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42)

87화

매월 5월 5일. 가정의 달 연회가 시작되면 황궁은 꼭두새벽부터 바빠진다.

무려 사흘 동안 진행되는 연회였다. 내빈들이 머물다가 갈 서궁의 마지막 점검이 한창이었다.

“모리스 대신관님, 일찍 나오셨군요.”

이번 연회의 총 책임을 맡은 다모아 던버르레 공작이 반대편 회랑에서 걸어오는 모리스를 발견했다.

“국가에 큰 행사 아니겠는가. 당연히 나와 봐야지. 확실히…… 큰 행사는 던버르레 공에게 맡기는 게 낫군.”

“들인 돈이 다를 테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연회 메인 장식으로 쓰인 백합은 모두 남대륙에서 수입해 온 것들이지요.”

파티장이 있는 본궁은 물론, 서궁 구석구석 백합 장식이 빠지는 곳이 없었다. 모리스는 코끝을 역하게 찌르는 꽃향기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 표정을 읽은 던버르레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고작 이런 걸로 안심하시니 대신관님께서도 나이를 드시긴 하셨나 봅니다.”

“던버르레 공작.”

“누가 알겠습니까? 이번 연회를 백합으로 장식한 이유가 대신관님의 괜한 염려 때문이란 걸…….”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는 것이네.”

예로부터 에덴 제국에 백합과 관련되어 전해져 오는 미신이 있었다.

‘백합을 지니고 있으면 수인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던버르레 공작은 그 미신을 믿지 않았다. 그가 믿는 것은 오로지 돈이 가진 힘뿐이었으니까.

“무엇이 대신관님의 마음을 심약하게 했을꼬……. 혹 태고신께서 드디어 예언을 내리신 겁니까?”

“공. 오늘따라 자꾸 선을 넘으려 하는군.”

모리스가 굳은 얼굴로 멈춰 섰다.

‘대신전에서 태고의 예언을 못 듣게 된 지 오래거늘.’

그간 예언 조작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어서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지만, 측근에 속하는 던버르레 공작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리아노 공작과만 따로 내통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건가?’

모리스는 던버르레의 표정을 살폈다. 그에게 있어 던버르레는 쓰기 좋은 패였지만,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리아노 공작과 달리 모리스는 던버르레를 백 프로 믿지 않았다. 황실 금고가 빈다면 금방이라도 등을 돌릴 자였다.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요 근래 그리시는 계획에 저를 제외해 두신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을 표한 것일 뿐이니.”

“괜한 짓 말고 연회 준비나 차질 없이 잘하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휙 돌아선 모리스가 회랑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어느 쪽이 더 돈이 되려나.

던버르레는 반지에 박힌 보석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 * *

정오의 기운이 꺾여 갈 때쯤, 황궁에 도착했다.

황궁은 일전에 방문했던 것과 또 다른 모습으로 빛났다. 각기 각층의 정재계 인사들이 몰려들었고 황궁인들은 몰려오는 내빈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리는 그 가운데, 아직 마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빠, 괜챠나요?”

“…….”

고개를 젖히고 비스듬히 마차 의자에 기댄 이든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식은땀이 맺혀 있는 걸 봤을 때, 대답과는 달리 몹시 괴로워 보였다.

“이렇게까지 백합을 온천지에 깔아 놓았을 줄은 몰랐습니다.”

리챠드가 코를 틀어막은 채, 마차의 커튼을 살짝 젖혀 창밖을 힐끗 살폈다.

사방이 백합 천지였다.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꾸며진 장식에서 지독한 꽃향기가 풍겨 왔다.

‘원작에서는 이런 묘사가 없었던 것 같은데.’

원래 꽃은 포인트 장식으로만 쓰이곤 했다. 하지만 이번 연회는 백합을 메인으로 장식한 것처럼 보였다.

‘왜 갑자기 장식이 바뀐 거지?’

내가 알고 있기로 이번 연회의 총 책임자는 던버르레 공작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자는, 모리스 대신관.

그냥 단순히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는 아닐 듯싶었다.

그가 무언가 눈치챈 걸까?

조용히 고통을 감내하는 이든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표정을 굳혔다.

“평범한 저도 이렇게 어지러울 정도로 향이 느껴지는뎨, 아빠는 더하시겠쬬?”

“아무리 평소에 내성 훈련을 하셨더라고 해도, 이 정도의 향을 한꺼번에 맡으셨다간…….”

“응급 처치할 방법이 없을까여?”

“혹시 몰라서 후각 마취제를 챙겨 왔습니다.”

리챠드가 가방에서 조그마한 알약을 하나 꺼냈다. 알약의 포장지에는 경고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저 알약이 무엇인지 안다.

‘후각 세포를 일정 시간 동안 마비시키는 아주 지독한 마취 알약.’

효과는 확실하나, 대신 부작용으로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약이었다. 강렬하게 마비시켜 주는 만큼 통증을 수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해결책이쟈나요. 중독성도 강하고요.”

“물론 저도 이걸 최선책으로 준비해 둔 것은 아닙니다. 이 상태로 나가실 수는 없으니,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하는 방법밖에 없지요.”

리챠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백합은 이를테면 ‘수인족 우두머리’를 구분하는 리트머스 종이 같은 것이었으니까.

‘이든이 지금 이 상태로 나가면, 수인족 우두머리라고 광고하는 꼴밖에 안 돼.’

대책은 필요했다.

똑똑,

그때 마차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챠드는 마차의 커튼을 아주 조금만 젖힌 뒤, 밖에 찾아온 이를 바라봤다. 황실의 마구간을 담당하는 하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실례합니다, 경. 송구하지만 라이언하트 가문의 마차가 현재 정차해 있는 곳이 마구간 길목이라서 말입니다.”

