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42)

76화

“허락하지.”

헉. 이게 진짜로 통할 줄이야.

사실 리챠드가 알려 준 방법대로 준비하는 동안에도 반신반의했었다.

[각하께 애교가 담긴 노래 영상을 드리면서 부탁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의 제안에 불현듯 생각난 것이 하필 너트뷰에서 봤던 K―애교송이었다.

무심코 입에 올렸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 보니, 사악한 미소를 짓는 리챠드에게 등 떠밀려 녹화까지 끝마친 상태였다.

나는 얼떨결에 율동까지 가미해서 부른 ‘오또케 송’이 녹화된 마도구를 떨리는 손으로 이든에게 건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진짜 병원에 들러도 돼여?”

“그래. 돌아오는 길에 그곳을 지나니까.”

의외로 순순히 허락이 떨어지니 오히려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말?

그게 필살기였어?

나는 녹화용 마도구를 재생시키는 이든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빠가 너무 좋아, 오또케오또케. 아빠가 너무 멋져, 오또케오또케. 나랑 산책 갈래 오또케 생각해. 잔말 말고 말해, 좋다구 좋다구.

내가 직접 불러서 녹화한 <오또케 송>이 중앙 홀에 울려 퍼졌다.

마지막 소절까지 재생된 마도구가 틱, 하고 멈췄다.

“…….”

“…….”

부끄러워서 그만 숨고 싶어졌다.

‘이걸 제 앞에서 트는 건 반칙 아니에요, 사자님?’

그리 따지고 싶었지만, 어째 이든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잠시간 무슨 말을 꺼낼까 고민하는가 싶더니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걸, 직접. 네가 직접, 녹화했다는 건가?”

“녜. 아빠를 위해서여.”

“나만을 위해서…….”

그는 내 말을 따라서 읊조리며, 멍하니 녹화용 마도구를 다시 처음으로 돌렸다.

―아빠가 너무 좋아, 오또케오또케. 아빠가 너무 멋져, 오또케오또케…….

한 번 더 완창을 들은 그는 홀린 듯이 영상을 또 되감아 반복해서 들었다.

―아빠가 너무 좋아, 오또케오또케. 아빠가 너무 멋져…….

―아빠가 너무 좋아, 오또케오또케…….

―아빠가 너무 좋아…….

도대체 몇 번을 반복해서 들으시는 거야.

우리 사자님께서는 기어이 나를 수치사시키려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사자 앞에서 반복해서 들을 리가 없었다.

중앙 홀을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내 노랫소리를 듣고 멈춰 서서 “어멋, 귀여우셔라.”, “역시 우리 아기님께서는 사랑스러우시다니까.”라며 떠들어 대는 탓에 부끄러움은 두 배가 됐다.

으아아. 저걸 괜히 줬나.

아무리 생각해도 흑역사로 길이길이 남을 것만 같았다.

다시 뺏어야 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찰나, 리챠드가 나타났다.

“각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내게만 보이게끔 찡긋, 윙크를 날리는 시고르자브죵 댕댕이의 궁둥이를 걷어차 주고 싶었다.

이 멍멍아, 지금 좋아할 때냐고요!

“어…… 그래. 출발하도록 하지.”

얼이 빠진 이든은 마도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걸어가다, 출입문 옆의 벽에 콩, 이마를 박기까지 했다.

맙소사.

내 옆의 리챠드가 전혀 안타깝지 않은 목소리로 “저런.” 하며, 웃음을 흘렸다.

그는 이마를 부딪친 이든에게 손수 출입문을 열어 주며 그가 꼭 쥐고 있는 마도구를 힐끔 보았다.

“출입문은 이쪽입니다만. 그건 제가 챙겨 놔 드릴까요?”

“아니. 가지고 가겠다.”

이든은 마치 소중한 것을 뺏기기라도 할세라 다급한 어린아이처럼 안주머니 속에 녹화용 마도구를 황급히 집어넣었다.

……아무리 봐도 저걸 다시 달라고 하는 건 무리겠지?

나는 반쯤 체념을 한 채로 터덜터덜, 힘 빠진 걸음으로 이든의 뒤를 따라 마차로 향했다.

