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북방의 야생마는 몸 전체가 단단한 근육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이는 야생마에게 힘겨루기를 하겠답시고 덤볐다가 뒷발에 채여 전치 4주를 진단받았다.
또 혹자는 아직도 비 오는 날이면 정통으로 들이받힌 허벅다리가 시큰시큰 아파 온다고 했다.
그 밖에도 무성한 소문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야생마가 나를 봤다.
햇빛에 반사된 검은 안광이 번쩍였다.
―푸르르르, 푸르르!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투레질 끝에 야생마가 발을 굴렀다.
방향은 내 쪽을 향해 있었다.
“아가님, 피하십시오!”
외마디 비명이 말발굽 소리와 뒤섞여 귓등을 내리쳤다.
그걸 신호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도망치라고?’
점점 가까워지는 말의 두꺼운 허벅다리와 리아노 공작가의 시종들이 경악하며 입을 틀어막는 모습.
모든 것이 슬로 모션으로 스쳐 갔다.
인간은 위험한 순간에 주마등이 스치는 걸 경험한다고 했던가.
단편적으로 시야에 찍히는 모든 순간들이 내게 위험을 알리는 와중에 불현듯 옛 기억이 스쳤다.
어쩌면 주마등일지도 모를, 보육원 시절 수녀님께서 해 주셨던 영웅에 대한 이야기였다.
[에덴 제국을 건국한 초대 황제 폐하의 곁에는 든든한 동료들이 있었단다. 그중, 제일 위대했던 영웅은 검은 말을 타고 다니는 자였지.]
[왜 그 영웅이 제일 위대했써요?]
[그분은 북방의 야생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정한 유일한 동료였거든.]
당시 노아와 나는 옛이야기를 듣고서 말타기 놀이를 하러 뛰쳐나갔던 기억이 있었다.
‘그다음 수녀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더라.’
나는 곰곰이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맞췄다.
‘북방의 야생마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 영웅은 분명…….
나는 또렷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까맣고 윤이 반짝이는 말의 두 눈동자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래, 그거였어.
짧은 생각이 스치는 동안, 야생마는 바로 코앞까지 와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모두 도망을 선택하겠지만…….’
나는 다른 선택을 하겠어.
‘옛이야기 속의 영웅이 했던 그 선택을.’
분명 나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에 목에 걸린 엘코어를 꽉 끌어 쥐었다.
어느덧 커다란 그림자가 내 얼굴 위 드리웠다.
“제길!”
멀지 않은 곳에서 혀끝에 맺힌 욕지거리를 거칠게 내뱉는 이든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린 것도 같다.
나는 달려오는 말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멈쵸.”
내 속삭임을 기점으로 기이하게 늘어졌던 시간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고 폭포수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타앗!
이든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나는 그의 품속에 있었다.
“!”
그다음 내가 본 장면은,
우드득!
내 얼굴을 감싼 이든의 한쪽 팔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멈춘 야생마였다.
“각하! 아가님!”
이어 들리는 프로스트의 고함 소리를 듣고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몸에 힘이 빠진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같이 견고했던 야생마의 몸뚱이가 잔디밭 위로 철퍼덕 쓰러졌다.
* * *
이든은 전치 2주를 통보받았다.
어깨 뼈와 근육 파열.
달려드는 야생마를 한쪽 팔로 막아낸 것치고는 크지 않은 부상이었다.
“천운이었습니다.”
진료를 맡은 의사는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보통 사람이었더라면 병상에 꼼짝없이 누워 꼬박 두 달은 병 수발을 받아야 할 일이었다.
“당분간은 푹 쉬시고 뼈가 도로 붙을 때까지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치료를 마친 의사가 방을 나서자, 내내 방문에 기대 불만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리챠드가 이든이 앉아 있는 의자로 다가왔다.
“이만하길 정말 천운이랍니다.”
이든은 잔소리를 들은 체하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오른쪽 어깨를 압박하고 있는 붕대에 쏠려 있었다.
“거추장스럽군.”
“어디 한번 풀기만 해 보십시오. 바로 아가님께 일러바칠 터이니.”
