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묽은 식감의 사자님용 츄르와 딱딱한 식감의 댕댕이용 츄르 개껌.
거기에다가 드래곤 고기에 츄르를 조합해서 만든 신개념 튀김 요리 릴까스까지.
그간 내가 개발했던 다양한 요리에 비하면 츄르 당근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깨끗한 물에 뽀득뽀득 씻은 당근을 츄릅 열매 액기스 속에 퐁당퐁당 담구면 됨미다.”
“이 액기스가 맛의 비법이군요.”
“녜!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근 끄트머리에 설탕을 콕콕콕콕 찍어 쥬면 완성!”
웨인투르는 알려 준 방법대로 따라서 만든 츄르 당근을 아삭,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내 그녀의 동공이 확장됐다.
“맛이 오때요?”
“……녀석이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습니다.”
당연하죠. 이건 사자님의 마음도 녹인 내 필살기니까. 으흥흥흥.
비장의 츄르 당근을 들고서 검은 말을 향해 다가갔다.
“말아, 뇸뇸할 시간이야.”
“직접 주실 생각인가요?”
“프로스트 남쟉밈처럼 위험하다고 말리실 꼬에요?”
“아뇨, 전 스킨십을 통한 교감을 중시하는 편이라.”
“믿어 쥬셔서 고맙슴미다.”
웨인투르가 활짝 웃으며 빨간 가죽 장갑을 낀 주먹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도와드릴 테니 마음 놓고 먹이를 주셔도 됩니다. 동물들은 상대방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거든요.”
“녜. 웨인투르만 믿고 천천히, 차분하게 다가가 볼께오.”
살금살금.
나는 한 발짝씩 걸음을 뗐다.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혀 갔다.
‘웨인투르의 말대로 먼저 자극하지 않으니까, 공격하지 않네.’
야생마는 의외로 얌전했다.
나는 어느덧 손을 쭉 뻗으면 닿을 정도로 야생마와 가까워졌다.
‘가까이 보니 상처가 훨씬 많네.’
말의 배와 허리 쪽에 자리 잡은 크고 작은 상처들을 자세히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치료해 주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한 발짝 더 다가가려면 더 깊은 신뢰가 필요했다.
“안뇽, 말아. 난 루나야.”
엎드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말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제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이는 상대방에게 공격 의사가 없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힐끔.
내내 관심이 없던 야생마가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오. 내게 드디어 관심이 생긴 건가?’
하지만 기대와 달리 야생마는 푸릉!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이거 자존심을 자극하는데?
나는 은근한 승부욕을 느끼며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한 입만 먹어 볼래? 진쨔 진쨔 맛이써.”
나는 츄르 당근을 말의 코앞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서로 간의 거리는 고작 한 뼘. 츄르 당근의 새콤달콤한 향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푸르릉!
말은 츄르 당근에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재차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건 솔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킁. 킁킁. 킁.
무심한 눈빛과는 달리 벌렁거리는 콧구멍은 몹시 정직했으니까!
체크 메이트.
나는 웃음을 참으며 당근을 고쳐 쥐었다.
“잘 챙겨 먹어야 얼른 낫찌. 일댠 한 번만 잡솨 봐.”
콕.
츄릅 열매 액기스와 설탕을 듬뿍 묻힌 츄르 당근을 말의 입에 들이밀었다.
그러나 본능에 충실한 콧구멍과는 반대로 굳게 닫힌 입술은 벌어질 생각이 없었다.
“진쨔 안 먹을 꼬야?”
푸릉!
이거 이거, 은근히 콧방귀를 뀌는 것 같단 말이야.
그래도 괜찮았다.
나한테는 다 방법이 있었으니까.
“흠, 흠.”
나는 슬그머니 웨인투르에게 도움 요청을 보냈다. 다행히 센스 있는 그녀는 내 마음을 금방 알아차리고 새 츄르 당근을 꺼내 들었다.
“네 입맛에도 맞을 거다.”
웨인투르가 보란 듯이 야생마 앞에서 당근을 베어 물었다.
아삭!
경쾌하게 퍼지는 씹는 소리는 당근의 신선도를 증명하는 척도였다.
그녀는 정말 맛있게 먹을 줄 아는 캥거루였다.
아삭, 아삭!
생생한 시식 시범이 이어졌다.
양 뺨이 빵빵해질 정도로 당근을 베어 문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츄르 당근을 해치웠다.
당근이 주식이 아닌 내가 봐도 저절로 먹고 싶게끔 만드는, 군침 도는 먹방이었다.
그리고 그건 야생마에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바로 눈앞에서 당근 먹방을 목격한 말의 목울대가 넘어갔다.
―꿀꺽.
이거 봐, 통할 줄 알았다니까.
“얼른 먹어 봐. 너만을 위해서 쥰비한 특식이니까.”
나는 마치 백설 공주에게 독사과를 먹이기 위해 유혹하는 마녀처럼 츄르 당근을 들고 속삭였다.
그리고 결국에는,
……쩌어억……
굳게 닫혔던 말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좋았어, 성공이다!
말을 흥분시키지 않기 위해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다가간 것과 공들여 특식을 만든 노력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츄르 당근을 맛보고 나면 경계심이 조금은 풀리겠지?’
그럼 그때 배와 등에 난 상처들을 치료해 줘야겠다.
행복 회로가 불탔다.
내 나름의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며 흡족한 얼굴로 말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침내 야생마가 츄르 당근을 한 입 아삭! 하려는 순간.
“누구만을 위해서 준비해?”
쾅!
거칠게 열린 마구간의 문이 벽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
그 소란의 범인은 이든이었다.
히히히힝!
깜짝 놀란 야생마가 벌떡 일어나 다시금 날뛰기 시작했다.
