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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74/142)

74화

머지않은 미래에 수인과 동물을 위해 맞서 싸우는 이든 라이언하트.

그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수인과 동물을 위해서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투쟁했다.

가히 존경할 만한 우두머리였다.

아무리 열세한 상황에서도 절대 동료를 버리지 않는 그의 곧은 심지를 보고서, 어떤 독자는 독립 운동가가 떠오른다고 평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그 댓글에 동감했다.

그리 희생적인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건, 이든이 평소 동족을 사랑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우리 사자님께서는 내 말을 금방 납득하실 줄 알았다.

“야생마는 지금 몸이 많이 많이 아파서 옆에서 돌봐 죠야 할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걸 잘 해낼 사람은 이 세상에 제가 유일하구여.”

그런데 왜, 내 예상과 다른 전개로 흘러가는 걸까.

“그럼 나는.”

“녜?”

얼뜨기처럼 되묻는 내게 이든은 붕대를 칭칭 감은 어깨를 내보였다.

“나도 매우 몹시 많이 다쳤다. 해서 옆에서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고.”

“리챠드를 불러 드릴께오.”

“그 똥개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가 유독 한 단어를 강조하며 발음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프로스트 남쟉ㅁ…….”

“아니. 그걸 잘 해낼 사람은 이 세상에서 네가 유일하다.”

단호하게 말을 끊은 그가 내 앞을 막아섰다.

“네가 돌봐 주지 않는다면 어깨의 부상이 몹시 더욱 심해질 것이 예상되는군.”

“그런 게 어딨서요.”

“여기 있어.”

이상하다. 우리 사자님께서 절대로 어리광을 부리실 분이 아니신데.

왜 그런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억지 쓰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 보니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어깨가 너무 아파서 평소답지 않게 행동하시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약속해라. 오늘 내 어깨를 돌보고 살피기로.”

그런 생각에 이든이 나를 보호해 주려고 했다가 다쳤다는 미안함이 더해졌다.

그래서 나는 이든이 뻗은 새끼손가락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 * *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의 노랫소리가 아침이 왔음을 알렸다.

눈을 떴을 땐, 이제는 익숙해진 이든의 침실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으아. 결국 어제 하루 종일 아빠 옆에만 있었네.’

어제 나는 이든과 한 약속 때문에 마구간을 다시 가 보기는커녕, 온종일 그의 곁을 지켰다.

“시간이 얼마 남았더라.”

손가락을 펼쳐 남은 날짜를 가늠해 보았다.

리아노 공작과 내기한 가정의 달 연회까지 D―9.

약속한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전까지 야생마와 교감에 성공해서 빌런들에게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야만 했다.

비록 어제는 사자님을 보필하느라 아무것도 못 했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말과 친해질 꼬야.”

좋았어.

의지를 불태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단 그러려면 먼저 마구간에 가야 하는데.’

슬그머니 고개만 돌려 옆을 살폈다.

한쪽 어깨에 붕대를 칭칭 감은 커다란 사자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깨시기 전에 잠깐 다녀와야겠다.’

먼저 그와 함께 덮고 있는 이불을 살짝 걷어 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다음은 데굴데굴 작전!

예민하신 사자님을 깨우지 않는 선에서 침대 위를 빠져나가는 것은 상당히 고난도 미션이었다.

1단계. 일단 한쪽 다리를 스리슬쩍 반대쪽으로 넘기는 데까지는 성공!

그다음, 2단계.

읏챠! 허리 힘으로 돌아눕기까지 거뜬하게 해냈다.

마지막으로 대망의 3단계였다. 어깨 반동을 이용해서 남은 반 바퀴만 돌면 침대 끝에 도착이었다.

‘후우. 시작해 볼까?’

호흡을 가다듬은 후, 침대 탈출 성공을 눈앞에 두고서 막 몸을 뒤집어 돌리려는데,

덥석.

커다란 사자의 앞발이 내 허리를 붙잡았다.

‘헉.’

그대로 굳어 버린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서, 설마…….

놀라서 콩닥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

곧장 맹수의 금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나른하고도 오묘한 눈동자가 내 시선을 옭아맸다.

그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마치 그 눈빛이 내게 ‘설명해 보시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제 발 저린 나는 어색한 인사를 꺼냈다.

“굿모닝이에오.”

“좋은 아침일 리가. 내 따님께서 아침부터 나를 떼어 놓고 도망갈 궁리만 하시는데.”

“그로니까, 그게…….”

괜히 찔려서 목소리가 절로 기어들어 갔다.

죄 없는 잠옷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내게 이든이 돌직구로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나 그 말이 좋나?”

으음, 이걸 어쩐다.

이렇게 된 이상 어설픈 탈출 계획은 접기로 했다.

물론 내게는 아직 플랜 B가 남아 있었다.

플랜 B는 바로 바로, 차근히 설득해서 아빠의 허락 구하기!

승산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뭐, 일단 해 보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이번에 내기한 거 까먹었어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게 네가 마구간에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아빠가 다치셨으니 저라도 일단 말이랑 친해져야져.”

“네가 저 말에 오르겠다는 건가? 그런 위험한 짓 하지 말고 내가 다 나을 때까지…….”

