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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75/142)

75화

한편, 비스 번화가에 인접한 리르다 전문 병원.

근래 들어 밀려드는 환자 탓에 접수실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아이고고고. 나 죽네, 나 죽어! 대체 언제 수술 일정을 잡아 주는 건가?”

“죄송합니다, 남작님. 하나 앞에 수술 일정이 밀려 있는지라 며칠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체 얼마나 더 기다리라는 거지? 내 허리가 나간 지도 벌써 이틀이 됐어!”

대기실에 몸져누운 젊은 남작이 불같이 화를 냈다.

‘수술 일정이 밀렸다니?’

황실의 후원 아래 운영되는 전문 병원은 평소 그리 환자가 붐비는 곳이 아니었다.

비싼 이용료 탓에 평민들에게는 언감생심인 곳이요,

게다가 대부분 귀족들이 저택에 상주하는 개인 주치의를 두는 탓에 평소에는 굳이 올 이유가 없었다.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크게 다쳤을 때였다.

개인 주치의는 법적으로 큰 수술이 불가하니, 리르다 전문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해서 리르다 병원의 수술 일정이 밀렸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어디 전쟁이라도 난 게 아닌 이상은 말이다.

“지금 나를 물 먹일 생각인 건가?”

젊은 남작이 이글이글 끓는 눈으로 병원 직원을 노려봤다.

“그럴 리가요. 당치도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최근 낙마 사고가 많지 않습니까.”

이 건방진 것이 나와 말장난을 하려고 해?

참다못한 젊은 남작이 직원의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은 순간,

대기실 안으로 허리에 붕대를 두른 몬크 코노미야가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섰다.

“병원이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오셨습니까, 도련님. 수술 준비는 거의 다 되었습니다.”

직원은 불만을 툴툴거리는 젊은 남작을 뒤로하고, 몬크의 앞으로 달려가 허리를 숙였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지?”

몬크가 젊은 남작 쪽을 힐끔 보며 묻자, 남작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코, 코노미야 백작가의 일정이 잡혀 있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나. 크흠! 흠! 나는 다음에 다시 오겠네.”

젊은 남작은 혹시라도 잘못 찍힐까 봐서 허리를 부여잡고 뒤뚱뒤뚱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도련님께서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고, 한 분은 입원 수속 차원에서 따라와 주십시오.”

직원이 시종을 데리고 나간 후, 혼자 남겨진 몬크는 대기실 안을 둘러봤다.

저 혼자인 줄 알았건만.

창가 쪽 침대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누구지?’

리르다 전문 병원에 드나들 정도의 사람이라면 얼굴을 익히 아는 귀족이거나, 졸부가 된 평민일 터.

전자면 인사를 하는 게 귀족으로서의 예의였고, 후자면 알음알음이라도 알아 두는 게 좋았다.

몬크는 후계자 수업 때 배웠던 이론을 떠올리며 창가 쪽 침대로 갔다.

“안 그래도 진상 환자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참이었는데, 고맙수.”

그에게 등지고서 누운 작은 체구의 등이 들썩이며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괜스레 긴장한 몬크가 제자리에 멈춰서 상대를 살폈다.

고맙수?

격식 없는 말투로 봤을 때 상대는 귀족은 아닌 듯싶었다.

그렇다면 운이 좋아서 돈벼락 맞은 평민일 텐데.

‘비스에 그런 자가 있었나?’

의아함도 잠시, 상대방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떠돌이 상인, 벤 쟝이올시다. 내 이래 봬도 여기 정식으로 입원 수속까지 밟았으니 그리 경계는 하지 마슈.”

자신을 벤 쟝이라고 소개한 이가 몬크에게 악수를 청했다.

너무 자연스럽다 못해 뻔뻔한 요청이라, 몬크는 얼떨결에 그 손을 맞잡고 말았다.

떠돌이 상인이라면 집시였다.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낙마 사고가 많은가 벼. 그쪽도 허리가 아작 난 것 같은데…… 떼잉, 쯧! 벌써부터 허리를 다치면 못쓰지, 못써.”

