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그래도 어쩌면, 몇십 년 동안 각하를 짓눌렀던 그 죄책감이 사라질지도 모르잖습니까.”
리챠드의 말을 듣고 보니 양심통을 앓는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따끔따끔했다.
‘그동안 너무 나만 생각했어.’
죽음의 위기가 도사리는 세계. 이 속에서 자력으로 생존해야 했기에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간간이 몇몇 캐릭터들에게 도움을 주긴 했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이의 상처를 돌보진 못했네.’
이든이 인간을 원망하는 것도.
식사를 띄엄띄엄하는 습관도.
오랜 불면증을 달고 사는 이유도.
모두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죄책감 때문이라는 걸, 원작을 읽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미처 그를 오랜 상처 속에서 구해 주지 못했다.
‘리챠드의 말대로 그날 일은 사자님의 잘못이 아닌데…….’
원작에 표현되길.
이든은 부모의 원수인 인간들을 혐오하면서, 동시에 그들로부터 부모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하지만 그땐 사자님도 나처럼 한창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였는걸.’
나는 그가 죄책감의 굴레에서 이만 벗어났으면 했다.
무엇보다 매년 가정의 달마다 혼자 괴로워할 일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내게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준 것처럼…….’
그에게 선물 받은 각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걸 준비하는 내내 나를 떠올렸겠지. 최근 들어 부쩍 바쁘게 지내셨던 이유도 이것 때문일 거고.
그런 생각이 더해질수록 그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그래, 나도 아빠를 위해 작은 선물을 할래.
나는 이든의 무릎에서 내려와 두 남자 사이에 섰다.
“제게 좋은 방법이 떠올랐써요.”
자연스럽게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나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눈 속에는 험악한 기운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빠 수업을 다시 듣는 검미다.”
“뭐?”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며 이든은 반듯한 눈썹을 까닥 치켜올렸다.
“할부지랑 함께 아빠 수업을 듣다 보면 서로 서먹서먹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까여?”
“오, 일리 있는 말입니다.”
내 의견에 감명을 받은 듯, 리챠드가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일리가 있긴 무슨……. 잠깐만 리챠드 너, 표정이.”
이든이 순간으로 불길한 낌새를 느끼고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늦으신 것 같아요, 사자님.
“당장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잠깐.”
리챠드가 비장한 표정을 하고서 쌩하니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 망할 똥개 자식.”
이맛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무어라 중얼거린 이든이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 계획에 절대적으로, 몹시, 완벽히, 단호하게 반대한다.”
사자님 저한테 그렇게 엄포해 봤자 소용없어요.
상대는 엄청난 실행력을 가진 리챠드 시고르쟈브죵인걸요?
* * *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눈을 떴다. 밤새 ‘아빠 수업’을 놓고 이든과 리챠드가 실랑이를 벌인 탓이었다.
누가 창과 방패 아니랄까 봐.
두 남자의 입씨름은 새벽이 깊어갈수록 더 치열해졌다.
‘결국 미루는 걸로 결정 나긴 했지만.’
만약 중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밤을 꼴딱 새울 뻔했다.
그나저나,
주변이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평소와 다르게 저택 내 분위기가 묘하게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히히히히잉!
“어이쿠! 다들 조심하시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나는 번뜩 오늘 일정을 떠올렸다.
‘벌써 도착했나?’
달력에 표시된 대로 오늘은 리아노 공작이 북방의 야생마를 보내기로 한 날이었다.
창문으로 뽀르르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프로스트 남작이 한창 검은 말과 엎치락덮치락 하고 있었다.
“크윽. 이 녀석 힘이 장사네!”
히힝, 히히히힝!
그가 흥분해서 날뛰는 흑마를 힘으로 제지하려고 했으나, 그건 무리였다.
잠을 자지도 않고 사나흘은 거뜬히 달릴 수 있는 야생마를 무슨 수로 혼자서 통제해?
“저희가 이쪽을 잡겠습니다! 고삐를 절대 놓으시면 안 됩니다!”
이곳까지 야생마를 끌고 온 리아노 공작가의 시종들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쇠사슬 올가미를 꺼냈다.
휙 휙 휙!
공중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가던 쇠사슬이 이내 말을 덮쳤다.
히히히힝!
놀란 말이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고 했으나, 이미 쇠사슬이 몸통에 걸렸다.
“하나, 둘, 셋 하면 당기시면 됩니다.”
“하나, 둘, 셋! 으챠챠챠!”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제아무리 북방의 야생마라고 할지언정, 성인 남자 다섯이서 합친 힘을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야생마의 콧김 속에는 여전히 분노가 서려 있었다.
‘저러다가 말이 다치겠어.’
불안불안한 상황을 보다 못한 나는 잠옷 차림 그대로 야생마가 날뛰고 있는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저들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아가님!”
“안뇽하세요, 프로스트 남쟉밈.”
정문을 밀고 나온 나를 발견한 프로스트 남작이 창백해진 낯빛으로 껑충 뛰었다.
“어찌 나오셨습니까?!”
“야생마를 보러 왔써오.”
“지금은 말이 흥분한 상태라 위험합니다. 진정시킨 후에 불러 드릴 테니 지금은 저택 안에 들어가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오늘 안에도 어림없을 것 같은뎨요.”
나는 흑마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고삐를 가리키며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말의 주둥이와, 허리, 배 쪽에 자잘한 상처들이 눈에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하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부터 시작해서 오래된 것들까지 다양했다.
그 모든 상처를 만들어 낸 원흉은 리아노 공작가에서 사용하는 승마 용품들 때문이었다.
주둥이를 압박하는 마법 고삐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말을 탈 때 승마용 구두에 착용하는 ‘박차’였다.
