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잠결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내 꿈에 나타났다.
[루나. 전에 말했던 벽화 속 성녀님 얘기 말이야.
외부인들은 고대 기록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신의 예언이래. 모리스 대신관님이 사람들을 속이고 있어.
리아노 공작님을 통해서 요즘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거랑 관련 있는 것 같아.
아무래도 그 예언 속의 성녀님을 찾는 게 아닌가 싶어.]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대신전의 벽화를 직접 본 적이 없는데, 꿈속에서는 생생하게 그려졌다.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노아의 묘사력이 너무 생동감 넘쳐서 그랬을까?
한 여자아이가 다양한 동물들 틈에 둘러싸여 있었다.
노아가 내게 말해 준 대로 벽화 속 아이는 동물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벽화 속 성녀.’
그냥 그렇게만 전해 들었을 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에덴 제국에서 성녀는 그리 희귀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옛 설화나 역사책에서는 이능을 가진 이에게만 ‘성녀’라는 호칭이 붙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대신전 소속의 여자들을 ‘성녀님’이라고 불렀다.
그렇기에 나 역시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녀’를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리아노 공작이 찾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확실히 누군지 알겠어.’
그 성녀의 정체는…….
* * *
다음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손님방에는 나 혼자 있었다.
노아는 아침 일찍 리아노 공작의 부름을 받고 공작저로 돌아갔다고 했다.
내가 너무 푹 잠든 바람에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났지만, 머리맡에 놓고 간 노아의 쪽지가 그를 대신했다.
<공작님께서 이번 주말에 연회 참석 전에 대신전에 한 번 더 들르신다고 했어.
그때 더 알아내는 게 있으면 연회 때 만나서 알려 줄게.
―언제나 루나 너의 편인 노아가
(ps. 참, 그분이 요즘 찾고 있는 아이의 이름은 스텔라야. 지금은 이름밖에 모르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성까지 알아 오도록 할게.)>
……스텔라.
노아는 그녀의 풀 네임을 곧 알아 오겠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에 관한 정보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니까.
“스텔라 리리카이.”
그녀를 왜 잊어먹고 있었을까.
스텔라는 이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이다.
다시 말해 머지않은 미래에 노아와 이어질 운명의 상대라는 뜻이다.
원작에서는 ‘노아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만나는 전개였기 때문에 아예 그녀에 대해 망각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모리스 대신관이 스텔라를 찾는 시점이 원작보다 더 빨라졌네.’
어쩌면 원작과 다르게 내가 살아남아서 그런 걸까?
‘아니야. 그런 거라면 개연성이 어긋나.’
내가 살아 있으면 모리스 대신관이 스텔라를 찾을 이유가 없다.
애초에 모리스가 시골 산골짜기에 살고 있는 스텔라를 후원하기 시작한 이유가 ‘나’이기 때문이다.
이 피폐 소설의 여자 주인공 스텔라 리리카이는 노아의 첫사랑을 떠올리게끔 만드는 사람이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나’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뜻이다.
원문에는 스텔라가 생김새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습관이라든가, 노아에게는 꽤 중요한 것들까지 나와 닮았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첫사랑을 그리워하던 노아는 쉽게 스텔라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그게 노아를 멋대로 주무르려는 모리스 대신관의 계략인 줄도 모른 채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내가 살아 있잖아?’
그렇기에 노아는 첫사랑을 그리워할 이유도, 스텔라에게 빠질 이유도 없었다.
모리스 대신관 역시 굳이 수고해서 스텔라 리리카이를 찾아내 그녀를 후원하고, 성녀로 앉힐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내가 아는 상식선에서는 분명 그래야 하는데……. 어째서 모리스가 스텔라를 찾는 거지?’
분명 내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를테면 ‘노아의 첫사랑과 닮았다’는 것과 별개로 스텔라가 필요한 이유 같은 것 말이다.
깊은 상념에 잠겨 차근차근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 가고 있는데, 방문 너머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리챠드였다.
“아가님. 일전에 제게 부탁하셨던 논문 자료입니다.”
그는 약속했던 대로 봉인된 마도구에 관한 연구 논문을 들고 왔다.
그에게서 논문을 받아 든 나는 표정을 구겼다.
“논문 상태가 왜 이래여?”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종이 끝이 불에 그슬리기라도 한 것처럼 검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못 구할 뻔했으니.”
“무슨 일이 있어써요?”
“제가 도착했을 때 사서가 논문 자료들을 소각하고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위에서 여러 자료들을 폐기 처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더군요.”
이 시기에 자료 소각이라니?
무언가 이상했다.
비스의 중앙 대도서관은 황실 산하에서 운영되는 기관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재상부에서 불필요한 문서를 소각하는 기간은 매년 연말이었다.
‘그런데, 상반기의 반이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추가 소각이라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몬가 이상한뎨.”
“안 그래도 수상쩍은 움직임이라고 생각해서 감시를 붙여 뒀습니다.”
“뭔가 숨길 게 있나 봐여.”
“소각을 맡았던 사서가 대신전에 출입한 기록이 있는 걸 봤을 때, 그쪽의 입김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신전이라면……!
나는 즉각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런 짓을 꾸밀 사람이라면 모리스 대신관이 유력할 꼬에요.”
“저 역시 아가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 일은 확실히 황실 쪽에서 주도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갑쟈기 일정에도 없던 걸 진행한다는 거면 엄쳥 급한 일인 것 같은뎨…….”
