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한순간에 터져 나오는 눈물이 퍼석퍼석한 남자의 얼굴을 적셨다.
으음, 어어…….
오늘 처음 본 사람이, 그것도 다 큰 어른이 내 앞에서 펑펑 우는 것을 봤을 때의 기분이란.
몬크 코노미야를 달래 줬을 때랑은 조금 달랐다.
나는 꼼지락거리던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그를 토닥여 주었다.
“뚝 해요, 뜍!”
“아기 영애님의 말씀을 듣고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장인이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실은 그동안 속으로는 귀족들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다 민심을 사기 위해 이용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처음에 아가님께 무례하게 대했습니다.”
“괜챠나요. 이미 사과한 일이니까.”
“그래도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이마에 흙이 닿을 정도로 깊이 숙인 그의 어깨가 미미하게 들썩였다.
‘……엑스트라지만 사연이 있는 캐릭터인가 보네.’
나 역시도 이 소설 속에서는 한낱 엑스트라라서 그런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짠했다.
나는 잠자코 그 스스로가 털어놓기 시작한 얘기들을 들어 주었다.
“저는 원래 서부 쪽의 귀족가에서 일하던 몸종이었습니다. 처자식도 모두 그곳을 다스리시는 영주님을 위해서 일을 했죠.”
“지금 하는 일보다 영지 생활이 훨씬 편할 텐데 사서 고생길로 들어섰군.”
내게 대하는 장인의 태도가 공손하게 바뀌어서 그런지, 이든도 아까와는 다르게 한층 누그러든 말투로 말했다.
“원래라면 평생 영주님께 충성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제 아이와 아내를 개돼지 취급만 하지 않았더라면요.”
그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수모를 겪었을지 대충 그려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 위의 자잘한 옛 상흔들이 충분한 설명이 됐을뿐더러…….
귀족이 제 아랫사람을 가축만도 못한 존재로 보는 건 주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그런 치욕스러운 인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도망쳤습니다. 도망자 신분이다 보니까, 숨어 활동하느라 다른 장인들에 비해서 돈을 벌기 어렵지만……. 그래도 후회하진 않습니다.”
“잘하셨어요. 죠은 아빠시네.”
“……그리 말씀해 주시는 귀족분도 아기 영애님이 처음이십니다.”
“이름이 모에요?”
“그레이고르입니다.”
“그레이고르. 오늘 느낀 이 기분과 감정 잊지 말고 자식에게 죠은 거울이 되어 쥬세요.”
다시 감정이 울컥 차올랐는지,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기 영애님 같은 분이 진정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말아 주십시오. 부디. 제 아이에게도 살 만한 세상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털어놓은 그레이고르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돌아서서 이든을 바라봤다.
“아빠.”
나긋하게 부른 후, 긴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뜻이 사자님께 전달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라이언하트가에서 네 작품 활동을 후원하지.”
“……예?”
바닥에 엎드려 있던 그레이고르가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낼 거처는 따로 마련해 줄 테니 처자식을 애먼 곳에 방치해 두지 말도록.”
“하지만 제가 감히 영애님께 무례를 범했는데 어떻게 그걸 받습니까.”
“감사하다면 떳떳한 어른으로 살아서 네 자식에게 보여 주는 걸로 갚아.”
무심하게 툭 뱉어진 말투였지만, 그것이 그레이고르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을 쉬이 잊지 못했다.
“라이언하트 가문에서 후원해 쥬는 대신 자식한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어 쥬시는 고에요. 약속할 수 있쬬?”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아기 영애님께서 제게 내리신 명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받들겠습니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며 꾸벅인 탓에 그의 긴 머리카락이며 흙먼지가 이마에 잔뜩 달라붙고 말았다.
나는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고 그의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제 그만 뜍 하고, 아까 처음에 얘기해 주겠다고 한 거 말해 쥬실래요?”
“집시 장인 말씀하시는 겁니까?”
“녜.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이번 장에 참여한다고 들었는뎨. 아무리 생각해도 갑자기 참여하지 않은 게 이상해서.”
“정확한 정보는 아니고, 저도 건너 건너 들은 얘기이긴 한데.”
“괜챦아여. 말해 보세여.”
“다쳤다고 들었습니다.”
“다쳐요? 어딜? 오또케?”
당혹스러움이 앞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차 제작을 맡길 적임자는 그 장인뿐인데.’
승마 용품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기도 했으니 고민이 커졌다.
“뜬소문으로는 리르다 병원에 입원했다는데 헛소문일 확률이 높아요.”
뭐?
“리르다 병원이라면…….”
몬크가 입원한 곳 아니야?
나는 아침에 받았던 편지 속에서 리르다 병원이 언급되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희같이 가난에 허덕이기 십상인 떠돌이 장인들이 그 병원에 입원할 돈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뭐 어디 큰손의 후원을 받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생각이 통했는지, 마침 이든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빠, 마차를 호출해 쥬세요.”
헛소문인지 아닌지는 가서 직접 보면 알겠지.
* * *
병원 안은 소독약 냄새가 지독했다.
보통의 후각을 가진 나로서도 코가 얼얼할 정도인데, 예민한 후각을 가진 사자님께서는 얼마나 더 불편하실까.
딱딱한 접수실 의자에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이든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아빠는 마차 안에서 기다릴 걸 그랬나 봐여.”
“괜찮으니, 네가 미안한 표정 지을 것 없다.”
“그치만 코가 빨개지셨는뎨.”
끝이 빨개진 이든의 코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걱정하고 있는 사이, 새하얀 유니폼을 갖춰 입은 병원 직원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라이언하트 백작님. 팔을 다치셔서 오셨나요?”