‘저거 때문에 배가 엉망이야.’
리아노 공작가는 끝이 톱니형으로 된 박차를 사용했다. 이는 말에게 더 자극을 줘서 빨리 달리게 할 수는 있었지만, 자칫 신경 쓰지 않으면 말의 배에 상처를 내기 쉬웠다.
“아가님, 위험하십니다!”
“괜챤뎨도.”
“각하께서 보셨다가는 저는 물론 저 시종들까지 줄줄이 밥줄이 잘릴 일입니다. 그러니 제발 그 명령을 거둬 주십시오.”
프로스트 남작의 말에 동의를 표하듯, 시종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비록 리아노 공작가에 소속된 시종이긴 하다만, 혹여라도 어린 영애가 다치면 곤란했다.
귀족 가문 사이에서 일이 발생한다면, 고스란히 그 책임을 자기들이 물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학습해서 알고 있었다.
“일단 절 믿구, 그 고삐부터 놔 봐여.”
“그랬다간 정말 큰일 날지도 모릅니다! 말의 뒷발에 챘다가 크게 다친 사례가 수두룩합니다.”
“설마 절 못 믿으시는 거예여?”
“이건 단순히 아가님을 신뢰하냐, 신뢰하지 못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흐음. 단호하게 나오시겠다?
이 방법만큼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히히히힝!
쪼여 오는 고삐의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는 야생마를 도와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결심했다.
‘순순히 제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거예요, 프로스트 남작님.’
당신이 사업에 있어서 유능한 전략가라면, 나는 공갈 협박에 도가 튼 ‘뒷골목의 제갈량 아가’니까.
입술을 있는 힘껏 삐쭉 내밀고서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아빠한테 다 이를 꼬야.”
“예?! 각하께요?”
“내 말은 들어주지도 않코, 내가 말 뒷발에 차일 거라고 겁줘따고.”
“아, 아니, 저희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
“엉엉엉 울고 코도 훌쩍훌쩍할 꼬에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미간을 찌그러트리자, 프로스트와 시종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런, 일 났다.
표정에 감정이 다 적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프로스트 남작의 반응이 큰 것은 요즘 라이언하트 저택에 떠도는 소문 탓이 컸다.
[각하께서 아기님을 울린 다페 남작의 손목을 비틀어 버리셨다며?]
[그뿐이야? 저번에 왜 저쪽 남쪽으로 유배 보낸 작자 말이야. 그 작자는 평소에 아가님을 깔보기 일쑤였대.]
요 근래 라이언하트 저택에 그런 말이 떠돌고 있다는 것을 오고 가며 토리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용인들은 이든이 내게 유별난 반응을 보인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 사이에서 한 공식이 형성됐다.
아가님을 울리는 놈 = 감봉 대상 (경우에 따라서는 제명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할 것)
해서 프로스트 남작이 가장 먼저 야생마를 옥죄던 고삐를 부랴부랴 놓았다.
“노, 노, 놓았습니다!”
양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말에게서 떨어진 그를 보고 리아노 공작가의 시종들은 당황해했다.
나는 그들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조씨들은 안 놓을 꼬에요?”
“그, 그게…….”
이걸 어찌해야 해?
그들은 서로 눈치 보며 쇠사슬 올가미를 쥔 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들이 망설이는 동안에도 내 신경은 온통 야생마에게 가 있었다.
‘저 망할 놈의 쇠사슬 때문에 상처가 더 났겠네.’
리아노 공작저에서 얼핏 봤을 때도 몸에 상처가 많았었다.
‘이러니까 몸이 성할 리가 없지.’
그간 어떻게 야생마를 다뤘을지,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훤히 그려져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가뜩이나 인간에게 곁을 내주지 않기로 유명한 야생마인데…….
이런 식의 취급을 받았으니, 흑마가 예민하게 구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 같아도 성질이 날카로워졌겠어.
“그 쇠사슬 풀어여, 당장.”
“아이고……. 그랬다가 뒷일을 저희보고 어찌 감당하라고 그런 명을 내리시는 겁니까요.”
“뒷감댱은 내가 할 테니 놔요. 적어듀 우리 집에서 폭력을 쓰는 꼴은 절대 못 보니까.”
나는 여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랫사람에게 하명하는 상관의 모습과 완벽히 닮아 있었다.
좀처럼 어린아이에게서는 느끼기 어려운 위용을 경험한 시종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뒤이어 냉기가 흐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보군.”
“가, 각하!”
프로스트 남작이 정원의 풀숲 사이로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든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이든은 살기 넘치는 눈으로 프로스트 남작과 시종들을 노려보았다.
아카데미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지?
무엇 때문에 이든의 심기가 불편한 건지를 한눈에 알아차린 프로스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어느 부분부터 들으신 겁니까?”
“내 딸의 말을 들은 채도 않았을뿐더러 감히 겁도 없이 내 딸에게 겁박을 했다는 것부터.”
“맙소사.”
프로스트는 이든이 자신과 시종들에게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오자, 다급히 내 쪽을 쳐다보았다.
“아가님, 부디 해명을……! 저 아직 장가도 못 갔습니다!”
“영애님, 살려 주십시오!”
덜컥 겁을 먹은 시종들도 덩달아 울상이 된 채 쇠사슬 올가미를 놓았다.
팽팽했던 쇠사슬이 촤르르륵! 풀리더니,
탁!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나뒹굴었다.
마침내 자유를 얻은 야생마가 앞발을 높게 쳐들며 히히히힝! 울음을 터트렸다.
새카맣게 빛나는 흑마의 두 눈동자는 정확히 나에게 향해 있었다.
“!”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푸르르르!
몸이 가벼워진 야생마가 내 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착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