* * *

매년 가정의 달마다 비스의 번화가에는 특별한 장이 열린다.

‘마스터피스 프리마켓’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장은 전국 각지, 때로는 타국의 이름난 장인들까지 몰려들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몇 년을 공들여 만든 예술품들이 비싼 값에 사고팔렸다.

게다가 후원해 줄 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장이기도 해서 매해 참가 경쟁률이 치열했다.

‘아빠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우리가 찾는 가죽 장인도 이번 마켓에 참여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그에게 배정된 가판대가 텅 비어 있는 걸까.

마차에서 내려 구름떼처럼 몰린 인파를 헤치고 왔건만. 기껏 찾아온 가판대는 예상했던 것과 달리 주인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정보 전달에 착오가 있었던 건가.”

“혹쉬 모르니까 근처를 좀 둘러보까요? 자리를 착각했던 걸 슈도 있으니까.”

이든과 함께 왔던 골목길을 되돌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옆 가판대에서 파리 날리는 가판대를 지키고 있던 장인이 우리에게 말을 붙여 왔다.

“그쪽 자리의 집시 장인을 찾아오신 거면 헛걸음하신 거예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이써요?”

“그건 저야 모르죠. 근데 아마 오늘은 안 올 겁니다.”

안 온다니?

이든도 처음 듣는 얘기인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었다.

“거기 그렇게 서 계시지 마시고 제 작품도 한번 구경해 주세요. 제가 그 집시에 관해 아는 건 다 말해 드릴 테니까.”

“작품을 사러 온 건 아니에요. 쥬문 제작을 맡기려고 온…….”

“아, 주문 제작하면 또 접니다. 자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장인은 실질적 물주가 이든이라고 여겼는지, 내 말은 대뜸 잘라먹고 이든의 팔을 잡아끌었다.

‘뭐야. 지금 내가 아가라고 무시하는 건가.’

살짝 마음이 상하긴 했지만, 장인의 행색을 보니 어지간히 급한 것 같았다.

예술은 배고픈 직업이라더니.

낡은 옷소매나 뺨이 푹 팬 모습이 그에게 얼마나 후원자가 절실한지 그 속사정이 훤히 보였다.

조금 무례하긴 해도 현실에 쪼들리는 것 같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지 뭐.

관용을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쫄쫄쫄 옆 가판대로 들어가려는데, 이든이 남자의 손을 매정하게 쳐 냈다.

“함부로 손대지 마라.”

“아아. 너무 반가운 나머지 실례했습…….”

“그리고 귀족의 말을 잘라먹는 것은 어디에서 배워 먹은 예의범절이지? 아. 애초에 배운 게 없어서 잘라 먹은 건가?”

아이코. 우리 사자님, 화가 단단히 나셨네.

이든은 내가 장인에게 당했던 대로 똑같이 말허리를 꺾어 버리고, 무서운 기세로 쏘아붙였다.

그제야 장인은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눈가의 커다란 상흔.

단숨에 분위기를 압도하는 살벌한 기세.

입술이 열렸다 닫힐 때마다 보이는 유별나게 뾰족한 송곳니.

무엇보다도 사냥감 앞의 맹수처럼 기척도 없이 사뿐사뿐 걷는 특유의 걸음걸이.

귀족들에 관한 정보가 곧 돈줄이나 다름없는 장인들의 세계에서 이든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장인은 점차 낯빛이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목이 졸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린 채 허리를 깊이 숙였다.

“흐, 흐익! 라, 라이언하트 백작님……!”

“이제라도 알아봤으면 밥 말아 버린 예의범절을 차리는 게 좋을 것이다. 내 후원금으로 네가 묻힐 관짝을 사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아빠는 뭐 이렇게까지 겁주고 난리래.

장인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는 게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잘못, 잘못했습니다! 제가 순간 후원에 눈이 멀어 사리 분별을 못 하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사과를 해야 할 곳은 내가 아니라, 내 딸에게다.”

으잉, 나?

갑작스레 지목을 받은 나는 깜짝 놀라 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는 동떨어져서 서 있던 내게 다가와 자신의 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주문 제작을 맡길 의뢰인은 이쪽이다.”

