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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81/142)

81화

과거 명성과 달리, 현재의 에덴 제국은 대신전의 권력이 막강한 편에 속했다.

모리스가 대신관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황제는 힘을 쓰지 못했고, 실제로 제국을 휘어잡고 있는 것도 모리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감히 황제보다 우위에 있다고 떠들 수는 없는 법이었다.

비록 꼭두각시여도 황제는 황족의 피를 잇고 있었고, 모리스는 그저 평범한 제국민일 뿐이었다.

아무리 그가 황좌를 욕심낸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전 제국민들에게 황족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모리스 대신관은 때를 기다리는 하이에나 같은 자였고 누구보다 제국민의 반응에 예민했다.

그런 그의 성향 때문인지 사제 피터는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서인 것 같았다.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충분히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이긴 했쬬.”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님, 지금 저에게 협박하시는 겁니까?”

처음과 달리 피터의 목소리는 한껏 작아져 있었다.

물론 그것이 그의 태도가 순해졌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눈빛은 순진한 어린아이를 울리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울지 않았다.

마냥 순수하고 만만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말이다.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피터의 눈동자에 미미한 파장이 일었다.

꼴좋게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이든이 한쪽 팔을 들어 올려 내 어깨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그쯤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 덕분에 피터의 사나운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우리 사자님이 최고라니까.

나는 완벽한 나의 방파제 뒤에 숨어 피터를 힐끔 훔쳐보았다.

“내게 무례한 건 넘어가 줄 순 있어도 내 딸에게 무례한 건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으니까.”

“……오늘 일은 대신전에 그대로 보고 올릴 것입니다.”

피터가 한발 물러섰다.

가면 아래로 비틀린 입술이 짓이겨져 있는 걸 보니 어쩐지 통쾌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으흥흥, 우리 사자님께서 한 방 먹여 줬네. 나이스.

속으로 상황을 즐기고 있는데, 별안간 불쑥 대화에 끼어든 이가 있었다.

“그럴 필요 없다.”

소리가 난 방향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

저 자식이 여길 왜…….

“대신관님, 언제 오신 겁니까. 미리 언질을 주셨으면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됐다. 쯧.”

가장 먼저 그를 알아보고 달려 나간 피터에게 모리스 대신관이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보고를 올릴 필요는 없어.”

“네?”

“아까 대화하던 것 이미 다 들었으니 굳이 대신전으로 돌아가서 내게 또 고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아기 영애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대신관님의 명예를…….”

모리스 대신관이 인상을 팍 구기며 피터를 바라봤다.

“쯧, 그만.”

“…….”

급히 자세를 바로 갖춘 피터의 머리 위로 “떼잉, 쯧!”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내려앉았다.

‘……모리스 대신관이 원래 이런 이미지였나?’

나는 어딘가 모르게 드는 괴리감에 모리스 대신관을 면밀히 살폈다.

생긴 건 영락없는 모리스 대신관이 맞는데, 왜 묘하게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거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그만 듣고 싶으니 이만 대신전으로 돌아가라.”

“대신전으로 함께 돌아가시는 것 아닙니까?”

“나는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에게 볼일이 있다.”

모리스가 피터 사제를 지나쳐 나를 가리켰다.

그 손짓 한 번에 나는 물론이고 이든과 피터까지 생각 회로가 멈춘 듯이 보였다.

‘나? 나한테 무슨 볼일?’

지금 순간만큼은 내게 독심술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은근히 즐거워 보이는 저 낯짝 뒤로 무슨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 알 겨를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나마 내가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라면…….

‘거슬리는 세력이라 견제하려는 걸까?’

비스에서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라이언하트 가문에게 경고하려는 거거나, 혹은 회유를 하려는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봐야겠어.

일단은 나서지 않고 피터와 모리스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뭐? 아니, 됐다. 쓰읍. 먼저 돌아가 있어. 난 알아서 돌아갈 터이니.”

“…….”

두어 번 더 손을 휘적거렸음에도 피터가 제자리에서 꿈쩍을 하지 않자, 모리스는 언성을 높였다.

“뭣 해? 어서 돌아가지 않고. 명을 거스르려는 건가?”

“존명.”

피터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솔직히 말해서 촐싹 맞게 재촉하는 모리스의 모습은 세계관 최강 빌런이라 부르기에는 어딘가 바보 같은 구석이 있었다.

‘저건…… 그냥 옆집 바보 삼촌 같은걸?’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는 어린 소녀처럼 피터의 뒷모습이 아예 사라질 때까지 밖을 내다보는 모리스를 보다 보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후우. 드디어 방해꾼은 갔군그려.”

마침내 피터 사제가 아예 시야에서 사라지자 모리스는 안주머니에서 이니셜 자수가 놓인 손수건을 꺼내 들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우리 쪽으로 돌아섰다.

