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이제 와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옛날에 쓰이던 그 이름은 촌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이제부터는 루나 신문사입니다.”
“루냐 신문사…….”
내 입 밖으로 내기에는 아직 조금 쑥스러웠다.
이든이 가정의 달을 기념해서 내게 선물해 준 ‘기르신 신문사 소유권’이 며칠 전 완벽히 나에게 넘어왔다.
리챠드가 그동안 열심히 백방으로 뛰어 준 덕분이었다.
비어 있는 신문사 국장 자리에는 폴을 앉혔다.
그는 과분한 자리라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나는 단호히 말했다.
[폴. 세상은 나이가 차면 능력이 없더라도 직분을 주지만, 나는 그 사람들이랑 달라여. 정말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에게만 맡길 꼬에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는 이제 고작 스무 살이잖아요.]
[물론 세상의 잣대로는 그렇죠. 하지만 폴에게는 그분들에게 없는 비쟝의 무기가 있쨔나요?]
[비장의 무기요?]
[저는 폴처럼 부정부패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언론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걸여?]
결국 폴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많이 부족한 만큼 더 열심히 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내 결정에 반박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이언하트 가문의 사람들은 폴의 국장 취임을 온전히 축하해 줬고, 우리는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까지 칼을 갈고 있는 중이었다.
“죠아요. 리챠드 말대로 그건 폴에게 맡기는 게 좋겠써요. 루나 신문사의 첫 기사로는 그만한 특종도 없을 테니까.”
“즐거운 일들이 연이어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 * *
대신전 벽화와 성녀에 관한 계획을 정리한 나는 곧장 벤 쟝 씨를 만나러 갔다.
이든이 나와 한 약속대로 그에게 내준 방은 북방의 야생마가 머물고 있는 마구간 옆의 작은 오두막이었다.
그는 호화로운 저택 생활은 좀이 쑤셔서 오히려 그 작고 아늑한 공간이 편하다고 했다.
벤 쟝 씨는 오두막 문을 활짝 열고 작업하고 있었지만, 예의상 노크를 잊지 않았다.
똑똑.
바느질에 집중하느라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던 벤 쟝이 나를 보더니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오, 나의 태양, 왔구먼!”
“벤 쟝 할부지. 어느 정도 완성됐써요?”
“부탁한 것 중에서 두 개는 완성 했고, 아직 한 개는 만들고 있지.”
그가 완성한 물건들을 주섬주섬 꺼내 와서 자랑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정갈한 재단 솜씨와 한 땀 한 땀 한 땀 한 땀 정성 들인 바느질 솜씨는 단연 으뜸이었다.
“아직 말에게 착용은 안 시켜 봤쬬?”
“거 그럴 시간이 어딨슈.”
끼고 있던 낡은 안경을 벗은 벤 쟝이 피곤에 지친 눈가를 손가락을 꾹, 꾹 누르며 말했다.
밤을 꼴딱 새우셨나 보네.
하기야, 혼자서 조수도 없이 세 개의 물건을 만들어야 했으니 엄청 빠듯했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정확한 실력과 속도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역시 벤 쟝에게 맡기길 잘했어.
“시착은 이따가 아빠랑 같이 제가 해 보께요.”
“아무래도 실사용자가 해 보는 게 좋긴 하니까 가져가슈. 개선해야 할 점이 있음 바로바로 말해 주고.”
“녜! 알겠슴미다.”
벤 쟝이 완성된 고삐와 안장을 꺼내 왔다.
튼실한 북방 야생마의 몸에 맞춰 제작한 것이다 보니 크기가 제법 컸다.
“최대한 가볍게 만들긴 했다만 워낙 커서 나의 태양 혼자 들고 가기에는 힘들 겨. 어른을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은디.”
“곧 아빠가 올 꼬에요. 리챠드에게 말해 놨거든요.”
내가 아는 리챠드의 성격상 이든에게 내 위치를 말해 줬을 것이고, 내가 아는 이든의 성격상 분명 이곳으로 올 거라는 걸 확신했다.
“그럼 그동안 내 작업하는 거 구경하실 텨?”
“그래도 돼여?”
“나야 좋지. 이거 나의 썬샤인에게 내 솜씨를 자랑할 수 있으니까. 하하하하핫!”
혹시라도 방해될까 봐 묻지 못한 말이었는데.
벤 쟝이 선뜻 먼저 간이 의자를 꺼내 와 줘서 사양 않고 냉큼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내게 현재 작업 중이던 것을 보여 주었다.
“박차만 만들면 되는 고에요?”
“쇠 재갈을 뺀 고삐랑 안장은 기존의 디자인에서 불필요한 걸 덜어내기만 하면 되는 거라 제작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이게 좀 애를 먹이고 있지.”
“아무래도 만들기 좀 어려울까요?”
“어허, 쓰읍! 섭한 소리를 하는구먼. 내 이래 봬도 가죽으로 못 만드는 것이 없다고.”
그가 힘차게 작은 손 망치를 쥐고서 가죽 위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탕! 탕! 탕!
꼼꼼한 요철 작업이 끝난 후, 박차의 몸통 부분 작업이 남아 있었다.
뜨거운 화롯불에 달궈서 만든 U자형 쇠를 수만 번의 망치질로 부드러워진 가죽으로 감쌌다.
모두 말을 신경 쓴 구조였다.
