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누가 한 말인지 몰라도 진심으로 공감했다.
이든은 확실히 내 눈물에 약했다.
울 것 같은 시늉만 했을 뿐인데, 도도했던 분위기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허둥거리는 모습만 보였다.
“당장 공작저 근처에 쉼터를 사겠다. 아니, 당장 리아노 공작에게 이 방을 얼마에 팔겠냐고 묻고 오도록 하지.”
……그걸 팔겠어요?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는 모습은 확실히 평소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뭐, 사실 그건 노아 쪽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무, 무슨 소리예요. 빨리 루나랑 함께 백작저로 돌아가셔요.”
그는 어린이용 행커치프를 꺼내 들고서 발만 동동 굴렀다.
“루나, 내가 제국이 멸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오늘 못다 한 얘기를 할 수 있게끔 라이언하트가로 찾아갈게.”
멀쩡한 제국은 왜 멸망시키는 건진 모르겠다만, 어쨌든 노아도 항복을 외쳤다.
“그러니까 울지 마.”
“눈물 뚝 해라.”
이번에도 두 남자가 동시에 말했다.
이제야 대화가 좀 통하겠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척했던 나는 으흥흥흥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롬, 둘이 안 싸울 꺼죠?”
벌린 손가락 사이로 빼꼼,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어.”
“난 평화주의자다.”
한쪽은 보육원 시절 전쟁놀이를 즐겼던 남자고, 다른 한쪽은 실제로 전쟁터를 누비며 이름을 떨쳤던 남자지만…….
특별히 이번 한 번만 거짓말에 속아 주기로 했다.
“약속해여.”
한쪽 새끼손가락은 노아에게로, 다른 쪽은 이든에게로 뻗었다.
이제는 둘 다 나와 하는 약속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큰 불만 없이 냉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아이, 착해라.
“쟈, 이제 화해의 포옹!”
두 남자의 손을 끌어당겨 맞잡게 만들었다.
“저 꼬맹이랑 뭘 하라고?”
“루나, 그건 좀…….”
이든과 노아가 서로를 보며 질색했다.
어허, 이 남자들이 정말.
“안 할 꼬에요?”
입술을 한껏 뾰로통하게 내밀고 울상을 짓자, 두 남자가 화들짝 놀라 엉겨 붙었다.
“백작님 제게 안기세요!”
“안았다! 안았어! 봐라, 안았어.”
뻣뻣하게 서로를 얼싸안은 그들 사이에서 나는 으항항 웃었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사이좋게들 지내 주세요.
훌쩍훌쩍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 * *
이든은 내게 한 약속대로 라이언하트 저택으로 도착하자마자 노아에게 보낼 정식 초대장을 써 주었다.
약속한 날은 나흘 뒤였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삼 일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거의 침실에 틀어박혀 보냈고, 그 시간의 대부분은 정보 수집을 위한 독서 시간이었다.
필요한 책은 아침 식사 때 리챠드에게 부탁하면 오후면 받아 볼 수 있었다.
“음, 이것도 대츙 다 읽었따.”
이제 막 마지막 장을 넘긴 책을 덮었다.
【벌써 다 읽었다고? 역시 내 손녀님은 천재인 게 틀림없다!】
엘비른이 겉표지에 ‘승마 교과서, 초급 편’이라 적힌 얇은 책을 뚫고 불쑥 나타났다.
‘깜짝이야!’
하마터면 책을 놓칠 뻔했다.
“그렇게 갑자기 등장하면 심쟝이 콩닥콩닥한다니까여.”
내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님께서는 영 다른 곳에 꽂혀 계셨다.
【내 아들놈은 우리 손녀님의 나이 때 책은커녕 숫자 세는 것도 헷갈려 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손녀님은 영재지, 영재! 아무래도 내 아들놈이 아니라 이 할애비를 닮은 게 아닐까 싶은데…….】
끝도 없는 팔불출이 이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단지 시작일 뿐이고, 저대로 계속 두었다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리라는 것을.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그런 상황만큼은 막고 싶어서 잽싸게 의식의 흐름을 따라 흩어지고 모이길 반복하는 엘베른의 혼을 다시 불러들였다.
“할부지!”
【이 할애비를 불렀느냐?】
그제야 차분해진 그와 대화가 가능해졌다.
“제가 이틀 전에 물어본 건 잘 생각해 보셨써요?”
【내 손녀님께서 리아노 공작가에 다녀온 이후로 달라진 점이 있냐고 물었던 거 말이냐?】
나는 리아노 공작저에서 돌아오자마자 엘베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할부지. 혹쉬, 엘코어를 통해서 동물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써요?]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제가 묻고 싶은 건데,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떡해요.]
도리어 놀라서 되묻는 엘베른 때문에 내가 당황스러웠다.
[【설마 내 손녀님의 경험담인 건가?】]
[녜. 아까 분명 엘코어의 도움을 받았꼬든요. 전 할부지가 도와 쥬신 건 줄 알았는뎨…….]
[【……맙소사. 내가 알기로 그건……!】]
갑자기 심각해진 그 때문에 나도 덩달아서 어찌나 놀랐던지.
조마조마한 심장을 부여잡고 질문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왜요? 무슨 일인데여?]
[【그건……! 내 손녀님께서 천재라는 증거다!】]
조상님만 아니었더라면…….
‘후우.’
우는 주먹을 겨우 달랬다.
나는 혹시라도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말해 달라고 덧붙이며 그를 다시 엘코어 속으로 돌려보냈다.