요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물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떠들어 대는 그를 보며 몬크는 생각했다.

‘후계자 수업 때, 집시를 보고 뭐라고 가르쳤더라?’

머지않아 그는 스승이 가르쳤던 것을 떠올렸다.

[한심한 자들입니다. 유랑하는 자들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펑펑 쓰는 습관이 있어서 재산이 없을뿐더러, 효용 가치가 없는 것들이죠. 떠들어 대기는 또 얼마나 떠들어 대는지. 다 영양가 없는 얘기들이니 귀 기울이실 필요 없습니다.]

스승님의 말대로 확실히 수다스러운 자이긴 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들 잘만 떠들었다.

“내 허리는 걱정 마슈. 나는 그짝과 다르게 탈수 증상으로 입원한 거니까. 남쪽 대륙은 원, 건조해서 살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귀족에게는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이야기들뿐이었지만, 몬크는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적어도 어색한 적막이 흐르는 것보다는 조금 시끄러운 게 나았다.

잠시 뒤, 대기실 문이 열리고 조금 전의 직원이 들어왔다.

“도련님. 이제 곧 수술에 들어갈 겁니다.”

“벌써?”

“모시겠습니다.”

이럴 때만큼은 신분, 지위를 떠나 몬크도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그는 선뜻 직원에게 몸을 맡기지 않고, 바짝바짝 마른 입술을 매만지며 굳어 있었다.

“도련님?”

“어…… 어어! 수술 들어가기 전에 편지 쓸 곳이 있는데. 펜이랑 종이 좀 준비해 줘.”

직원의 부름에 번뜩 정신을 차린 몬크가 다급히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직원이 내온 펜을 쥐고 편지지를 펼친 몬크는 주춤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또박또박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는 이에게 편지를 써서 그런가.

그제야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조금씩 속도가 붙은 펜질이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즈음.

편지지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며, 벤 쟝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여자 친구한테 쓰는감?”

“여, 여, 여, 여자 친구?”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무례함에 대해 화를 내기는커녕, 바보처럼 말을 더듬고 말았다.

여자 친구라니?

여자 친구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단어였다.

‘루나가…… 내 여자 친구?’

뜻밖에 상상의 나래가 머릿속에서 펼쳐지면서, 몬크의 양 뺨이 점점 붉어졌다.

“아니. 표정이 그래 보이길래.”

벤 쟝은 귀까지 시뻘겋게 변한 몬크를 보며 킬킬거렸다.

“한창 좋을 때구먼.”

몬크는 제 스승님이 집시에 대해 잘못 알고 계시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무척 시끄럽긴 하지만…… 막 영양가 없는 얘기만 하는 건 아니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지어졌다.

* * *

이든과의 약속 후, 방으로 돌아온 나는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십 분 뒤 그와 함께 가죽 장인을 만나러 번화가로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어디 보자, 어떤 양말을 신을까나.

지난번 외출 때 리챠드에게 선물 받은 양말과 옷이 장롱 안에 한가득이었다.

나중에 한번 날 잡고 정리 좀 해야겠어.

어마어마한 양을 보며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 리챠드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

“아가님, 외출 준비를 도와드리러 왔습……. 이런, 제가 조금 늦었군요.”

벌써 혼자 힘으로 드레스까지 갈아입은 나를 보고 리챠드는 이마를 긁적였다.

“아뇨. 안 늦어써요. 젤 중요한 양말이 남았는걸?”

옷은 어찌어찌 꺼내서 조금 서툴게나마 입을 수 있다고 쳐도, 양말이 담긴 보관함은 아기인 내 키가 닿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양말 보관함 앞에서 폴짝폴짝 뛰며 그를 올려다봤다.

“리챠드! 양말 좀 꺼내 줄 슈 있써요?”

“제 몫의 임무가 남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리챠드가 빙그레 웃으며 옷장의 가장 위 칸을 뒤적거렸다.