모리스의 눈 코 입이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 심히 호러였다.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

나긋나긋한 부름에 흠칫 놀랐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곧 있으면 피폐물 속에서 살아남기 경력 5개월 차에 접어드는 프로 생존러 아기에게 이 정도 포커페이스 유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혹여라도 그가 기습 공격을 할 것을 대비해 주먹 감자를 말아 쥐고 품 안에 숨기고 있었다.

“왜 부르셨어여, 모리스 대신관밈?”

“내 그 말랑뽀짝한 볼을 한번 좀 만져 봐도 되겠나?”

“……녜?”

순간적으로 모리스 대신관이 미친 건가 싶었다.

이번만큼은 나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싫다고 하면 함부로 만질 생각은 없지만, 기왕이면 허락해 줬으면 하는데.”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꼼지락거리는 모리스의 손가락이 내 곁에서 뱅뱅 맴돌았다.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까지 다가온 순간,

탁!

이든이 코앞에서 알짱거리는 그의 손을 확 낚아채 갔다.

“내 손에 죽고 싶은 건가, 벤 쟝?”

“벤 쟝 할부지?”

그가 모리스를 보고 ‘벤 쟝’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자마자, 줄곧 느껴지던 묘한 괴리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벤 쟝 할아버지가 모리스 대신관의 모습으로 변신한 거구나!’

다른 사람의 외관으로 감쪽같이 변하는 능력은 투명화에 이어 카멜레온 수인만 가진 특별한 재능이었다.

“하하하하핫! 이거 들켰구먼그려. 아주 감쪽같은 변신술이었는데.”

“나를 속이려거든, 그 냄새부터 지우고 왔어야지.”

“그랬다가는 정말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말이여.”

너털웃음을 짓는 벤 쟝은 조금 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무사히 퇴원 수속을 마친 그와 함께 몬크에게 안부 인사를 전한 후,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번 에피소드의 치트 키가 드디어 우리와 한배를 타게 된 것이었다.

* * *

고단한 하루가 이쯤 나를 놔줬으면 좋으련만.

우여곡절 끝에 퇴원한 벤 쟝과 함께 라이언하트 저택으로 돌아온 내게는 또 하나의 숙제가 남아 있었다.

‘흐아아아. 오늘 하루 진짜 길다.’

나는 노아와 저녁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반쯤 녹초가 된 상태로 손님방으로 향했다.

“뇨아아아.”

콩 콩 콩.

거의 문에 기대다시피하고서 맥없이 방문을 두들기니, 노아가 놀란 표정으로 뛰쳐나왔다.

“루나. 괜찮아? 많이 피곤해 보여.”

“으응, 오늘 엄청 엄청 바빠써.”

노아는 기운 없이 흐느적거리는 나를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가서 좀 잘래?”

“안 돼. 뇨아랑 같이 저녁 먹기루 했쟈나.”

“저녁은 다음에 먹어도 되는데.”

“약속이 먼져인걸.”

헤헤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펼쳐 보이니 노아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는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이부자리로 나를 이끌었다.

“그럼 조금만 누워 있어. 아직 릴리앙 씨가 음식을 만드는 중이니까.”

“그러다가 잠들면 오또캐.”

“내가 깨워 줄게.”

깨워 줘도 못 일어날 것 같은데.

그렇게 웅얼거리면서도 순순히 노아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스르륵 누웠다.

폭신폭신한 매트리스를 거부하기에는 오늘 내 하루는 너무나도 피곤했고 어린아이의 몸은 꽤나 지쳐 있었다.

노아는 손수 내게 보드라운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몽글몽글한 비누 향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따뜻하게 몸을 감싸는 온기를 타고 내내 참아 왔던 피로가 스멀스멀 밀려왔다.

자꾸만 감기려 하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졸음과 씨름했다.

“뇨아랑 그때 못 한 얘기 해야 하는뎨…….”

“대신전의 벽화 얘기 말하는 거야?”

“으응, 그거…….”

내 머리맡에 앉아 가만히 나를 토닥여 주는 손길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때 네가 관심 있어 하는 것 같아서 자세히 알아봤어.”

“오또케?”

“리아노 공작가의 서재를 몰래 살펴봤지.”

“나한톄는 위험한 일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나긋하게 말하는 노아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전에 말했던 벽화 속 성녀님 얘기 말이야……. 그거 외부에는 고대 기록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예언이래. 대신관님이 리아노 공작님을 통해서 요즘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거랑 관련 있는 것 같아. 아무래도 그 예언 속의 성녀님이…….”

나는 귓가에 울려 퍼지는 잔잔한 음성을 자장가 삼아 차츰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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