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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84/142)

84화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부끄러움으로 인해 펑 터져 버릴 것만 같아서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두 남자의 시선이 오롯이 내게로 향했다.

“이, 이럴 시간이 없써요!”

나는 벤 쟝이 만들어 놓은 안장을 낑낑거리며 들어 올렸다.

사실 말이 들어 올렸다는 거지, 실제로는 바닥에 반쯤 질질 끌다시피 하며 문을 향해 나아갔다.

“얼른 나오세여. 끄응……. 벤 쟝 할부지께서 만들어 쥰 거 시착해 봐야죠.”

읏챠, 으랏챠챠!

벤 쟝의 말대로 다른 제품들에 비해서는 가벼웠지만, 크기가 크기인지라 아직 어린 나에게는 온 힘을 쏟을 필요가 있었다.

몸집만 한 말안장과 씨름하는 내 모습을 본 두 남자가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지금…… 내 딸이 부끄러워하는 건가?”

“내 오랜 경험에 빗대어 봤을 때 그런 것 같수다.”

“확실히 그렇군.”

나는 등 뒤에서 은밀하게 한 마디씩 주고받는 두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아빠 얼르으은!”

오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이든이 기다란 다리로 금방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나를 대신해 말안장과 고삐를 챙겨 들었다.

“이것도 완성됐으니까 가져가쇼!”

벤 쟝이 금방 만들어진 박차를 내게 들려 주었다.

빤한 눈빛이 나를 관찰하는 게 느껴졌지만, 끝까지 모르는 척하며 앞장섰다.

오두막 문 앞까지 우리를 마중 나온 벤 쟝이 뒤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 나의 썬샤인의 귀여운 순간을 포착하면 녹화용 마도구로 또 공유해 주쇼, 언제든 환영이니까 말이여!”

진심으로 세상의 모든 녹화용 마도구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쉬고 있던 야생마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마구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침 통나무로 만들어진 여물통에 고개를 박고 식사 중이던 흑마와 눈이 마주쳤다.

푸르르르.

예전 같았으면 시니컬하게 들렸을 투레질 소리가 오늘은 어쩐지 인사처럼 들렸다.

“뭔가 바뀐 것 같지 않나?”

뒤따라 들어선 이든이 커다란 안장과 고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내게 물었다.

“아. 츄르 당근을 먹였더니 식욕이 돌아온 모양이에여. 아침저녁으로 엄청 열심히 먹는다는 보고를 받아써요.”

우리 사자님, 눈썰미도 좋으셔라.

리챠드의 보고에 따르면, 말이 처음보다 식사량이 많이 늘었다고 했다.

‘역시 마성의 츄르 당근이 효과 있을 줄 알았다니까.’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건초나 여물에 입을 대기는커녕, 먹이 반응도 없던 흑마가 츄르 당근을 맛본 이후로는 입맛을 찾은 모양이었다.

너무 잘 챙겨 먹은 나머지 요 며칠 사이에 눈에 띌 정도로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랐다.

“아니. 저 말 말고, 나.”

“아빠도 살쪄써요?”

오잉?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하자, 이든이 눈살을 구겼다.

“뭐?”

이내 짧게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린 그가 내 앞에 섰다.

“자세히 봐라. 분명 무언가 달라졌을 것이다.”

으음…….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든을 위해서 덩달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위아래로 찬찬히 살펴본 우리 사자님은 어제와 다를 것 없이 여전히 잘생기셨구먼, 대체 뭐가 달라졌다는 걸까?

딱히 미용을 한 것 같지도, 옷 입는 스타일을 바꾸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흐으으으으음.”

“……크흠!”

내가 한참 고민해도 알아차리지 못하자 결국, 이든이 먼저 직접적인 힌트를 주었다.

그는 괜한 헛기침과 함께 한쪽 팔을 내 눈앞에 내밀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팔에 붕대를 푸셨네.

생각했던 것보다 수인족의 회복력은 더 어마어마한 모양이다.

“전치 2주라고 하지 않았써요?”

“오늘 아침 일찍 의사가 왔다 갔다. 의사가 말하길, 붕대를 풀고 가벼운 일상생활 정도는 괜찮다더군.”

“아빠가 빨리 풀면 안 되냐고 협박한 건 아니져?”

“……그런 불미스러운 짓은 상상해 본 적 없다.”

거짓말, 저택 밑에 비밀 공간도 만들어 두셨으면서.

지난번 리챠드가 양심 고백한 것이 떠올라 게슴츠레 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든은 급하게 시선을 돌리곤 “맹세코 절대 없다”라며 격하게 부정했다.

어째 그 모습을 보니 뻔히 알 것 같았다.

그가 왜 예정보다 빨리 붕대를 푼 건지 말이다.

[당분간은 안아 쥬기 금지에여.]

[언제까지 금지인 거지?]

[붕대 풀 때까지요.]

분명 그때 그 대화 때문이겠지.

여느 때보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그 증거였다.

의사의 진단대로라면 2주 동안이나 붕대를 하고 있어야 했지만, 그래도 뭐…….

‘요 며칠 동안은 얌전히 지내셨으니까, 상을 드려야겠지?’