“오늘은 노란색 드레스를 입으셨으니, 포인트로 병아리가 그려진 이 양말이 좋겠습니다.”

“마음에 들어여! 리챠드 최고!”

그에게 포르르 달려가 안겼다.

리챠드는 나를 의자 위에 앉혀 놓고, 손수 무릎을 꿇어 양말을 신겨 주었다.

“각하와 함께 가죽 장인을 보러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녜. 승마용 용품들을 새로 다 주문 제작 할 꼬에요.”

“아가님의 친구분이 내내 시무룩해 계시겠네요.”

아챠챠, 맞다.

노아가 지금 저택에 와 있었지?

오늘 해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깜빡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때 보러 가면 너무 늦게 온 거 아니냐고 뇨아가 화낼까여?”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미리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분명 들뜬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기다리실 겁니다.”

“고마워요, 리챠드. 역시 리챠드뿌니야.”

“지금 여기에 각하께서 안 계신 게 천만다행입니다. 그랬다가는 지금쯤 흙에 반쯤 파묻혔을지도 모르니까요.”

내 작고 오동통한 발에 양말 두 짝을 다 신겨 준 리챠드는 자연스럽게 드레스 상태도 살펴 주었다.

나름 열심히 혼자 입어 봤는데, 아직은 조금 어설펐던 모양이었다.

“내 몸이 열 개였으면 참 좋게써요.”

“아하하. 그랬다가는 각하께서 신경 쇠약으로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살벌한 말을 웃는 낯으로 하다니.

리챠드도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악당 캐릭터라니까.

“다 됐습니다. 역시 아가님께는 무슨 색이든 잘 어울리는군요.”

능숙하게 마무리 단장을 도와준 리챠드가 거울 옆으로 비켜났다.

거울 속에는 노란색 벌룬 소매의 드레스를 입고, 병아리가 그려진 양말을 신은 양 갈래 머리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역시 리챠드의 솜씨가 최고라니까.”

“과찬이십니다, 아가님. 시장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오찬은 각하와 밖에서 드실 거라 전달받아 따로 준비하지 않았는데.”

“괜챠나요. 저녁은 돌아와서 노아랑 먹을 거니까 잘 부탁해여.”

“릴리앙 씨에게 친구분의 입맛도 고려해서 만들어 달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아가님 앞으로 편지가 왔습니다.”

“오잉. 편지?”

“그새 또 다른 친구분이 생기신 모양입니다.”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노아는 지금 우리 저택에 와 있는데. 따로 편지 올 데가 있었나?

퐁퐁 자라나는 궁금증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 리챠드가 내민 봉투를 냉큼 받았다.

<루나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에게 오빠, 몬크 코노미야 보냄>

몬크가 내게 편지를?

봉투 겉면에 적힌 이름을 보고 의문이 커졌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평소 편지 같은 걸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던지라 내심 걱정이 들기도 했다.

“왜 그러십니까?”

다급히 편지를 열어 본 내가 특정 대목을 읽다 말고 딱딱하게 굳자, 리챠드가 의아하게 물었다.

“리챠드. 가죽 쟝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병원에 들르쟈고 하면, 아빠가 허락해 쥴까여?”

“새 친구분께서 입원하신 모양이군요.”

“녜. 낙마 사고가 있었대요.”

“저런. 안 그래도 오늘 자 신문 기사에서도 낙마 사고율이 올랐다는 소식을 읽었습니다만. 유감입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몬크 그 녀석, 아직 사람 덜 되긴 했어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닌데.

원작에서는 몬크가 주인공이 아닌지라, ‘낙마 사고’에 관해 다뤄질 때 언급된 바가 없어서 몰랐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가 다친 걸 안 이상, 사람 된 도리로서 병문안을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빠가 허락해 쥬시지 않을 것 같긴 한뎨.”

이걸 어쩐다.

한숨을 폭 내쉬는 내 앞에 리챠드가 섰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아가님께는 각하를 녹일 필살기가 있지 않습니까?”

필살기?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며 리챠드가 음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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