그런 부탁을 한 뒤로 이틀 동안 깜깜무소식이시더니.
오늘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셨다.
“뭔가 떠올랐써요?”
【글쎄…….】
엘베른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래턱을 매만지며 허공에서 한참 빙글빙글 돌던 그가 이내 ‘음!’ 하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잔뜩 기대하고서 올려다보는 나를 보며 엘베른이 씨익 웃었다.
【오늘 이 할애비의 꿈에서 우리 손녀님이 나왔다!】
“아, 할부지!”
소리를 빽 지르며 달려들자, 엘베른이 내 주먹을 피해 잽싸게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조크였다, 조크! 하하하!】
“자꾸 장난만 치면 앞으로 할부지랑 말 안 할 꼬에요.”
【이 할애비가 잘못했다!】
부디 그것만은!
애타게 외치는 엘베른을 지나 침대 위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른 생각나신 거나 말해 봐여.”
【글쎄. 할애비의 기억이 조금 가물가물하긴 하다만, 곰곰이 좀 생각해 봤는데 며칠 전에 꿈에 말이 나온 것 같기도 하다.】
“혹쉬 검은 말이여써요?”
엘베른이 흠칫 놀랬다.
【어찌 알았냐?】
역시!
아무래도 그날 일은 내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더 기억나는 건 없쬬?”
【아쉽게도.】
이것저것 더 물어봤으나, 모두 두루뭉술한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딱히 명확하게 해결된 건 없지만 그래도 나름의 수확은 있다고 생각한다.
‘엘코어를 이용하면 흑마와 대화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내 예상에 가능성이 높아진 것만 해도 내게는 충분히 의미 있었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그게 가능하냐는 건데.’
그건 차차 알아내야 할 숙제였다.
“또 꿈에 말이 나오거나 특별한 변화가 생기면 저한톄 꼭 말씀해 쥬세요.”
【이 할애비가 약속하마.】
엘베른은 거듭 나와 약속 도장을 찍은 뒤, 엘코어 속으로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곧 리챠드가 올 시간이었다.
나는 침대 옆에 대여섯 권 쌓여 있는 책들을 바라봤다.
모두 말(馬)에 관한 책들이었다.
“이렇게나 읽었는데도 건질 게 별루 없녜.”
물론 대충 속독으로 훑어본 건데도 비슷비슷한 내용들이었다.
‘죄다 폭력에 관한 얘기뿐이야.’
동물에게 적대적인 세계다웠다.
조금이라도 그 흑마랑 친해질 힌트를 얻나 했더니만.
지금 생각해 보니 에덴 제국의 지식에 의존하는 것보다, 엘코어 쪽을 연구해 보는 게 성공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였다.
‘내일이면 벌써 북반구의 야생마가 도착하는 날이네.’
다 읽은 책을 옆으로 재껴 놓고, 벽에 달린 달력을 바라봤다.
<가정의 달 연회>
빨간 동그라미로 중요 표시가 된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리아노 공작과 내기한 그날이었다.
“시간이 조금 빠듯할지도 모르겠따.”
“무슨 시간 말입니까?”
마침 양손 가득 책을 들고 방으로 들어서던 리챠드가 질문했다.
모두 내가 오늘 아침 그에게 부탁했던 책들이었다.
“리챠드!”
쪼르르 달려가 그를 맞이했다.
“아가님께서 부탁하셨던 책들입니다.”
“오!”
그가 차례대로 책을 내려놓았다.
<승마론>
<성공적인 첫 승마를 위한 지침서>
<만점 왕, 승마의 정석>
마지막 책은 최근에 막 나온 거라 구하기 힘들 줄 알았는데, 반나절도 안 돼서 구해 줄 줄이야.
역시 리챠드는 최고의 집사였다.
그나저나, 그건 어디 있지?
부탁한 건 총 네 개였는데,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 하나는여?”
“함께 부탁하신 논문은 아직 구하지 못했습니다. 내일 오전에 있을 가신 회의를 준비하느라 대도서관에 들를 틈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오! 안 그래도 요즘 바쁠 텐뎨 이런 부탁 해서 죄송해요.”
문득 핼쑥해진 리챠드의 볼이 신경 쓰여 미안해졌다.
“아닙니다. 전 괜찮으니 부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님.”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안색이 좋지 않으신걸요?
딱 봐도 수면이 부족해 보였다.
물에 젖은 종이처럼 흐물흐물 걷는 폼부터가 딱 봐도 ‘저 과로 중이에요’ 하고 광고하는 듯했다.
“카멜레온 수인 벤 쟝 씨를 찾는 것 때문에 바뿐 거지요?”
“오, 맙소사. 혹시 각하께서 말씀하신 겁니까?”
“녜. 리챠드도 그렇고, 토리랑 피헨느, 아빠도 많이 많이 바쁜 것 같아서 물어봐써요.”
내 대답을 들은 리챠드가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제게는 아가님께 말했다가는 관작을 짤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으셔 놓고…….”
아하. 그래서 나한테 힘든 걸 내색하지 않으려 했던 거였구나.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먼저 것들을 읽고 계시면 오후에 논문까지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런 슬픈 표정은 짓지 말아 주세요, 아가님.”
리챠드, 다정하기도 하지.
나를 배려하는 그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씩씩하게 대답했다.
“녜, 고맙슴미다!”
“한데 말입니다. 그 논문은 무슨 연유로 찾으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왜 그걸 안 물어보시나 내가 더 궁금했던 참이었다.
리챠드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가님께서 봉인된 마도구에 관한 연구 논문을 찾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