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식후 광합성 시간은 카멜레온 수인 벤 쟝에게 빼먹을 수 없는 중요한 일정이다.
‘쓰읍. 오늘은 여기가 좋겠구먼.’
적당히 나무 벤치에 자리를 잡고 누운 그는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몸이 주변과 동화되어 점차 투명해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풍경과 구분할 수 없게 됐다.
‘으음. 온도, 습도 모두 환상적이야.’
이대로 포근하게 내리쬐는 늦봄의 햇살에 녹아들어 하나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할 즈음.
식당에서 우르르 나오는 직원들 탓에 평화가 깨지고 말았다.
“실제로 뵈니까 어때? 소문대로셔? 응?”
한 여인이 값비싸 보이는 남성용 슈트 재킷을 든 동료에게 물었다.
“라이언하트 백작님이요?”
“그래.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봐. 궁금해서 현기증 날 것 같다, 얘.”
이제는 아예 본격적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문제가 있다면 그녀들이 자리 잡은 곳이 하필 공교롭게도, 벤 쟝이 누워 있는 벤치 앞이었다는 게 함정이었다.
‘광합성은 글러 먹었네, 쯧.’
결국 휴식을 포기한 벤 쟝이 반쯤 감긴 눈을 슬쩍 떴다.
그녀들은 바로 앞에 투명해진 그가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라이언하트 백작님도 인상 깊었지만, 저는 오히려 그분에게 마음이 가요.”
“그분?”
“태어나서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기님은 처음 봤거든요.”
“영애님에 관한 소문은 들었어. 아기 천사가 따로 없으시다며?”
“네. 미소 지으실 때 어찌나 사랑스러우시던지. 햇살이 따로 필요 없다니까요?”
바로 코앞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은 벤 쟝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햇살이 필요 없다고? 웃기고들 있구먼!’
온도와 습도에 몹시 예민한 그로서는 그저 믿기지 않을 헛소리였다.
세계 곳곳을 떠돌며 살았던 60년 인생을 걸고서라도 그런 존재는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떼잉, 쯧!
혀를 차며 돌아누운 벤 쟝은 그녀들이 빨리 다른 곳으로 가길 바랐다.
“부럽다. 나도 두 분을 직접 뵙고 싶어.”
“그럼 이따가 재킷 가져다드리는 건 언니가 할래요?”
“어머, 정말?”
시끄럽다. 시끄러워.
두 귓구멍을 틀어막아도 수다는 끝도 없이 고막으로 흘러들었다.
‘에라이! 대신전이 싫으니 사제가 떠나든가 해야지.’
참다못한 벤 쟝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데, 이거 어떻게 나간다냐?’
그는 호기롭게 일어선 것과는 달리, 벤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직원들이 벤치 주위에 옹기종기 둘러싸서 수다를 떨고 있는 탓이었다.
이거야 원, 함부로 밀치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 상태였다. 섣불리 은신을 풀었다가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게 뻔했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었다.
습관처럼 혀를 내두르며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멀지 않은 곳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직급이 높아 보이는 여자였다.
“다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그, 그게…….”
화들짝 놀란 직원이 손에 들고 있던 남성용 재킷을 떨어트렸다.
“뭘 그리 멀뚱멀뚱 서 있어. 빨리 제 위치로 안 돌아가?”
“네, 넵!”
그녀들은 양치기 개에 쫓기는 양 떼처럼 후다닥 자리를 떴다.
‘좋아, 아주 좋아.’
드디어 되찾은 평화를 만끽할 시간이었다.
다시금 벤치에 자리를 잡고 누우려던 벤 쟝은 무심코 잔디밭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음?”
저건 뭣이던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물건이었다.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든 벤 쟝은 눈을 끔뻑였다.
“뭐여. 이게 왜 여기 있는겨.”
녹화용 마도구?
그리 친한 물건은 아니다만, 종종 여러 나라를 오가면서 본 적이 있어 대강 사용법은 알았다.
“이게 여기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닐 건 아닐 텐디.”
꽤 값이 나가는 물품이었다. 해서 이름이나 연락처라도 적혀 있나 싶어 이리저리 돌려 봤으나,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쯧, 잃어버린 주인은 꽤나 속 썩이겠구먼.
벤 쟝은 습관처럼 혀를 차며 무의식적으로 재생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달칵.
―아빠가 너무 좋아, 오또케오또케…….
이윽고 마도구에서 흘러나온 어눌하고 하찮은 노래가 끝날 때까지, 벤 쟝은 목석처럼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 *
“지금 나한테 죽여 달라고 용을 쓰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부디 고정하세요, 라이언하트 백작님.”
잔뜩 인상을 찌푸린 이든과 덜컥 겁을 먹고 오들오들 떠는 직원 사이에 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실컷 밥 먹은 거 다 얹히게 생겼네.
토마토와 버섯이 든 미트볼 스튜를 한 그릇 반씩이나 뚝딱 해치울 때까지만 해도 화목한 분위기였다.
기분 좋게 식사를 끝마친 이든과 나는 맡겨 놓은 재킷을 찾아 몬크가 있을 병원 본관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예쁜 직원 언니가 그만 사자님의 소지품을 잃어버렸지 뭐야.