어깨에 칭칭 감긴 붕대를 풀려고 했던 이든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제 한 몸 아끼지 않는 상전을 보호할 수만 있다면야, 협박 정도는 얼마든 할 수 있습니다만.”
리챠드가 콧방귀를 흥, 뀌었다.
원래도 자신의 주군은 다치는 것 따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만, 최근 들어서 부쩍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
특히나 작은 주인님에 관한 일에서는 중증 환자가 따로 없었다.
‘각하께서는 본인 몸이 무쇠라도 되는 줄 아시는 건가.’
요리 대회 때의 일도 그렇고, 이번 일 역시 무모했다. 아무리 수인이 인간보다 뛰어난 신체를 가졌다지만, 다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쳐 온 제 주군을 보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그 앞뒤 생각 안 하고 뛰어들기부터 하시는 버릇, 언제쯤 고칠 생각이십니까?”
“루나가 다칠 뻔했다.”
“의사가 말하기론 마침 말이 멈추려고 속도를 줄이고 있던 덕분에 각하께서 덜 다친 거라 했습니다.”
“내가 굳이 구하지 않았어도 됐을 거란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이든이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바로 지척이었다. 설사 공격 의사가 없었다고 해도, 말은 제 속도를 못 이기고 그대로 루나를 들이받았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든의 논리가 전적으로 맞았다.
물론 리챠드 본인도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주저 없이 제 주군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든에게 핀잔을 늘어놓는 이유는…….
“누가 옳고 그른지 말씨름하자는 게 아니라 제 뜻은…….”
“안다, 얌전히 회복하라는 거겠지.”
그래, 걱정이었다.
이 몹쓸 주군께서 그래도 제 마음을 아예 몰라주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신 거냐고 따져야 할지.
고민해 봤자 제 속만 탓기에, 리챠드는 깊이 생각하는 것을 관뒀다.
“부디. 2주 동안 몸을 험하게 쓰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아가님도 동의하실 겁니다.”
“당장에라도 찢어 버리고 싶은 이 걸리적거리는 천 쪼가리도 하고 있을 테니까, 잔소리는 그쯤 하도록.”
“뼈를 잘 붙게 해 준다는 약초 달인 물도 삼시 세끼 잘 챙겨 드시지 않으면 곧장 아가님께 가서 고할 겁니다.”
“놔두면 알아서 붙는 게 뼈다. 인간들이나 하는 짓을 내가 왜…….”
“모두 아가님의 명령입니다만.”
“…….”
이든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각하께서 영 불만이시라면 아가님께 항의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벌컥 벌컥,
이든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의사가 시범 삼아 달여 놓고 간― 약초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탁.
빈 그릇을 내려놓고 입가를 스윽 닦았다.
이내 째려보며 ‘됐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리챠드는 미소로 대답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이 치사한 똥개 같으니라고.
자신에게 루나의 이름은 아주 효과적인 설득법이라는 것을 제 부하 녀석이 습득한 모양이었다.
말이 길어져 봤자 절대적으로 이든 자신이 불리해질 걸 알았다.
그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루나는?”
“아가님께서는 마구간에 가 계십니다.”
“혼자서?”
“웨인투르 씨와 같이 계십니다. 그러니 괜히 행차하실 생각은 마시고 의사의 말대로 침대에 누워 심신의 안정을 취하십ㅅ…….”
……하아.
본의 아니게 말허리가 끊긴 리챠드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래. 곱게 누워서 심신의 안정을 취한다면 그건 제 주군이 아니시지.
이미 이든은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쳐나간 후였다.
보나 마나 목적지는 아가님이 계시는 마구간일 터. 부디 더 다쳐 오시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북방의 야생마를 위해 비워 둔 마구간은 침묵이 흘렀다.
‘아빠가 거기서 나설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했어야 했는데.’
이든은 전치 2주고, 말은 쓰러졌다.
내가 짜 놓은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정 안 되면 내가 대신 나서야 할지도 모르겠어.’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하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시 놀란 것 같습니다.”
내 부탁으로 쓰러진 야생마의 상태를 살피던 웨인투르가 내게 말했다.