아아.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제야 겨우 조금 경계를 지웠나 싶었는데…….’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어젖히고 난입한 이든이 내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 와중에 우리 사자님은 왜 저리 성난 표정이신 걸까.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내 계획이 물거품처럼 포로퐁퐁 터졌다는 거다.
* * *
나에게는 다친 이든을 살펴야 한다는 막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이든이 ‘나를 지키기 위해서’ 다쳤기 때문이기도 했고, 사자 수인이 회복 기간이 긴 건 드문 일이기 때문이었다.
‘전치 2주라고 했었나?’
얼핏 보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수인이라는 걸 감안하면 큰일이었다.
특히나 사자 수인에게 이 정도 부상은 평생 손에 꼽힐 일인걸?
……아무튼 간에.
나는 놀란 야생마를 웨인투르에게 잠시 맡겨 두고, 이든을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일댠 아빠 방으로 가까요?”
“좋은 생각이다.”
사자님은 의외로 순순히 내가 가자는 대로 쫄래쫄래 따라오셨다.
그럼 아깐 왜 그렇게 화가 나셨던 거람.
나는 내게 보폭을 맞춰서 나란히 걷는 이든을 곁눈질로 힐끔 살폈다.
어깨에 칭칭 감긴 붕대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어깨는 괜챠나요?”
“걱정해 주는 건가?”
“그렇게 힘 막 쓰셨다가 어깨 더 다치면 오또캐요.”
“확실히 걱정이군.”
묘하게 분위기가 풀어졌다.
날이 서 있던 말의 가닥이 살짝 유해진 것 같기도 하고.
모르긴 몰라도 나쁜 흐름은 아니니, 나는 침실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얼른 침실에 모셔다드리고 마구간에 다시 가 봐야 했다.
내게는 아빠를 살펴야 한다는 책임감과 더불어 야생마를 치료해 줘야 한다는 정의감, 그리고 내기에서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도 있었으니까.
“의사 선생밈 말대로 푹 쉬셔야 돼여. 그래야지 빨리 낫죠.”
“네가 그러라면 그러겠다.”
줄곧 꽁해 있던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그가 내 쪽으로 팔을 뻗었다. 아마 나를 안으려고 한 것 같았다.
“앗, 안 돼여!”
나는 참새처럼 폴짝 뛰어서 그의 손을 피했다. 그러자 허공에 덩그러니 길을 잃은 손이 그대로 굳었다.
“…….”
“당분간은 안아 쥬기 금지에여.”
“언제까지 금지인 거지?”
“붕대 풀 때까지요.”
“그럼 지금 당장 이 거추장스러운 붕대를 풀도록 하겠다.”
“쓰읍!”
이 사자님이 진짜.
허리에 손을 얹고 눈을 게슴츠레 뜨며 쳐다보자, 붕대를 찢어발기려던 그의 손이 거둬졌다.
“……알겠다.”
어째 방금 보이지 않는 사자님의 귀가 추욱 처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이겠지?
‘후우.’
마음이 조금 약해지려고 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 돼, 마음 단단히 먹어야지.
무엇보다 나는 그가 더 이상 다치는 걸 원치 않았다.
“자꾸 세상 다 잃은 눈빛으로 쳐다봐도 소용없꼬든요.”
“……안 통하는군.”
칫, 아쉬운 듯 혀를 차는 그와 어느덧 침실에 도착했다.
나는 그가 방문을 열어 주길 기다리는 대신 옆으로 슬쩍 비켜섰다.
“그럼 들어가서 쉬셔여.”
“넌?”
“전 가 볼 데가 있어 가지구.”
이든이 문고리를 돌리다 말고 휙 돌아섰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한껏 삐딱했다.
어랏. 왜 또 새초롬해지신 거죠?
“설마 또 마구간에 가려는 건 아니겠지.”
“정답임미다. 아직 제가 만든 먹이를 못 줬써요.”
손에 쥔 츄르 당근을 흔들었다.
그러자 문고리에서 우드득, ―하는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방금 뭐 부서지는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입을 떡 벌리며 쳐다보니, 이든이 문과 완벽히 분리된 문고리를 자신의 등 뒤로 스윽 숨겼다.
저기요, 다 봤거든요?
“잡일은 사용인들에게 시켜.”
“마구간 시죵들이 야생마를 무셔워해서 안 됨미다.”
“그 자식들…… 봉급을 줄 필요가 없겠군.”
빠드드득.
이번엔 이든의 등 뒤에서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정말이지, 우리 사자님의 넘치는 힘을 어쩌면 좋을까.
“혹쉬 해서 말씀드리는 건뎨. 이유도 없이 시종들을 자를 생각 하시면 안 돼여.”
“…….”
움찔.
그가 눈에 띄게 등을 떨었다.
이거 봐, 이거 봐. 내가 말 안 했으면 죄 없는 분들만 실직자가 될 뻔했네.
그들은 죄가 없다.
소문 그대로 야생마는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다치게 하는 동물이었으니, ―게다가 이든이 다치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하기도 했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애초에 야생마가 받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시종들에게 물러가라 명령을 내렸다.
물론 우리 사자님 눈에는 그저 돈 주고 고용한 사용인들이 연약한 아가를 위험의 구덩이에 던져 놓고, 나 몰라라 하는 걸로 보이셨겠지만.
어찌 됐건, 팩트는 모두 내 계획이었다는 거다.
‘으음.’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지 우리 아범을 설득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야생마는 지금 몸이 많이 많이 아파서 옆에서 돌봐 죠야 할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걸 잘 해낼 사람은 이 세상에 제가 유일하구여.”
이것이 우리 사자님께 충분히 납득될 수 있는 이유이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