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42)

79화

눈을 꾹 감고 부정을 해 봐도 산책로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막을 수 없었다.

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마도구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허공에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 마침 산책로를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영상을 구경했다.

“허허, 참으로 귀여운 아기님이십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고향에 있는 조카가 생각나네요.”

엄마 미소를 지으며 흐뭇하게 보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 갈수록 내 마음은 더 초조해졌다.

으아아아! 당장 누가 저것 좀 꺼 봐!

내 소리 없는 아우성이 닿은 건지, 이든의 두 다리가 움직였다.

그는 한 팔로 내 뒤통수를 꼬옥 감은 채 엄청난 표정으로 의문의 남자를 향해 직진했다.

사람 하나를 묵사발 만들 기세였다.

좋았어!

이번만큼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얼른 가서 내 흑역사를 회수해 주세요, 사자님!’

그대로 두었다가는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온 동네 사람들이 저 영상을 볼 것만 같았다.

그것만큼은 부디 막고 싶었다.

쿵, 쿵, 쿵.

평소 같으면 구름 위를 걷듯 사뿐히 다닐 이든의 발소리가 유난했다.

그는 앞뒤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남자에게서 녹화용 마도구를 가로채 갔다.

“손 떼라.”

나이스 캐치!

무사히 이든의 손으로 돌아온 마도구를 보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이게 뭐요?”

난데없이 손에 든 물건을 빼앗긴 남자는 입을 떡 벌리고서 기가 막혀 했다.

꿈틀거리는 두툼한 눈썹이 그가 얼마나 황당함을 느끼는지 알려 줬다.

“댁은 누군데……?”

“알 것 없다.”

“거 말투가 참, 거시기 하구먼. 남의 물건을 그렇게 막,”

“똑바로 정정해 주지. 남의 물건이 아니라, 내 것이다.”

거칠게 뱉어진 언어들이 말허리를 날카롭게 잘라 냈다.

상대는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코밑을 스윽 문지르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니, 내가 그 말을 어찌 믿슈? 증거도 없는데 그렇게 우기면 쓰나. 내 분실물 신고를 할 터이니, 거기 가서 정식 절차를 밟고 찾아가슈.”

“내 딸이 나를 위해 불러 준 건데 증거가 왜 필요하지?”

“뭐, ……뭐시라? 당신 딸이 불렀다고?”

줄곧 심드렁한 투로 대화에 임했던 남자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는 주름진 눈을 커다랗게 뜨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정확히는 이든의 품속에 나를 향해서!

“그럼 이 아가가 바로 그 영상 속의 주인공인 거요?”

알아듣지 못할 감탄사를 연신 내뱉으며 다가오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어째 상상치 못한 전개로 흘러갈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이겠지?

그런 거라고 믿고 싶었다.

찝찝한 기분을 털어 내며 고개를 돌리는데, 사내가 양팔을 높게 번쩍 들며 산책로가 떠나가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오오오! 나의 태양! 드디어 만났구먼!”

……네?

다짜고짜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 때문에 구경꾼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태양이라는 호칭은 황제 폐하께만 쓰이는 건데…….”

이건 또 어디서 나타난 미친놈인 걸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이든의 가슴팍에 콩, 박았다.

하아. 이대로 연기가 되어 엘코어 속으로 사라지고만 싶었다.

* * *

우리는 헛소문이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낯선 남자가 입원해 있다는 곳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치고 싶었는데, 그 남자가 이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걸복걸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팬케이크 뒤집듯이 태도가 싹 바뀌어?

처음의 삐딱했던 말투나 행동은 어디로 가고, 남자는 마치 신을 모시는 사제처럼 순한 어린양이 되었다.

“저기여.”

“부르셨슈, 나의 태양?”

“……제발 좀 그렇게 부르지 말아 쥬세요.”

“그렇다면 나의 선샤인?”

……때릴까?

찰나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닭살 돋는 건 둘째 치고, 말만 붙였다 하면 사망 플래그를 남발하는 이 정신 나간 캐릭터 때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남자는 내 핀잔을 듣고서도 마냥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확 생크림 케이크를 엎어 버리고 싶은 낯짝이로군.”

아까서부터 아니꼬운 눈빛으로 남자를 째려보고 있던 이든이 한마디 툭 던졌다.

하지만 그건 남자의 마음에 조금도 스크래치를 내지 못했다.

“먹지 말고 피부에 양보하는 문화는 저어어짝에 있는 서대륙의 오랜 피부 관리 문화인데 어찌 알았슈?”

“그 입 다물라는 뜻이었다.”

“침묵의 공공칠빵 놀이를 하자는 거유? 고건 작년에 머물렀던 동부지역 섬의 놀이 문화쥬! 하하하핫!”

“허!”

이든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이든을 할 말 없게 만드는 건 리챠드가 전무후무하다고 생각했는데, 신흥 강자가 나타났다.

생각이 없어서 해맑은 건지, 아님 정말 해맑은 건지.

남자는 무슨 말을 해도 허허허허! 사람 좋은 것처럼 바보같이 웃어 댔다.

아니 이렇게까지 태세 전환된 이유나 좀 알자!

나는 궁금증을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제가 왜 할부지의…… 태……양이에여?”

“태어나서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 사람은 우리 아가님이 처음이었구먼. 세상이 으찌나 아름다워 보이던지.”