“숨통이 붙어 있고 싶으면 어디로 빼돌렸는지 불어.”
“빼돌렸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어찌 백작님의 물건에 감히 손을 대나요.”
“그럼. 잃어버렸다는 건가?”
“……사…… 살려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백작님!”
사색이 된 직원이 풀썩 주저앉아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에덴 제국의 법대로라면 이든에게는 당장이라도 직원을 벌할 권리가 있었다. 실제로 그가 그만큼 화나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뭘 잃어버린 거지?’
그가 안주머니에 넣어 두는 거라면, 생각나는 게 딱 하나 있었다.
‘회중시계.’
나와의 첫 만남 때도 그걸 품속에서 꺼냈었지.
“어떤 물건인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가서 샅샅이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직접 찾으러 갈 테니까.”
“……백작님께서 직접요?”
직원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 회중시계가 그렇게 중요한 거였어?
그렇게 생각할 찰나, 그가 바지 뒷주머니에 쑤욱 손을 넣어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니 시계가 왜 거기서 나와?’
그건 둘째 치고. 그럼 잃어버린 건 뭔데?
“딱 한 시간 지났군.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전의 동선을 말해라.”
“그게…… 처음에 재킷을 받아서 잠시 산책로에 들렀다가 런드리 룸으로 갔어요.”
“어디서 어디로 움직였는지, 단 하나도 빼먹지 말고 모두 기억해 내는 게 좋을 것이다.”
“아……! 중간에 서번츠 홀에 들르기도 했는데…….”
기억을 차츰차츰 더듬어 가던 그녀가 돌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되짚어 봐도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더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쓸데없이 눈물 흘리면서 하소연할 생각은 하지 마.”
이든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여자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어우, 아빠도 참. 지금 표정 엄청나게 살벌하게 짓고 계시면서 울지 말라니.
이럴 때 보면 남에게는 참 냉정한 사자님이었다.
“가서 분실물 보관함을 찾아보도록. 물건을 찾기 전까지 네 목숨 줄은 내 손안에 있으니 도망칠 생각은 말고.”
“예, 알겠습니다.”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직원이 치맛단을 부여잡고 겨우겨우 자리를 떴다.
안쓰러운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예쁜 언니, 너무 상처받지 마요. 우리 아빠가 이래 봬도 막 그렇게 나쁜 사자는 아니야.
“우리도 이동하도록 하지.”
이든을 따라서 직원이 간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복도를 걷는 내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는 걸 반복하며 후각에 모든 집중을 쏟아부었다.
“이쪽에서는 냄새가 안 나는군.”
킁킁.
냄새를 맡는 모습이 어째 리챠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진지하게 이곳저곳을 조사하며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기는 이든을 바라보다가 궁금증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빠. 근뎨 찾는 물건이 모에요?”
“네가 준 선물.”
선물?
내가 언제 그런 걸 줬더라?
내 기억으로는 아직 이든에게 줄 가정의 달 선물은 사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준 선물이라니?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보고 이든이 덧붙여 설명했다.
“나만을 위해서 네가 직접 녹화해서 줬던, 마도구 말이다.”
“!”
헉. 맞다. 내 흑역사!
그 끔찍한 걸 왜 까먹고 있었을까.
잃어버린 소지품의 정체를 알게 된 나는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제발 찾지 못하기를 빌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서.
“아빠. 혹쉬…… 포기할 생각은 없으시져?”
“이 건물과 같이 흙에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럴 일은 없다.”
아아. 우리 사자님께서는 너무나도 완고했다.
옷소매를 물어뜯으며 ‘제발, 부디! 신이 있다면 마도구를 영영 다시 찾지 못하게 해 주세요’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빠가 너무 좋아, 오또케오또케. 아빠가 너무 멋져, 오또케오또케. 나랑 산책 갈래 오또케 생각해. 잔말 말고 말해, 좋다구 좋다구.
저 목소리는…….
“나쟈나?!”
이든이 소리가 나오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반쯤 뛰다시피 하며 그를 부지런히 쫓았다.
부지런히 뜀박질하는 내 짧은 두 다리가 향한 곳은 우리가 식사 전에 산책을 즐겼던 산책로였다.
드르륵, 틱.
녹화용 마도구가 다시 감겼다가 재생되는 소리가 들리고 또다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가 너무 좋아, 오또케오또케. 아빠가 너무 멋져, 오또케오또케…….
그 소리를 들은 이든은 혈안이 되어 씩씩거렸다.
“어떤 자식이 감히…….”
소리를 쫓아 반쯤 달리다 보니, 산책로 구석의 나무 벤치에 도달했다.
그곳에 선 한 남자가 녹화용 마도구를 반복해서 재생시키고 있었다.
드르륵, 틱.
―아빠가 너무 좋아, 오또케오또케…….
되감겼다 다시 재생될 때마다, 낯부끄러운 과거의 내가 뽀짝뽀짝 율동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허공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든의 품에 고개를 박았다.
아. 이건 새로운 형식의 사망 플래그인 걸까?
이 세계가 나를 수치사로 죽이려는 속셈인 게 틀림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