하기 싫은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을 이든이었기에 조금 관대해지기로 했다.

“붕대 푼 거 축하드려여, 아빠.”

이든을 향해 포르르 달려가니, 기다렸다는 듯이 자세를 낮춘 그가 나를 한 팔로 안아 들었다.

나도 몰랐는데 내심 포근한 품이 그리웠었나 보다.

그에게 와락 안겨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몹시 편안하게 느껴졌다.

널따란 어깨판에 통통한 뺨을 비비적거리자, 커다란 손바닥이 내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얼마간 더 그러고 있던 나는 이내 그의 품에서 고개를 뗐다.

“오늘은 여기까지.”

“으음…….”

이든이 아쉬운 신음을 얕게 앓았다.

조금 더 품에 안겨 있고 싶은 것은 나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다 나으신 건 아닌걸?’

나를 안고 있느라 그의 회복이 더뎌지게 될까 봐 걱정됐다.

얼마 뒤 있을 승마 내기 연습도 해야 했기에 괜히 나까지 나서서 팔에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든의 품에서 내려온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벤 쟝이 만든 새 안장으로 다가갔다.

“그럼 거부감이 덜할 안장부터 시작해 볼까여?”

군말 없이 안장을 들어 올린 이든과 함께 야생마에게로 다가갔다.

본래의 성질 같으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투레질을 했을 말이 의외로 얌전했다.

그저 조용히 우리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좇기만 하는 모습을 보니, 한시름 덜었다.

“그래도 몇 번 본 사이라고 경계하지는 않네요. 다행이댜.”

“적어도 지금 당장은 공격 의사를 보이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무심하게 대답한 것치고는 확신에 차 있는 말투였다.

맹수의 눈에는 그런 것까지 다 보이는 걸까?

신기한 눈빛으로 이든을 바라보니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한번 힘을 겨뤘으니 누가 우위에 있는지 알 것이다.”

이든의 말대로 흑마는 새로 만든 안장을 끼우는 내내 얌전히 있어 줬다.

마치 주인을 알아보고 복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덕분에 서로 큰 힘을 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고삐를 끼우는 건 네가 해 봐도 되겠군.”

“제게도 허락해 쥴까여?”

“말이 지금 누굴 보고 있는지 봐라.”

이든에게 부드러운 가죽 고삐를 건네받은 나는 야생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나만 보고 있네.’

맑고 투명한 눈동자 속에 말랑말랑한 내 얼굴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쟘시만 실례할게, 말아.”

나는 말이 놀라지 않게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프지는 않을 꼬야. 불편한 것들은 빼 달라고 부탁드렸꼬든.”

푸르르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들려온 투레질에 순간, 말이 내 말을 알아듣고 대답한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사실 그뿐이었으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끄응.”

키가 작아 까치발을 들고 낑낑거리는 내게 말이 고개를 낮게 숙여주었다.

‘!’

정말로, 내 키를 배려해서 눈높이를 맞춰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연의 연속인 걸까?’

얼떨떨한 기분으로 꼬삐를 말의 얼굴에 씌워 주었다.

말은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 냈다.

푸르르르.

새로 만들어 준 고삐가 마음에 들었는지, 말의 꼬리가 펄럭 움직였다.

부드럽고 가벼운 가죽 재질의 하네스 형식이라 평소에 쓰던 것에 비하면 훨씬 착용감이 좋았던 모양이다.

말은 눈치가 빨랐다.

내가 선물한 고삐에는 그를 고통스럽게 할 마법 장치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푸르르르!

다시 한번 힘차게 꼬리를 펄럭였다.

“새로운 장비들이 마음에 드는 거겠쬬?”

내 질문에 이든이 말을 힐끔 보더니 대답했다.

“확실히 너를 더 편해하는 것 같군.”

“저를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되물었다.

그런 줄은 몰랐는데.

이든이 그렇게 말을 해 주니, 새삼스럽게 말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츄르 당근 덕분에 점슈를 땄나 봐여.”

“네가 만든 건 마성의 힘이 있긴 하지.”

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 속에서 스틱형 츄르를 꺼내 물었다.

왈칵.

마음 한편에 뜨거운 감동이 몰려왔다.

나는 콩닥콩닥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고서 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고마오, 말아.”

야생마가 다시금 나를 위해 고개를 숙여 줬다.

내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얌전히 있어 주는 모습이 마냥 예뻐 보이기만 했다.

지금 모습을 리아노 공작이 보게 된다면 표정이 참 볼만하겠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즐거웠다.

마음이 들뜬 나는 무심코 보드랍고 매끈매끈한 말의 뺨 위로 입술을 살짝 맞췄다.

쪽.

짧은 찰나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등 뒤에서 음영이 짙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뽀뽀라니.”

아차차. 사자님도 보고 계시지, 참.

부랴부랴 그를 의식하고 뒤돌아섰는데,

‘……으응?’

난데없이 사자로 변해 있는 이든의 모습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잘 때 외에는 사람 모습으로 지내시던 분이 대낮부터 수인화한 모습이라니?

나는 동그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왜 갑자기 수인화하셨어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것 마저 해라.”

그가 커다란 앞발을 허공에 무심하게 휘적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고개는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뭐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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