“게다가 은밀하게 진행하라는 명령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각장 주변에 경비병까지 서 있어서 논문을 빼돌리느라 꽤 애를 썼습니다.”
“경비병이여?”
화들짝 놀라서 되물었다.
평범한 소각장에 경비라니.
의심이 더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모리스, 그 자식. 대체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거야?’
예정보다 일찍 여자 주인공 스텔라 리리카이를 찾지를 않나, 갑자기 문서들을 몰래 폐기하지를 않나.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었다.
“혹쉬, 다른 폐기 문서들이 어떤 것들인지 봤써오?”
“아가님께서 부탁하신 걸 챙기면서 함께 빼돌린 것이 있긴 합니다만……. 소각 바로 직전에 건진 거라 복구 작업 중에 있습니다.”
“당장 내용을 확인 못 하는 건 괜챤으니까 뭐에 관련된 건지만 알려 쥬세요.”
“꽤 여러 가지인데 아직 그 교집합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벽화 복원 기술에 관한 연구 자료, 신의 사랑을 받은 아이에 관한 기록.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금기된 흑마술에 관한 자료였습니다.”
벽화 복원 기술.
신의 사랑을 받은 아이.
금기된 흑마술.
리챠드의 말대로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일관성이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과 모리스 대신관의 최종 목표를 아는 내게는 뻔히 속이 보이는 시나리오였다.
‘모리스 대신관. 기어이 그자가…….’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원작과는 조금 달라진 전개였지만,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모리스가 무슨 짓거리를 꾸미려고 하는지.
“리챠드. 사람을 하나 찾아야 할 것 같아여. 대신전 쪽도 찾는 사람인데,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함미다.”
“저런. 그렇다면 발 빠른 자와 혼선을 놓을 자가 필요하겠군요.”
“녜. 혼선을 놓을 분은 있으니, 발 빠른 분만 구해 쥬시면 되는뎨.”
“혼선 담당은 벤 쟝 씨일 듯하고, 어디 보자. 어떤 분을 보내는 게 좋을까요.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것입니다만, 찾아야 할 분이 맹금류를 키운다든가, 너구리라든가 오소리, 족제비 같은 것을 키우진 않겠지요?”
“녜?”
그게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땡그랗게 뜬 내게 리챠드가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토리 무크 씨가 천적에는 많이 약하신지라.”
“그냥 제 또래의 여자아이에여. 시골 산골짜기에서 사는 평범한 어린애인걸요?”
“다행입니다. 그런 상대라면 토리 무크 씨가 일주일 내로 모시고 올 수 있을 겁니다.”
“일주일 정도라면 딱 적당하네여.”
“이번 연회에 등장시켜야 하는 깜짝 이벤트인 겁니까?”
리챠드가 마침 손에 들고 있던 황실 초대장을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금을 녹여 찍어 낸 초대장에는 ‘가정의 달 연회’라는 글씨가 겉 표면에 적혀 있었다.
연회가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게 슬슬 실감이 났다.
“그런 건 아니에요. 우리 쪽에서 데리고 있어야 모리스 대신관이 쓸 패를 하나 없앨 수 있어서 그래여.”
“일종의 모리스 대신관 뒤통수치기 작전이로군요.”
“정답임미다.”
“아가님의 예지몽 덕분에 이번 일도 수월하게 진행되겠군요.”
생긋 웃는 리챠드의 미소가 괜히 내 양심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아서 멋쩍게 따라 웃었다.
‘하하, 그러게요. 저도 제 기억력이 저를 이렇게 먹여 살릴 줄은 몰랐어요.’
스스로 느껴지는 어색함을 빨리 없애고자, 또 다른 주제를 잽싸게 꺼내 놓았다.
“그리고 곧 대신전에 처음 보는 사람이 들락날락거릴 거예요.”
“납치를 준비하면 됩니까?”
이 시고르자브죵 멍멍님께서는 어찌 저렇게 웃는 낯으로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걸까.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리챠드를 보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럴 필요는 없써요. 그냥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인물이에여.”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인간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대신전의 지하 공간에서 살수가 되는 훈련을 받고 있는 걸지도요.”
머릿속에 대체 어떤 세계가 펼쳐 있는 건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리챠드의 상상의 나래를 정리해 주었다.
“그냥 평범한 조각가일 꼬에요.”
“평범한 조각가요……? 대신전에 인테리어 공사라도 한답니까?”
그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핏 연관성 없게 들릴 순 있겠지만, 내 예상이 틀리지 않을 거야.’
리챠드가 소각 직전에 빼돌렸다는 자료들을 떠올리며 확신했다.
모리스 대신관이 흑마술을 이용해서 벽화의 내용을 고치려 한다는 것을!
[외부인들은 고대 기록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신의 예언이래. 모리스 대신관님이 사람들을 속이고 있어.]
노아가 해 줬던 말이 내 예상에 확신을 더해 줬다.
나는 조금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리챠드에게 설명해 줬다.
“아마 고대 기록이 적힌 대신전 벽화를 조작하려고 불러들이는 건데, 그 사람이 그곳에 주기적으로 방문했다는 증거를 잡아 진실을 밝혀 주면 됨미다.”
“그런 거라면 우리 새로운 신문사의 국장에게 맡기면 되겠군요.”
우리의 새로운 신문사…….
리챠드의 명쾌한 대답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기르신 신문사 리뉴얼이 벌써 끝나써여?”
“이제 와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옛날에 쓰이던 그 이름은 촌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이제부터는 루나 신문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