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왜 여기 있는 거야? 나 보러 온 거 아니었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몬크의 뒤로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잇따랐다.
저마다 손에 약재며 의료기구들을 들고 있는 의사들이 진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아이고, 도련님. 수술 마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하나도 안 아프니까 돌아다니지.”
“그거야 무통 마법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렇게 느끼시는 거지요. 무통 마법이 끝나면 통증이 몰려오실 겁니다.”
의사는 부랴부랴 챙겨 온 간이 의자에 몬크를 끌어 앉히고 싶어 했다.
무통 마법은 과거 전쟁 시대 때 개발된 마법이다.
전쟁 통에 군사들에게 사용하던 것이 근래 들어서는 병원에서 쓰이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마법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평소처럼 활동할 수 있지만, 효과가 끝나면 움직였던 만큼 배로 아프다던데.
몬크가 지금 일을 땅을 치고 후회하기 전에 도와줘야겠다 싶었다.
“몽크 오빠. 의사 선샘밈 말대로 누워 있써야 하는 거 아냐?”
“무……, 무슨 소리야! 난 이 정도로 막 울고불고하는 어린애 아니거든?”
“누가 뭐래써?”
찔린 사람처럼 발끈하는 걸 보니, 수술 전에 어땠을지 안 봐도 뻔했다.
“꼬맹이 네가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이야.”
눈가가 빨간 걸 보니까 이미 눈물 한 바가지 쏟고 온 것 같다만,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그는 한창 멋지게 보이고 싶을 나이였고, 나는 자라나는 새싹의 자존심을 지켜 줄 줄 아는 인자한 아기이니까.
“잘 알고 이찌. 몽크 오빠 멋진 남쟈인 거. 그러니까 이상한 데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선샘밈 말 들어.”
“으, 으응. 역시 그러는 게 좋겠지? ……절대, 딱히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 네가 겁이 많아서 내가 말 따라 주는 거야.”
“그래그래. 오빠 말이 마쟈. 얼른 선샘밈 따라가. 벤 쟝 할부지랑 하던 얘기 마저 하고 갈게.”
“약속하는 거지?”
“응, 약속.”
한껏 표정이 밝아진 몬크는 그제야 의사들을 따라서 병실을 나섰다.
휴우. 일단 한 명은 해결됐고.
여섯 살짜리 남자애를 겨우겨우 어르고 달래는 데 성공한 후, 뒤를 돌아서니 몸집만 큰 아이가 둘씩이나 있었다.
“어허. 저 녀석, 그 편지가 나의 태양에게 쓴 것이었다니. 제법인걸?”
어쩐지 기특해하는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벤 쟝과,
“저 녀석이 멋진 남자라고?”
죄 없는 벽걸이 거울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중얼거리는 사자님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아직 갈 길이 한참은 먼 것 같았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머리 아픈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니까.
“일단 듀 분 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 보세여. 할 얘기가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두 남자가 내 말에 순종적이라는 것이었다.
“할 얘기라는 게 뭐지?”
“나의 태양, 무슨 말이든 해도 좋슈. 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나란히 앉은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비장하게 다리를 꼬았다.
“오늘부터 벤 쟝 할부지는 라이언하트가의 일원이 되어서 우리랑 함께할 꼬에요. 동의하세여?”
“아, 두말허면 잔소리지. 나의 태양께서 나를 불러 준다면야 무조건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으니께.”
벤 쟝은 당장에라도 퇴원할 기세로 바리바리 짐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좋아, 이쪽의 허락은 구했고.
그다음 관문인 이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까보다 더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불만이 상당히 많은 듯했지만, 차마 내게 따지지는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것 같았다.
뻔히 속이 보였지만, 나는 부러 모르는 척했다.
이 모든 게 라이언하트 가문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였다.
“아빠. 벤 쟝 할부지를 위해 저택에 공간을 내쥬실 수 있쬬?”
“저자를 내 저택에 들이겠다고?”
가지런했던 눈썹이 급격히 치켜 올라갔다.
급격히 기울어진 경사에서 그 불만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렇게 나오신다면야, 준비해 놓은 협박 방법이 있지.
“허락 안 해 쥬시면 앞으로 아빠랑 안 놀 꼬야.”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획 돌리는 건 덤이었다.
반응은 기다릴 것도 없이 곧장 돌아왔다.
“라이언하트가에서 지내는 동안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도록. 복지는 책임지고 약속하지.”
“그렇다면 나의 태양님과 매일 산책 시간을…….”
“정정하겠다. 내 딸에 관한 것은 뺀 선에서 들어주는 것으로.”
곁눈질로 살짝 보니, 이든이 벤 쟝에게 속사포로 쏟아 내고 있었다.
“쓰읍. ……뭐, 좋슈.”
벤 쟝이 내심 아쉬운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이로써 상황은 대충 정리된 건가?
“그럼 이제부터 제가 미션을 드릴께여. 벤 쟝 할부지. 이거 만들 수 있겠써요?”
나는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넣어 두었던 승마 용품 제작도를 벤 쟝에게 내밀었다.