직원이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이든의 팔을 보며 물었다.
“아뇨, 저희는 병문안 와써요.”
“어느 분이신지 말씀해 주시면 환자분께 방문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진료 차트를 넘겨 보며 물었다.
“몽쿠 코노미야 백쟉 영식이여.”
“아, 코노미야 도련님이라면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 수술이 아직 끝나지 않았거든요. 어디 보자…….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헉. 한 시간씩이나?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옆자리의 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오또케. 한 시간 더 견뎌야 하는데 괜찮게써요, 아빠?”
“……하아. 코를 틀어막아 버리든가 해야겠군.”
반쯤 포기한 듯, 이든은 한층 미간을 찌푸린 채로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이걸 어쩐다.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리는 나와 이든을 번갈아 보던 직원이 상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작님께서 냄새에 민감하신 편인가 봐요.”
“소독약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포서.”
“간혹 그런 분들이 있긴 한데, 백작님께서는 유독 더 심하신 것 같습니다. 안색이…….”
직원 언니가 보기에도 우리 아빠 낯빛이 좋지 않죠?
그는 내게 신경 쓸 것 없다고 했지만, 어떻게 아빠가 아픈데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러지 마시고 건물 뒤쪽으로 나가 보시는 건 어떠세요?”
“그러는 게 좋게써요. 아빠, 가여.”
“산책로랑 연결된 곳을 쭉 따라가시면 식당 건물이 나올 거예요. 마침 식사 시간이기도 하니 간단히 식사하시고 오셔도 좋고요. 빈속일 때 후각이 더 예민해지기도 하거든요.”
“조언 고마워여.”
나긋나긋한 말투하며 상냥한 미소 탓에 그녀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백작님께 도움이 되었다면 영광일 따름입니다. 코노미야 영식의 수술이 마치면 제가 다시 알려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휴식 취하고 계셔요.”
“녜. 예쁜 언니 안뇽.”
직업 정신이 투철한 직원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그녀가 알려 준 산책로로 향했다.
접수실 뒤쪽으로 이어진 파란 문을 열고 나가니, 키가 작은 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오솔길이 나타났다.
후우― 하아.
우리는 한껏 가벼워진 풀 내음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며 얼얼한 코끝을 달랬다.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어 줘.”
“그럼 아빠 도와쥰 사람한테 화낼까여?”
“그렇게 아무한테나 막 웃어 주지 말라는 뜻이다.”
“아빠가 아무한테나 화 안 내면 생각해 보께요.”
나란히 걷던 이든이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여유롭게 시치미까지 떼시는 걸 보니까 한결 괜찮아지셨나 보네.
이든의 커다란 손을 잡아끌자, 그는 못 이기는 척 내가 가는 방향대로 움직여 줬다.
“아까도 나 없었으면 그레이고르 씨 댕강댕강 했을 꼬면서.”
“애초에 네 일이 아니었으면 그자에게 화날 일도 없었다.”
“봐, 봐. 그럼 화낸 거 인졍인 거죠?”
“……쓸데없는 말재간은 리챠드 그 녀석이 가르친 건가.”
“히히. 나 아빠 딸인뎨.”
햇살 위로 서로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 후로도 정오의 산책을 즐기는 동안 우리 사이에서는 시시콜콜한 대화가 쉼 없이 오고 갔다.
아직 여름이 오지도 않았는데 제법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이든은 슈트 재킷을 벗어 대충 구겨 들었다.
‘저렇게 아무렇게나 들고 다니는 걸 리챠드가 봤더라면 잔소리 들으셨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덧 산책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늦봄의 나른한 바람결을 타고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가 풍겨 왔다.
‘그러고 보니 아침도 안 먹었지, 참.’
산책길과 이어진 식당 건물에서부터 풍겨 오는 맛있는 냄새에 잊고 있었던 허기가 밀려왔다.
“아빠, 코는 이제 좀 괜챠나요?”
“덕분에.”
“그럼 밥 먹으러 가 볼까여? 아침도 안 먹었더니 배고파여.”
홀쭉해진 배를 쓸어내리며 그를 바라봤다.
간절한 눈빛으로 “기운이 하나도 업써요.” 하고 덧붙이자, 그는 군말 없이 식당으로 향하는 문을 밀어 주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온갖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들이 몰려들었다.
킁킁. 이 냄새는…….
“고기 메뉴인가 봐여!”
“정확히 말하면 토마토와 치즈, 버섯을 함께 넣어 만든 미트볼 스튜다.”
“토마토랑 감자가 아니고요?”
“내기할까?”
그와 키득거리며 식당으로 들어가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다가와 능숙하게 팔을 내밀었다.
겉옷을 보관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필요 없다.”
필요 없긴 뭐가 없어? 그러다가 또 리챠드한테 잔소리 들으려고!
나는 단칼에 직원의 서비스를 거절하는 이든을 대신해 엉망으로 구겨진 그의 재킷을 직원에게 넘겼다.
“여기 이써요. 다림질 예쁘게 부탁해여, 언니!”
“아니. 그 옷은 중요한 게…….”
“아이 챰, 저 언니들은 프로라서 어련히 알아서 잘 다려 쥬실 꼬에요. 걱정은 뚝 하시고 얼른 밥 먹으러 가여. 배고파 죽겠써.”
그가 차마 내 손을 뿌리치지는 못하고 “아니.”, “저기.”, “이봐.”라며 중얼거렸지만, 이미 직원은 재킷을 들고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뭐 마려운 고양이처럼 초조한 얼굴로 직원이 나간 문만 뚫어져라 보는 그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거참, 재킷에 금칠이라도 해 놓으셨나? 왜 저렇게 안절부절못하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