……그러니까 대충 정리하자면, 내 귀여움에 빠졌다는 건가?

남자의 두 눈은 오랜 기간 사막을 헤매다가 오아시스를 마주한 사람처럼 생기가 흘러넘쳤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내게도 한 곡 불러 줄 수 있겠슈?’ 하고 묻는 듯했다.

“그럼 우리 아빠 바짓가랑이는 왜 잡으신 건뎨요?”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속히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목청을 다듬었다.

이내 나와 이든을 번갈아 보더니 정중한 자세로 외쳤다.

“뮤즈로 삼고 싶수다!”

“예?”

뮤즈라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일까.

어째 대화를 하면 할수록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진짜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네.’

내 생각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던 건지, 사내가 뒷목을 벅벅 긁으며 물러섰다.

“씁, 내 정신 좀 봐. 중요한 걸 말씀 안 드렸구먼. 내 이런 것을 만들고 있는 자니 그리 경계는 마쇼!”

그는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가죽 가방을 낑낑 끌고 오더니, 그 안에서 물건을 주섬주섬 꺼내 하나씩 우리 앞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죽 벨트부터 시작해서, 가죽 신발, 가죽 지갑, 가죽 칼집 등등…….

가죽으로 만든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이 줄줄이 나왔다.

‘가죽 공예 장인인 걸까?’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불현듯 그레이고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듣기로는 리르다 병원에 입원했다는데 헛소문일 확률이 높아요.]

나는 그 사람이 눈앞의 이 남자라고 반쯤 확신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같은 날에 똑같은 직업군을 가진 이가 입원할 확률은 현저히 적었으니까.

“할부지 혹쉬, 이번 마스터피스 프리마켓에 참여하셔써요?”

“오오, 그건 어찌 알았슈? 역시 나의 태양인가!”

그 ‘설마’가 진짜인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설마 옆자리에 배졍받은 장인이 그레이고르 씨?”

“으음, 아마 그런 비슷한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하고는 있슈. 내 그 친구한테 예약 손님 좀 대신 받아달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급히 입원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쯧!”

내가 이렇게까지 운이 좋은 캐릭터였나?

뜻밖에 굴러들어 온 해결책을 보고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에덴 제국뿐 아니라, 주변 국가를 모두 통틀어서 야생마에게 딱 맞는 승마용 장비를 만들어 줄 실력자는 이 남자밖에 없었다.

대체할 자가 없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찾아간 마스터피스 프리마켓에서 허탕을 치고 내심 초조한 마음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어쩌면 신이 나를 아예 버린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우리가 찾던 그 가쥭 장인이예여.”

내가 이든에게 하는 말을 들은 남자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호오. 나를 찾았슈?”

“웨인투르 씨의 가죽 장갑을 만들어 쥬신 분 맞쬬?”

재차 확인을 위해 물은 질문에 그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 권투에 재능이 있던 캥거루 젊은이였던가? 하도 오래전에 맹글어 줬던 거라 가물가물하긴 한디, 기억나지. 기억나.”

한창 추억에 젖어 있던 그가 제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제법 예의를 차린 인사를 올렸다.

“아무튼 간에, 정식으로 인사드리쥬. 가죽 공예 장인 벤 쟝이오. 여기 아기씨를 위한 가죽 용품을 만들고 싶으니 뮤즈로 삼을 수 있게 허락해 주쇼.”

뭐어?! 벤 쟝?

‘벤 쟝이 왜 여기서 나와.’

상상도 못 한 전개였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다그치듯 이든에게 물었다.

“그 가죽 장인 이름이 벤 쟝이라는 거 왜 말 안 해써요?”

“입수된 정보에는 그런 이름이 아니었다.”

이든도 처음 듣는 소리였는지, 꽤 당황한 눈치였다.

아니. 정보력 좋은 세작을 두고 있으면서 왜 그건 또 몰랐데?

하기야. 아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벤 쟝은 투명 인간이 되는 것은 물론, 마음대로 겉모습까지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니까.

시시때때로 변하는 그 많은 모습들을 다 기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벤 쟝은 어깨를 으쓱이며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맞슈. 내 가죽 공예 장인으로 활동할 때는 ‘유노베느’라는 예명을 쓰니까.”

“……그런 건 쓸데없이 왜 만든 거지?”

이든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이 저 산 건너 바다 건너 동쪽 끝에 붙어 있는 반도 국가에서의 유행이오.”

“무슨 유행?”

“네 글자로 예명을 짓고 소개를 하는 게 멋이랄까? 하하하하핫!”

……아아, 맙소사.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카멜레온 수인, 벤 쟝이 괴짜라는 사실은 원작을 읽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미쳐 날뛰는 활어 회 같은 자일 줄이야.

그리고 멀지 않은 미래에 이 남자에게 내 생사가 걸렸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졌다.

신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버릴락 말락 하며 간 보는 게 틀림없어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앞으로 저 남자를 저택으로 데려간다고 가정했을 때, 리챠드와 쿵짝이 맞을 걸 생각하니…….

흐아아아아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이든의 품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리는데, 노크도 없이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루나!”

아, 맞다. 쟤도 있었지 참.

벤 쟝의 병실에 들어온 건 몬크였다. 그를 보며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진심으로 엘코어 속으로 스며들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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