“죄송합니다, 아기 영애님. 부디 제 어리석은 행동을 용서해 주세요.”

처음과는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군기가 바짝 든 장인이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자니 새삼스럽게 이든의 파워가 실감 났다.

‘우리 아빠가 라이언하트라는 걸 자꾸 깜빡깜빡한다니까.’

내게는 그저 말랑말랑 대왕 젤리를 가진 대형 고양이일 뿐인데.

밖에서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게 만들 정도로 악명이 높은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기 영애님, 어떤 걸 맡기시려고 그러십니까.”

“승마 용품을 만들려고 하는뎨, 이 도안대로 만들 슈 있겠어요?”

나는 쭈뼛쭈뼛 다가온 장인에게 도안을 내보였다.

종이 위에 크레파스로 꼬물꼬물 직접 그려 온 그림은 리아노 공작가에서 쓰이는 것과는 아예 반대의 디자인이었다.

리아노 공작의 마법 고삐가 마법이 발동되는 쇠로 된 재갈이 붙어있는 고삐라면,

내가 새롭게 디자인한 것은 쇠 재갈은 아예 빼 버리고 하네스 형식의 부드러운 가죽 재질의 고삐였다.

안장 또한 보석으로 치창하기보다는 심플하고 가볍게 스케치를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박차.

기존에 말에게 상처를 입히기 쉬운 구조인 뾰족한 톱니형 대신, 끝이 둥근 박차로 바꿔 놓았다.

내 도안을 살펴본 장인이 “으음.” 잠시 고민하는 소리를 냈다.

“만들 수 있겠서요? 기간은 일쥬일 내로 만들 수 있으면 좋겠는뎨.”

“다른 건 어찌어찌 만들 순 있을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이 박차입니다. 이건 대장장이 기술과 결합해 만들어야 하는 거라 저 혼자는 무리입니다. 일주일 내로 만들어야 하는 거라면 더더욱요.”

“안 될 경우에는 쇠 부분만 따로 대장장이에게 의뢰해도 되지 않을까여?”

“만들어 줄지 의문입니다. 영애님께서 직접 도안을 그리신 이 디자인은 시중에 쓰이는 것과 너무 다를뿐더러…….”

말을 하다 중간에 멈춘 장인이 뜸을 들이며 눈치를 살폈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혹시라도 그 발언 때문에 이든의 눈 밖에 날까 봐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괜챠느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여.”

“그러니까, 그게.”

“괜챤대도.”

재차 부드러운 말투로 다독여 주자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박차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대장장이들은 제가 만든 물건이 불량품 소리를 들을까 봐서 제작을 꺼릴 테고요. 아가님께서 혹시 모르실까 봐서 말씀드리는 건데…….”

“알고 있써요. 톱니형으로 된 게 더 자극을 세게 줄 슈 있어서 말을 통제하는 데 더 편하다는 거.”

“아시면서도 굳이 이런 모양으로 만드시려는 이유가 뭔가요?”

그 질문을 듣고 곧바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야생마의 몸에 남은 상처들이었다.

“시중에 판매되는 승마 용품들은 전혀 말을 배려하지 않은 것들이에여.”

“그래도 그 디자인이 효율이 좋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만큼 말에게는 데미지가 크져.”

게다가 승마 용품을 사용하는 이들은 동물에 대한 기본 지식까지 없었다.

‘말들이 고통받는 건 비단 리아노 공작가만의 일이 아니야.’

에덴 제국 대부분의 귀족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가죽 장인으로서 승마 용품에 대한 의뢰를 받아 봤지만, 아기 영애님처럼 말의 상처에 관심이 있는 분은 처음입니다.”

어느 틈부터인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선 장인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를 보는 눈빛이 처음과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폭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쥰다고 믿는 귀족들의 멍청한 생각을 뿌리 뽑아 버리는 게 제 꿈이에여.”

방긋 웃으며 내 포부를 밝히자, 장인의 눈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낡은 빵모자를 벗어 자신의 가슴에 얹더니, 별안간…….

후드드드득,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 ……아니 잠깐만. 갑자기 왜 우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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