뒤창을 내다보니, 하인의 말대로 마구간에 들어가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마차가 여러 대 보였다.

“저런,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게 됐군요. 조속히 빼 드리겠습니다.”

“내리시면 저희가 정리해 두겠습니다. 마차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하인은 제 역할에 충실했고 친절했다.

하인이 마차 발판을 덜컥 내리고 문을 잡아당겼다. 동시에 리챠드가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겼다.

덜컥!

마차 문은 큰 소리와 함께 다시 닫혔다.

“경?”

“…….”

“혹시 마차 안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마차 문 너머로 의아한 목소리가 흘러 넘어왔다.

최악보다는 차악.

리챠드는 후각 마취 알약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 역시 이든에게 이것을 권해야 하는 상황이 내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리 줘.”

건조하게 눌어붙은 음성이 낮게 퍼졌다.

먼저 손을 내밀어 리챠드의 손에 들린 알약을 가져간 것은 이든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알약을 씹어 삼켰다.

까드득.

눈을 질끈 감은 리챠드가 얕은 한숨을 흘렸다.

어찌나 강한 약인지.

굳이 직접 먹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차츰 알약을 씹는 턱 근육의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까득.

약효가 벌써 돈 걸까.

예전에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약효가 빨리 도는 약일수록 부작용도 심하다는 것을.

“아빠…….”

조심스럽게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멈췄던 근육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까드드득.

목울대가 한차례 요동치며 힘겹게 약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넘기는 게 보였다.

“가지.”

이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반듯하게 정리한 표정으로 나를 품에 안고 마차에서 내렸다.

“본의 아니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딸아이가 칭얼거리는 걸 달래 주느라.”

이든이 마차 앞에서 기다리던 하인을 향해 말했다.

군더더기 없는 우아한 몸짓에 하인은 잠시 넋을 잃고 이든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치 빠르게 “가기 싫어어.” 하며 칭얼거렸고, 뒤늦게 정신을 퍼뜩 차린 하인이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부득이하게 백작님을 재촉하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럼, 마차를 부탁하지.”

“예, 맡겨만 주십시오.”

이든은 하인을 지나쳐 황궁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시선이 따라붙었다. 이따금 우리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하는 이들의 눈빛이 느껴졌지만, 그들은 미처 빠른 걸음을 멈춰 세우지는 못했다.

“괜챠나요?”

나는 이든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여 물었다.

“내 따님께서는 걱정이 많으시군.”

무덤덤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얼굴에 맺혀 있는 식은땀까지는 숨겨 줄 수는 없었다.

“일단 배정받은 방에 먼저 가서 쉬다가 나오는 게 좋게써요.”

나는 손을 뻗어 이든의 식은땀을 닦아 주며 말했다.

“내빈실을 배정받아 오겠습니다.”

리챠드가 빠르게 황궁인을 찾으러 떠났다.

“괜찮으니까, 인상 펴.”

이든이 곧은 손가락을 뻗어 내 미간 위에 톡, 얹었다.

“식은땀이 이렇게나 나는데 뭐가 괜챠나요.”

“금방 괜찮아질 거다.”

“미안해요. 죠금만 참아요.”

“내 따님께서는 본인 몫이 아닌 사과까지 즐겨 하시는군.”

그는 어떻게든 내 표정을 풀어 주고 싶어 했다. 그 노력 때문에라도 나는 억지스럽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정말 신성력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남을 도울 힘이 없다는 건 참 슬픈 일이었다.

기운이 빠져 있는데, 빨랫감을 잔뜩 든 하녀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얘, 그거 설마 빨랫방망이로 쓰려고 가져온 거니?”

“이거 이래 봬도 마스터피스 마켓에서 사 온 거야. 마따따비라고 바다 건너 동양에서 넘어온 나무래.”

“이름이 뭐 그래. 엄청 웃긴 이름이네.”

마따따비?

강렬히 고막에 꽂히는 이름에 고개를 획 들었다.

“이게 이름이 좀 그래도 바다 건너서 동양의 나라에서 온 거야. 그곳에선 신전 주위에 이 나무를 심는다나 뭐라나. 정화 작용이 끝내준대.”

“신전 나무를 가져다가 파는 건 불경한 행위 아냐? 그거 아무래도 사기 같은데.”

샛길로 향하는 하녀들의 등이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귓가에 박힌 그녀들의 목소리는 쉽사리 내게서 떠나가지 않았다.

마따따비 나무.

설마 내가 아는 ‘그것’일까?

콩닥콩닥, 심장이 서서히 가열되기 시작했다.

“아빠, 잠깐만여.”

나는 이든의 품에서 내려왔다. 내가 어딘가 가려고 한다는 걸 눈치챈 이든이 내 손목을 잡았다.

“어디 가려고.”

“확인해 볼 게 생겨써요.”

“혼자선 안 돼. 나도 같이 간다.”

“아뇨. 아빠는 여기 앉아서 쉬고 계세여. 금방 다녀올께여.”

“루나.”

나는 힘들어 보이는 이든을 벤치에 잠시 앉혀 두고, 홀린 듯이 그 하녀들이 간 곳으로 향했다.

내 달리기에 맞춰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침내 그 하녀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황궁 뒷문과 이어진 개울가에 쪼그려 앉은 그녀들은 빨랫감을 물에 적시고 있었다.

“아! 이게 왜 부서지고 난리람!”

“쯧쯧, 내 그럴 줄 알았다. 빨랫방망이로 쓰려면 크고 단단한 걸로 가져와야지. 하필 골라 와도 넌.”

“에이씨, 돈 아까워 죽겠네.”

텅! 텅그르르.

하녀가 내팽개친 부서진 나뭇가지가 데굴데굴 굴러 내 발 앞으로 굴러왔다.

나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쿵, 쿵, 쿵!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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