* * *
벤 쟝은 과연 내가 찾던 적임자답게 제작도를 보자마자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다행히 단순 탈수 증상으로 입원한 그는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퇴원 수속을 밟을 수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챙길 짐이 많은 그에게 마부를 붙여 주고서, 병원비를 지불하기 위해 1층 로비로 향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로비가 부산스러웠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보니,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직원들을 줄지어 세워 놓고 무언가 묻고 있었다.
사제는 우리 쪽으로는 등을 지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대신전의 끄나풀이로군.”
“혹쉬 아는 사람이에여?”
“비스에 올라오기 전에 비슷한 놈들과 함께 마주친 적이 있지. 변방의 힘없는 수인들을 사냥하던 놈들이었다.”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 듯 이든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런 그를 이끌고 근처에 앉아서 쑥덕거리는 환자들 틈으로 슬쩍 끼어들었다.
귀동냥으로 정보를 모으기 위함이었다.
“무슨 일이래여?”
“대신전에서 나온 조사원이랍니다.”
대신전에서 직접 사람을 보냈다고?
어떤 이유이든 간에 대수롭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모리스 대신관이 직접 사람까지 파견시켜 조사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만한 일이라고는 신성 모독을 한 죄인을 쫓는 거라든가, 마물에 관한 것일 텐데.’
내 기억으로는 이맘때쯤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건이라고는 ‘낙마 사고’뿐이었다.
그게 대신전과 무슨 상관이지?
말이 신성 모독을 하고 도망갔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마물 쪽 일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혹시 고대 예언과 관련되기라도 한 걸까?
생각의 꼬리를 좇다 보니 별의별 가능성까지 다 떠올랐다.
고민 속에 잠겨 있는 나를 현실로 확 이끌어 낸 것은 한 환자의 지나가는 말이었다.
“듣기로는 광마병에 관한 조사라나 뭐라나. 낙마 사고로 입원한 환자들에게 이것저것 물으러 왔답니다.”
“!”
광마병. 맞아, 그런 설정도 나왔었지.
워낙 배경 설명과 함께 스치듯 짧게 지나간 내용이어서 미처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츄릅츄릅병 이후로 에덴 제국을 강타하는 또 하나의 유행병이었다.
승마를 즐겨 하는 귀족들이 줄줄이 잇달아 낙마로 입원하기 시작하니, 의료 당국은 말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퍼지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제기했다.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났었더라?’
멀쩡한 말들만 집단으로 도살됐었어.
귀족가에서 관리하는 말뿐만 아니라 야생에 돌아다니는 말까지 잡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프리마 숲이 쑥대밭이 됐었다.
“피비린내가 나는 녀석이군.”
이든의 입술 위로 희미하게 스쳐 간 혼잣말이 내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
무심코 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마침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사제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저 남자는…….’
은빛 가면으로 반쯤 가린 얼굴.
움직일 때마다 살짝살짝 가면 아래로 드러나는 화상에 그을린 자국.
나는 몇 가지의 특색 있는 생김새를 보고 그가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모리스의 심부름꾼이다.’
정체를 깨닫는 순간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이든의 다리 뒤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대신전 소속 1사제 피터 제임슨입니다. 라이언하트 백작님…… 맞으십니까?”
이든은 대답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워낙 유명인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먼저 알은체를 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한데.”
자신을 피터라 소개한 남자가 붕대를 감고 있는 이든의 팔에 시선을 두었다. 이든이 낙마 사고로 인해 병원에 온 것이라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낙마 사고에 관한 정보 수집을 하고 있어 몇 가지 질문을 여쭙겠습니다.”
“협조 공문이라도 있나?”
상대는 제법 예의를 갖췄지만, 이든은 그와 별개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피터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평온한 얼굴로 대답을 내놓았다.
마치 이든이 이런 태도로 나올 거란 걸 예상하기라도 한 것같이 보였다.
“요즘 비스에 빈번히 일어나는 낙마 사고에 관한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대관절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지? 말과 관련된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처럼 말을 병적으로 모아 대는 악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라이언하트 백작가에서 리아노 공작가와 승마 내기를 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신성해야 할 대신전이 속세에 관심이 쓸데없이 많군.”
“말씀하시는 걸 보니 소문이 사실이군요. 그렇다면 제게는 라이언하트 백작가에 정보를 수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내게는 그쪽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라는 의무가 없어서 말이야.”
처음으로 사제에게서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화의 흐름이 끊긴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우리를 둘러싼 기류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대신관님을 향한 반항이십니까?”
“그것이 문제 될 것이 있나?”
“라이언하트 백작님. 경솔한 언행은 삼가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백작가의 안위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이니 넘겨듣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타지 출신이라고 하셔도, 힘의 균형이 어디 있는지는 아시지 않습니까?”
“눈물겨운 충고로군. 그럼 나도 하나 조언하지. 지금 그 말이 반역의 씨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가면 아래로 사제의 번뜩이는 안광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든의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그를 거들고 나섰다.
“방금 아조씨가 한 말이 그렇쟈나요. 힘의 중심이 황제 폐하께 있쬬, 그럼 누구한톄 있단 거예요?”
네 살인 나도 아는데, 아저씨 바보세요?
쫑알쫑알 뱉어 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살벌한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아, 뒷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