“푹 쉬면 괜챤아질까여?”
“네. 하루 정도 푹 자고 일어나면 금방 기운을 차릴 겁니다.”
“휴우. 다행이댜.”
일단 말이 크게 다친 것은 아니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럼 문제는 우리 사자님 쪽이려나?
아무래도 해결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야생마가 푹 쉴 수 있도록 푹신한 지푸라기를 깔아 주고 있는 웨인투르를 바라봤다.
“그론뎨, 웨인투르는 말에 대해서 오또케 그렇게 잘 아는 거예요?”
“검투장 생활을 하기 전에 지냈던 곳이 북방 지역과 접경해 있는 초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습득했을 뿐이죠.”
오, 그건 몰랐던 사실인데.
작게 감탄을 뱉는 나를 보며 웨인투르가 멋쩍게 뒷목을 매만졌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습득한 잡지식입니다.”
“별거 아니긴요. 웨인투르 덕분에 말을 잘 보살피고 있쟈나요. 웨인투르가 있어서 참 다행이에여!”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따뜻해지는군요.”
그녀는 과분한 칭찬이라 여기는 것 같았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안 그래도 비스에 진심으로 동물을 위해 주는 수의사가 있긴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는걸?’
다행히 말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웨인투르 덕분에 걱정은 덜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모가요?”
웨인투르가 내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가님 덕분에 제 아이를 잘 보내주었습니다.”
그 말의 뜻을 곧장 알아차린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함께 고개를 마주 숙였다.
“따님께 안식과 평화가 깃들길 기도할께여.”
웨인투르의 얼굴 위로 희미한 그리움이 스쳐 갔다.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린 웨인투르는 언제 서글펐냐는 듯, 다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휘이익!
그녀가 휘파람을 불며 재차 건초를 힘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흑마는 푹신하게 깔린 지푸라기 위에 턱을 올려놓고 누워 있을 뿐, 먹이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먹이 반응이 전혀 없는 걸 보니 상태가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한참의 시도 끝에 관심 끌기를 포기한 웨인투르는 한발 물러섰다.
“흐음.”
“혹쉬 어디가 아픈 걸까요?”
“다른 요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금 더 관찰해 봐야지요. 다만 입맛이 없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물통도 건드린 흔적이 전혀 없었다.
말은 매일 자기 몸무게의 1~2%만큼 먹이를 섭취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빈 마구간으로 옮겨 온 지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건초 한 입, 물 한 모금 대지 않았다.
“밥이 입맛에 안 맞는 곤가.”
“특식을 준비해 보는 것도 방법일 듯합니다. 무릇 치료는 풍부한 영양 섭취로부터 시작되니까요.”
특식?
웨인투르의 조언을 듣고 번득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나한테 집 나간 입맛도 돌아오게 만드는 비장의 방법이 있었지, 참.’
우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검은 말을 보며 으흥흥, 웃음을 흘렸다.
“아가님?”
“좋은 방법이 떠올랐써요.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보세오!”
의아해하는 웨인투르를 뒤로하고 식량 창고로 호다다닥 달려갔다.
마침 그곳에서 재고 정리를 하고 있던 릴리앙이 내게 알은체를 했다.
“아가님, 여긴 어쩐, 어쩐 일로.”
“안뇽, 릴리앙! 혹쉬 신선한 당근이랑 츄르를 만들고 남은 츄릅 열매 액기스, 그리고 설탕을 조금 얻을 수 있을까여?”
“아가님의 부탁, 부탁이시라면 얼마, 얼마든지요.”
“고맙슴미다!”
나는 릴리앙이 꺼내 준 재료를 들고서 도로 마구간으로 돌아왔다.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쪼그려 앉아서 꾸준히 건초를 흔들고 있던 웨인투르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그건 뭔가요?”
“으흥흥, 마성의 츄르 당근을 만들 거에여!”
“츄르…… 당근?”
듣도 보도 못한 음식에 웨인투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기다려 보시라.
태어나서 한 번도 안 먹어 본 말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말은 없을 ‘츄르 당근’의 매력을 야생마에게 보여 드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