“아빠는 전치 2주인뎨, 내기는 2주도 안 남았는걸요.”

“…….”

2주 뒤, 가정의 달 연회에서 보여 주겠다고 한 건 본인의 발언이었으니, 스스로도 할 말이 없었나 보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이든은 침대 맡에 놓여 있는 그릇을 사발 째 들이켰다. 그건 리챠드가 때마다 놓고 가는 약초 달인 물이었다.

벌컥벌컥, 단숨에 약초 물을 비워낸 그가 입을 열었다.

“리아노 공작가에 날짜를 미루자고 편지를 쓰도록 하지.”

“그랬다가는 더 웃음만 살 거예요. 아마 우리가 무서워서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할걸여?”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들은 처리해 주겠다.”

“안 돼여. 그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폭력을 쓰는 게 싫어서 내기를 하자구 한 곤뎨. 아빠도 그러면 어또캐요.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내기에서 이겨야져.”

나는 여태까지 만났던 빌런들의 행동을 떠올리며 인상을 팍 썼다.

“폭력이 당연시 여겨지는 게 싫슴미다. 특히 동물이나 수인들한톄 화풀이하는 어른들은 바보 멍청이 똥꼬들이야!”

확, 승질 같았으면 궁둥짝을 다들 차 줬을 텐데 말이야.

내가 아직 아기인 게 원통할 따름이었다.

콧구멍까지 벌렁거릴 정도로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이든이 피식, 싱거운 웃음을 뱉었다.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군.”

앗챠챠.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그만.

흠흠! 목을 다듬으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리구 무엇보다 내기에서 지기 싫은 건, 이 내기에서 지면 나 때문에 괜히 아빠까지 욕을 먹어서에여.”

가지런하던 눈썹이 위로 까닥, 치켜 올라갔다.

“욕먹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

“제가 싫어서 그래여. 다른 건 몰라도 아빠 욕은 못 참오. 나한텐 세상에서 우리 아빠가 최고 일등이란 말야.”

“…….”

응당 돌아와야 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맴도는 침묵에 의아함이 들었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시지?’

고개를 들어 이든의 표정을 살피려던 나는 무심결에 탄성을 뱉었다.

‘어?’

어느 순간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든의 움직임이 내 망막에 맺혔다.

무언가를 숨기듯이, 얼굴을 반쯤 덮은 커다란 손.

그리고 반대쪽으로 획 돌린 고개와 방황하는 눈동자.

찰나에 스쳐 가는 것들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빠?”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말 계속 이어서 해라.”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춰 버린 그를 부드럽게 부르자, 이든은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내게 등을 지고 돌아섰다.

‘어라라.’

이거 왠지, 지금 부탁하면 들어주실 것 같기도?

어쩐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곧장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커다란 등을 향해 총총총 다가가, 무방비한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제가 마구간에 가는 거, 허락해 쥬실 거죠?”

“!”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나는 혹여나 거절할까 봐서 그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와다다 쏟아 냈다.

“대신에 약속 지키겠슴미다!”

“무슨 약속?”

“저번에 드리기로 해 놓고서 깜빡하고 못 사 왔던 선물. 이번에는 꼭 잊지 않을게여.”

새끼손가락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잠시 주춤거리던 그가 내 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래도 너 혼자서 단독으로 말을 보러 가는 건 안 된다.”

“알아요. 아빠가 저랑 같이 가 쥬시면 되죠!”

“내가?”

“녜. 세상에서 최고최고 짱짱 쎈 우리 아빠가 나 지켜 준다고 해써요. 그쵸?”

그가 조금은 풀어진 낯으로 나를 품에 안았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헤헤. 우리 사자님 진짜, 진짜 최고.

이든을 따라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무릎 위에 다소곳이 앉았다.

“저번에 부탁드렸던 웨인투르의 장갑을 만든 가죽 장인은 알아보셨써요?”

“알아보니까 따로 공방이 있는 게 아니라, 떠돌아다니면서 지낸다더군.”

“이번 쥬 안에 꼭 챶아야 하는뎨, 오또카지.”

이제야 고민이 좀 풀리나 싶더니만, 또 하나 고민이 생기다니.

에횽, 작게 한숨을 내쉬는 나를 보며 이든이 내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벌써부터 인상 쓰는 버릇이 생기면 쓰나.”

그제야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반듯이 펴진 내 이마를 보고서 이든이 말을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라. 마침 저번 주에 비스에 입성했다는 정보를 수집했으니.”

“진쨔여? 며칠 머문뎨요?”

“토리 무크의 보고로는 가정의 달 연회에 맞춰서 들어온 거라, 몇 주는 더 머무를 것 같다더군.”

“다행이댜.”

“그자에게 말의 안장 제작을 맡길 생각인가?”

“안장뿐만 아니라 마법 고삐랑 재갈이랑 박차, 모조리 다 바꿀 거예요. 기존에 리아노 공작가에서 쓰던 것들은 다 쓰레기고든요.”

나는 야생마의 등과 배에 난 상처들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리아노 공작. 당신의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내가 만천하에 똑똑히 증명해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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