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이든이 땅바닥을 걷어찼다.
“마음에 안 드는 포유류다.”
말은 그에 말대꾸하듯 ‘푸르릉’ 콧방귀를 뀌어 댔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그날 이후로 애꿎은 포유류 원망이 그에게 입버릇처럼 붙어 버렸다.
‘정작 사자님도…….’
크흠흠. 차마 면전에 대고 콕 짚어 드리지는 않았다.
아무튼 간에 우리 사자님은 겉으로 투덜거리시긴 해도 막상 행동은 정반대셨다.
“밥이나 먹어라. 내 딸이 만든 특별 레시피이니 남기지 말도록.”
야생마에게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츄르 당근을 챙겨 주는 것은 기본이었고, 어느 날은 정말 오만상을 다 쓰며 나타나서,
“이건…… 정말 주고 싶지 않았지만. 내 딸이 네 배의 상처를 볼 때마다 하도 걱정을 하니까 특별히 한 번만…….”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말구유에 풀 뭉치를 내려놓았다. 자세히 보니 예전에 프로스트 남작에게 왕창 구해 왔다 남은 그 약초였다.
‘아빠 몫으로 받아 왔었던 거네.’
그렇게 본인의 의지로 선뜻 약초를 내줘 놓고서 아깝다는 듯 한참을 마구간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특별히 빌려주는 거다.”
―푸르르?
“반드시 잊지 마라. 잠시 빌려주는 것이라는 걸.”
대화가 통하기라도 하시는 건지.
별 거부감 없이 약초를 우물우물 씹어 대는 야생마에게 거듭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런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차츰차츰 쌓여 갈수록 둘 사이의 거리도 줄어들고 있었다.
빌런의 뚝배기를 깨 주려는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나흘째 되는 날.
원작의 여자 주인공을 찾으러 간 토리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무사히 스텔라를 데려왔다는 소식도 함께였다.
나는 야생마와 승마 연습이 한창인 이든을 마구간에 두고, 혼자 응접실로 향했다.
“토리, 잘 다녀와써요?”
반가운 얼굴을 보고 오도도 달려가 반겼다. 토리는 우렁찬 목소리로 그에 화답했다.
“소인, 아가님께서 하명하신 것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와하하! 그게 뭐야, 토리. 엄청 바보 같아!”
낯선 웃음소리가 내 시선을 뺏어 갔다. 토리의 등 뒤에서 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풀어 헤친 여자아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우와. 진짜 토리 말대로네.”
나랑 완전 똑같이 생겼어. 스텔라가 푸른 눈으로 나를 유심히 관찰하며 중얼거렸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도 놀란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러니까 노아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거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그녀는 나와 판박이였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내 성장이 더딘 편이라, 스텔라의 키가 나보다 반 뼘 정도 더 크다는 거였다.
“안녕, 루나. 난 스텔라야. 네 얘기는 많이 들었어.”
스텔라가 먼저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라 그런지, 으레 귀족 앞이라면 어설프게라도 예를 갖추는 다른 평민들과는 달리 자유분방했다.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딱히 신경 쓰는 바는 아니기에 지적하지는 않았다.
“내 얘기를 들었따고?”
“응. 여기에 오는 내내 토리랑 재밌는 얘기를 많이 했거든!”
스텔라가 환히 웃으며 토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에 반쯤 안기다시피 한 토리에게는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스텔라가 아가님에 대해 물어보셔서 소인이 이것저것 설명해 드렸습니다. 혹 아가님께 실례되는 행동이었더라면 소인,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괜챠나.”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토리의 앞으로 하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고개를 숙여? 친구끼리 뭘 그런 거로 미안하다고.”
“스텔라. 소인은 아가님과 친구가 아니라…….”
“토리는 진짜 바보라니까. 토리는 내 친구잖아. 나랑 루나랑 친구니까, 토리도 루나랑 친구지!”
“아니, 소인이 어찌 감히…….”
당황해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 토리에게 손을 휘저으며 “괜찮아.” 하고 말해 주었다.
그걸 또 놓치지 않고 본 스텔라가 토리를 등 뒤로 끌어당겼다.
“루나, 친구끼리 그러면 못써.”
“모가?”
“그렇게 친구를 겁주고 협박하는 거 아니야.”
“……그런 적 없는뎨?”
“…….”
말문이 막힌 스텔라는 잠시간 나를 쳐다보더니 획 고개를 돌렸다.
“토리, 언제든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 난 네 편이니까.”
“응? 갑자기?”
“얼른 그러겠다고 해. 얼르으은!”
조금 전까지 나와 대화하던 중이었던 스텔라가 내 존재 자체를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뜬금없이 토리에게 뺨을 비비며 까르르 웃었다.
‘……뭐지?’
나는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묘하게 날 경계하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일까?
