤기 때문이니까.

다만 내가 바라는 건 리아노 공작이 노아에게 집착하는 걸 막는 것이다.

‘노아에게 있는 잠재력을 알게 됐다가는…….’

끔찍한 전개가 예상됐다.

리아노 공작의 오랜 숙원이나 다름없었던, 인간 병기를 만들려고 하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 ……루나 네가 나한테 실망할까 봐.”

노아가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왜 그런 오해를 하는 거야?

“난 그런 걸로 실망 안 해.”

“그렇지만 넌 내가 마법을 안 배웠으면 하잖아.”

노아는 한숨을 뱉으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수업 때는 최대한 비협조적으로 굴고 있어. 잘 못 알아듣는 척 바보 흉내를 내고 있거든.”

조금 속이 상한 듯 살짝 찡그린 얼굴로 덧붙이는 그를 보고 깨달았다.

아, 예전에 내가 했던 말 때문이구나.

바닥에 주저앉아서 제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있는 그의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았다.

“잘해써. 앞으로도 막 이상한 마법 술식이 적힌 걸 쥬면서 해 보라고 하면 무조건 못 하겠다고 잡아떼야 해.”

어느 날 갑자기 리아노 공작이 네게 이해 못 할 술식을 건넨다면, 그건 분명 금기된 마법일 거야.

그의 앞으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니 그런 순간이 온다면 절대 넘어가면 안 돼.

“약속할게.”

새끼손가락을 꼭 맞잡은 노아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살짝 미소 띤 얼굴로 한쪽 턱을 괴고서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다시금 입을 뗐다.

“그런데 가끔 나도 모르게 제어가 안 될 때가 있어.”

“마법이?”

“응.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마법이 저절로 발현될 때가 있거든. 그럴 땐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노아의 몸속 마력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건가?

언젠가 책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강한 마법사일수록 원초적 본능으로 마법이 발현된다고 했다.

노아도 아마 그런 케이스인 듯싶었다.

‘지금은 아직 어려서 통제할 수 있더라도, 나중에 언젠가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막을 수 없겠네.’

그때 가서는 원작 진행을 막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럼 그 언제가에는 라이언하트 가문과 대립 구도가 되겠지.’

서로에게 칼날을 겨룰 이든과 노아를 상상하니 왼쪽 가슴이 미어졌다.

더는 괜한 걱정을 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 저으며 털어 냈다.

“아무튼 미안해. 루나랑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뇨아가 왜 미안해.”

“화 안 났어?”

노아가 가지런히 모아 끌어안고 있는 내 무릎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조심스레 표정에 살피는 보랏빛 눈동자가 몹시 가까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그렇게 쳐다보는 건 반칙이야.

“뇨아는 진짜 바보야.”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두 팔에 힘이 풀렸다.

자신이 미움받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노아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루나한테 미움받기 싫어서 그러지.”

그가 무어라 더 말하기 위해 입술을 떼려 했는데,

달칵.

방문이 열리고 이든이 들어섰다.

‘아빠다.’

이든은 멀쩡한 의자를 내버려 두고 바닥에 나란히 쭈그려 앉아 있는 우리를 보고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단조로운 어투로 내게 말했다.

“이만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든의 등 뒤로 부산스럽게 입구로 향하는 귀족들이 보였다.

로얄 클럽 정기 모임이 파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장 마음속에 걸리는 건, ‘대신전 벽화에서 봤다는 그 성녀의 얘기’였다.

“혹쉬 오늘 여기서 자고 가는 건…….”

“당연히 안 될 소리를 묻는군.”

질문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성급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든이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번쩍 안았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친히 말하기 시작했다.

“내 딸은 늘 그렇듯, 나와 잘 것이다. 내 침대에서 오붓하게.”

“투 머치 한 정보예요.”

노아가 무심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혹여라도 허튼 꿈을 꾸고 있을 애송이 녀석에게 도움을 준 것뿐이다.”

“허튼 꿈이라뇨. 저는 이미 백작님보다 일 년 먼저 루나랑 같은 방에서 자 본 적도 있어요.”

“뭐?”

언제나 낮게 깔려 있던 이든의 음성이 들썩였다.

노아도 참.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사자님께서 오해하시잖아.

나는 괜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노아를 대신해 덧붙여 설명했다.

“쟉년 겨울에 보육원 벽난로가 너무 오래돼서 부서진 적이 있거든요. 그때 모두 같은 방에서 잤었어여, 딱 하루.”

재빠른 해명 덕분인지 다행히 불끈 쥐어진 이든의 주먹이 느슨하게 풀렸다.

“……칫.”

노아가 아쉬운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못 말려, 정말. 그렇게 말하면 사자님이 질투라도 하실 줄 알았던 건가?

노아도 순수한 구석이 있ㄴ…….

“빌어먹을 보육원에 천년의 불씨로 만들어진 마법 벽난로를 방방마다 지원해야겠군.”

……순수한 건 노아가 아니라 우리 사자님이셨네.

천년의 불씨로 만든 마법 벽난로는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작품으로 세상에 열 개밖에 없는 초고가의 희귀품이었다.

웬만한 귀족들도 구하기 어려운 건데, 그걸 방방마다 놓겠다니.

맙소사.

이든이 얼마나 부글부글하는지 그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이든은 쿨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척했지만, 누가 봐도 노아에게 지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에효, 왜 우리 사자님은 노아 앞에서만 저렇게 유치해지시는 걸까.

도무지 저 두 남자를 모르겠단 말이야.

아무튼 간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빠. 죠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안 돼. 바쁘다.”

잠깐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좀 하고 대답해 주시지.

너무 단칼에 돌아온 대답 때문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오늘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리아노 공작가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라, 노아와 다음 만남을 기약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이든이 기꺼이 초대장을 써 준다면야 문제 될 게 없겠지만…….

지금도 저리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노아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 주실 리가 없잖아?

한참의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어쩔 수 없지.

“많이 바쁘시면 아빠 먼져 저택으로 돌아가실래오?”

“……나 혼자, 먼저 돌아가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녜. 아직 뇨아랑 못 한 얘기가 있어서…….”

“전서구를 빌려주겠다.”

“안 돼여. 비밀 얘기거든요.”

전서구는 외부 노출 위험이 컸다. 가급적 직접 묻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거절했다.

“비밀……. 내 딸이…… 외간 놈과 비밀을…….”

휘청거린 이든이 벽을 짚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의 뒤에 먹구름이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우리 루나의 귀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직접 마차로 에스코트해 줄 거니까요.”

잔뜩 어깨가 올라간 노아가 자신의 손을 잡고 내려오라는 듯, 이든에게 안겨 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절대 안 된다. 오늘은 나와 돌아가.”

이든은 절대 뺏길 수 없다는 듯 나를 더 꼭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루나. 네가 선택해.”

두 남자가 동시에 물었다.

“나와 집에 돌아갈 거지?”

“나와 여기 남을 거지?”

얼떨결에 초롱초롱한 눈빛 세례를 독차지하게 됐다.

……아이참, 이렇게 나오신다면야 나한테도 다 방법이 있지.

나는 양 볼을 빵빵하게 불렸다.

정말이지 필살기는 안 쓰려고 했는데.

그러고서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빠밍…….”

그 순간 나는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두 남자의 눈빛을 똑똑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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