내가 그린 도안은 직접적으로 닿는 부분은 최대한 불편함이 덜할 수 있도록 고민한 디자인이었고, 벤 쟝은 도안을 그대로 실체화시켜 주었다.
“이게 생긴 건 단순해 보여도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거요. 그냥 무턱대고 모양만 흉내 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말이여. 이 곡선의 각도에 따라서 성능이 천차만별이 되는 거, 알랑가 몰라.”
나는 벤 쟝처럼 가죽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괴짜 장인이 무척이나 들떠 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시중의 뻔한 도안들과는 다른 새로운 작업이 괴짜 장인의 취향에 딱 맞은 듯했다.
밤을 꼬박 새웠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생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여, 도대체 이런 건 어찌 생각한 거요? 보통 이런 발상을 하기는 쉽지 않은데 말이여.”
“으음. 그냥 말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댜고 생각하다 보니까 떠올라써요.”
뺨을 긁적이며 수줍게 말하는 나를 보며 벤 쟝이 우렁찬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허! 역시 소문으로 듣던 대로 천재 아기로구먼!”
“……소문이 났다구여?”
도대체 소문이 어디까지 퍼진 걸까.
벤 쟝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집시로 알고 있는데, 그의 귀에 들어갈 정도라면 최소 국경을 넘어 타국까지 흘러들어 갔다는 소리였다.
“글쎄. 츄릅츄릅병의 치료제를 개발한 것이 고작 네 살짜리 아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가 아마 파무즈 사막을 막 지나고 있을 즘이었지?”
“그 소문이 벌써 사막까지 퍼져써요?!”
“발 없는 말에게 국경이 무슨 소용이겠슈?”
뭐, 맞는 말이긴 하지.
애초에 그 힘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기르신 신문사를 접수해둔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칼자루를 하나 더 쥐었다는 게 확실하게 실감 나네.’
작정하고 언론을 이용한다면 에덴은 물론, 외국의 큰손들도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도 대비해서 계획을 짜 둬야겠다.’
대화 내내 힘차게 두들기던 망치질이 멈췄다.
벤 쟝은 벗어 두었던 안경을 다시 주섬주섬 끼고서, 끝이 둥근 원기둥 형태가 된 박차를 이리저리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간에 올해 가정의 달 연회에서는 라이언하트가가 최고의 가문을 차지하겠구먼.”
“그럴 수 있겠쬬?”
“그럼! 츄르츄르병의 치료제도 개발하고, 내 듣기론 음식 특허도 두 개나 냈다고 들었는디.”
“녜, 맞아요. 츄르랑 릴까스여.”
“것도 보나 마나 나의 태양께서 개발한 레시피겄지?”
그는 모든 공로가 나에게 있다고 여기는 듯했지만, 내 생각은 그와 달랐다.
이것만큼은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다 함께 힘을 합쳐서 만들었쬬.”
“에헤이. 이 특이한 박차를 디자인한 걸로 봤을 때, 영락없는 나의 태양의 작품이구먼, 뭐.”
“그렇지만, 식구들의 도움 없이 저 혼쟈서 지금처럼 사업을 성공시키려고 했다면 절대 못 했을 꼬에요”
이건 정말 진심이었다.
레시피 자체는 내가 개발하긴 했지만, 재료 공수부터 시작해서 가게를 구하는 것, 판매를 하는 것, 매출 관리를 하는 것…….
그 크고 작은 업무들 속에 숨겨진 모두의 노력들이 더해져서 이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잘되는 건 모두 자기가 잘난 탓인 줄로만 아는 에덴의 귀족들과 다르다.
이래 봬도, 내가 의리파 아기거든!
“하하하하핫! 이거 우리 태양께서는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행동만 골라서 하는구먼?”
벤 쟝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빛과 손길 속에서 기특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냥 사실만 말했을 뿐인데…….’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칭찬에는 영 익숙하지 않은지라 나도 모르게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벤 쟝은 부러 목소리를 높여 거듭 반복했다.
“에덴 제국 올해의 어린이는 나의 태양이 차지할 겨!”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갑작스럽게 들려온 이든의 목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언제부터 대화를 듣고 계셨던 거람.
문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그가 바로 서더니 내게 다가왔다.
“내 딸을 두고 대체 누가 뽑힌단 말이지?”
“하기야. 귀엽기로도 단연 일등이지 말이여.”
“그뿐일까?”
“두 명은 없을 천재 중의 천재인 아가지! 머리에 똥이 들은 게 아닌 이상 나의 썬샤인이 올해의 아기가 될 터!”
언제부터 저 두 남자가 저렇게 쿵짝이 척척 맞았던 거지…….
팔불출계의 기대주인 우리 사자님까지 나서서 거들기 시작하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끝날 줄 모르는 낯부끄러운 칭찬 릴레이에 영혼이 탈탈탈 털리는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뜻이 통하는군.”
“그러는 그짝이야말로 눈썰미가 제법이오?”
이든의 한쪽 눈썹이 흥미로움으로 인해 꿈틀거렸다.
“어디까지 통하는지 내기해 보는 건?”
“나쁘지 않은 제안이구먼. 내 태양을 향한 찬가라면 스무 개는 거뜬히 만들 자신이 있응께.”
한바탕 칭찬을 쏟아 낸 걸로도 모자랐는지, 또다시 시동을 걸려는 두 남자의 입을 틀어막고만 싶었다.
으아아아! 다들 조용히 해 줘요, 나는 칭찬에 면역력이 없는 아기란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