나는 스텔라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저렇게 스스럼없이 등장인물들과 친해지는 건, 주인공이라서 그런 걸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스텔라와 토리는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가까워 보였다.
말없이 그들을 보고 있는데, 응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 이런.”
달콤한 디저트를 들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던 리챠드가 우리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크게 확장된 까만 눈동자가 나에게 한 번. 그리고 스텔라에게 한 번 머물렀다.
“순간 아가님께서 분신 마법이라도 습득하신 줄 알았습니다.”
리챠드는 내 쪽으로 다가오며, 디저트를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솔직히 말해여. 찍었쬬?”
“설마하니 그럴 리가요. 제가 아가님과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요.”
정확히 우리를 구분해 낸 리챠드가 뺨에 붙은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 주며 싱긋 웃었다.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다.
“리챠드는 최고의 집사밈이야.”
“이제야 알아주시다니 섭섭할 따름입니다.”
리챠드의 호탕한 너털웃음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찝찝했던 기분이 지워질 찰나,
스텔라가 리챠드와 내 사이로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스텔라예요! 그쪽은 누구세요?”
“저택을 관리하는 리챠드 집샤밈이야.”
내가 리챠드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러자 입술을 삐쭉거린 스텔라가 리챠드를 향해 다시 물었다.
“리챠드 눈에도 제가 루나랑 똑같아 보여요?”
“두 분이 많이 닮으셨긴 했지만, 구분할 수는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구나…….”
목소리 톤이 확연히 낮아진 스텔라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말없이 곁에 있는 토리를 끌어안았다.
“스텔라?”
“치……. 토리, 나 저택 구경하고 싶어.”
명색이 주인공이라서 그럴까.
응석받이처럼 칭얼거리는 모습도 그리 미워 보이지 않았다. 사랑스럽다 못해 오히려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얼른 구경하러 가자. 응?”
스텔라가 계속해서 보채는 바람에 토리는 곤란해졌다.
“스텔라, 그건 소인이 정할 수 있는 게 아니…….”
“왜. 그런 게 어디 있어.”
스텔라가 표정을 구겼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망울이 찌푸려지자 토리는 더욱 가시방석이 됐다.
“어어, 스텔라 울지 마.”
“그런 걸로 안 울어.”
“그렇지만 표정이…….”
말주변이 없는 토리가 몹시 곤란한 기색을 보이자, 지켜보고 있던 리챠드가 나섰다.
“미안하지만, 스텔라 님. 토리 씨의 말대로 그건 불가합니다.”
“왜요?”
“이 저택의 주인이신 각하의 허락 없이는 외부 손님이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는 게 이곳의 철칙입니다.”
“허락만 맡으면 되는 거죠? 그럼 각하라는 분은 언제 오시는데요?”
또랑또랑한 스텔라의 되물음에 리챠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러게 말입니다. 각하는 아가님을 두시고 어디 가셨단 말입니까?”
“곧 오실 꼬에요. 아까 승마 연습이 끝났으니 마구간 뒷정리하고 오신다구 먼저 들어가라고 하셨꼬든요.”
때마침 이든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소란스럽군.”
무척 피곤해 보이는 낯빛이었다.
“오셨습니까? 양반은 못 되십니다.”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나?”
이든이 리챠드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승마용 조끼를 건넸다. 조끼를 챙긴 리챠가 비켜서자, 이든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후…….”
“저런. 내성 훈련은 내일로 미뤄 둘까요?”
“그럴 필요 없다. 예정대로 진행해.”
“고집은 정말 변함없으시군요.”
리챠드가 말을 아끼며 차를 챙기러 떠났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내성 훈련이랑 승마 연습 때문에 많이 피곤하시겠네.’
황실 연회를 앞두고 독에 대한 내성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황실에는…… 이든에게 특히나 치명인 ‘그것’이 천지일 테니까.
평소와 다르게 조금 흐트러진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게 신경 쓰였다.
“괜챠나요?”
“이리 와, 루나.”
이든이 눈을 감은 채로 내게 손짓했다.
“녜, 아빠.”
그가 앉은 소파로 쪼르르 다가가 안겼다.
나를 품 안에 소중히 끌어안은 이든은 잠긴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귓가에 울려 퍼지는 기분 좋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이든의 어깨에 볼을 가져다 댔다.
따뜻한 품에 있으니 다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괜한 생각 말자. 내게는 변함없이 든든한 아빠가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런데,
“아빠!”
……어?
우렁찬 목소리에 이든의 감긴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지금, 뭐라고…….’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게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왜? 루나 네 아빠시니까, 나도 아빠라고 부른 것뿐이야.”
그런 것치곤 어감이 이상했다.
마치 진짜 친아빠를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당당한 말투였는데.
“안녕하세요, 아빠. 저는 스텔라예요.”
이든에게 꽂힌 스텔라의 두 눈동자가 햇빛을 받은 여름 바다처럼 반짝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