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갑자기 나타난 이든 때문에 놀라서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손을 내밀었다.
“일단 그거 이리 쥬세요.”
“…….”
다물린 입술은 더는 낯선 언어들을 내뱉지 않았다.
두 눈에 초점이 들어온 걸 보니, 이성의 끈이 다시 붙은 모양이다.
“쓰읍, 어서.”
재차 손바닥을 흔들자 오묘한 빛깔을 지닌 맹수의 동공 속 망설임이 속눈썹 끝에 걸쳐 파르르 떨렸다.
이든이 마지못해 미적미적 움직였다.
‘옳지 착하지, 우리 사자님.’
그가 마따따비 나뭇가지를 얌전히 돌려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챱.
……응?
내 손바닥에 올라온 것은 기다란 나뭇가지가 아니라, 보드랍고 쫀득한 그의 뺨이었다.
마치 자석처럼 ‘챱’ 하고 손바닥에 감기는 감촉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모 하시는 거예요?”
“젠장. 머리로는, 멈추고 싶은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
이든이 험상궂게 인상을 쓰며 거친 문장들을 쏟아 냈다.
하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덩치가 몇 배는 큰 남자가 마구 구겨 놓은 종잇장처럼 쪼그려 앉아서 조막만 한 손바닥 위에 볼을 부비부비 하는 모습이라니…….
무서울 리가 없었다.
“빌어먹을, 몸뚱이가, 왜, 말을.”
중간중간 끊기는 음성의 공백은 ‘그릉그릉’ 목울대 긁는 소리가 채웠다.
그러니까 이건.
“이게 바로 이 마따따비의 위엄이랍니다, 아가님.”
말을 쉬이 잇지 못하고 있는 내게 리챠드가 귀엣말을 속삭였다.
* * *
우리는 가까스로 상황을 수습하고 서궁의 내빈실로 돌아왔다.
“여기 얌전히 누워 계셔여.”
일단 급한 대로 껍질만 깐 마따따비를 하나 쥐여 주고 침대에 눕혀 놓았다. 만약 그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서궁을 뛰쳐나가려 한다면 부득이하게 잠시 묶어 놔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그는 반쯤 고분고분히 내빈실에 있었다.
여기서 ‘반쯤 고분고분히’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르릉, 그르릉.
그래, 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저 소리 때문이다.
껍질 깐 마따따비를 품에 소중히 안은 이든은 내 등에 대고 볼을 비비고 있었다.
“오. 이 모습을 녹화용 마법 도구에 담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습니다.”
리챠드가 챙겨 온 재료를 내 앞에 정렬해 놓으며 이든을 힐끔거렸다.
“그렇게 자꾸 쳐다보셨다간, 엉덩이의 안위가 위험해질걸여.”
부지런히 뜨거운 물에 식초 한 세 방울을 떨어트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전 아직 엉덩이와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러니까 부지런히 치료제를 만드는 걸 도와쥬셔야겠쬬? 말린 코끼리 똥 좀 잘게 빻아 쥬세요.”
“얼만큼 필요하십니까?”
“딱 한 꼬집만큼여.”
리챠드는 바닥에 두툼한 천을 깔고서 주먹 크기만 한 돌멩이로 콩콩콩 찧기 시작했다.
마른 덩어리는 쉽게 부서졌고, 리챠드는 금방 내게 가루를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건네받은 검은 가루를 식초 물에 넣었다.
잠시 탁해진 물은 화학 반응처럼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오.”
리챠드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재료들만 놓고 보면 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위생적인 조합이었다.
기포가 차츰 잦아들자 물은 처음보다 더 맑고 투명한 색으로 변해 갔다.
“됐써요. 이졔 마지막으로 마따따비를 넣어 두고 10분 뒤에 꺼내면 끝이에오.”
“여기 있습니다.”
리챠드가 냉큼 남은 마따따비를 내밀었다.
“지속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하나당 24시간 졍도 유지되니까 4개 정도 만들면 되겠녜요.”
그릇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하나씩 차례대로 넣었다 뺐다가를 반복했다.
특유의 향이 퍼졌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 같기도 했고, 들판의 바람 냄새 같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집중했을까.
한창 그 과정들에 몰두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방금 꺼낸 마따따비 나뭇가지를 스윽, 밀어냈다.
“루나. 내 따님.”
“녜, 아빠.”
“언제까지 그것만 보고 있을 거야. 응? 아빠랑 노는 건 어때.”
등 뒤에서 칭얼거리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이든은 괜히 내가 들고 있는 마따따비를 슬쩍 밀거나, 커다란 손으로 내 시야를 가리는 행동을 했다.
그것들이 마치 주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알짱거리는 고양이처럼 보였다.
‘더 지체했다간 진짜 큰일 나겠네.’
나는 잽싸게 치료제로 만든 마따따비를 손수건에 돌돌 말아 이든의 안주머니에 넣어 줬다.
더는 그가 뺨을 비비며 보채지 않게 되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고장 났던 이든의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괜챠나요?”
생기를 되찾은 호박색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이든은 말없이 내 이마에 입술을 짧게 맞추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역시 우리 아가님께서는 천재십니다. 효과가 확실하군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리챠드가 내뱉는 감탄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이든의 고개가 그에게로 돌아갔다. 어쩐지 눈빛이 살벌했다.
“리챠드.”
음산한 부름에 리챠드가 몸을 흠칫 떨었다.
호박색 동공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는 게 또렷하게 보였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리챠드가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섰다.
“각하, 무엇을 생각하시든 오해십니다. 일단 제 말부터…….”
까닥, 까닥.
정제된 손가락질 두 번에 리챠드가 나를 바라봤다.
반짝반짝 쏟아지는 구조 요청 눈빛을 보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에효. 못 살아.
“리챠드, 네 노잣돈은 두둑이 챙겨 주지.”
흐익, 놀란 리챠드가 다급히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마따따비 두 개를 들어 올려 십자가 모양으로 겹쳤다.
“사랑합니다, 각하.”
“입 다물고 이리 와, 리챠드.”
“각하를 사랑하지만 그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아가니임! 애처로운 비명 위로 내 한숨이 쏟아졌다.
이 똥꼬발랄하신 분들이 내 보호자라니. 어쩐지 이번 에피소드가 조금 걱정됐다.
아이고, 이 아까운 치료제들. 나는 대꾸하는 대신 땅에 나뒹구는 마따따비 치료제를 하나씩 줍는 데 집중했다.
“아가니이이임!”
그리 넓지 않은 방 안에서 우당탕탕 뜀박질이 펼쳐졌다.
이곳에서 제일 어린 건 나인데, 어째서 저 두 남자의 정신 연령이 더 어린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입술을 열었다.
“두 분 다 그만.”
작은 목소리였지만, 두 남자가 멈춰 섰다.
“아빠.”
나지막이 부르자 이든의 시선이 내게 옮겨졌다. 리챠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 등 뒤로 슬쩍 숨었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위험하게 창문에서 뛰어내리시면 안 돼여.”
“나한테는 위협적인 높이가 아니었다.”
“그게 요점이 아니쟈나요.”
등 뒤에 선 리챠드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한마디 거들었다.
“아가님께서는 각하가 혹여라도 다치실까 봐 걱정하시는 것이죠.”
조만간 엉덩이랑 안녕 하시겠네.
곧장 사나운 눈빛이 리챠드에게로 향했다. 그는 놀란 거북이처럼 다시금 내 등 뒤로 얼굴을 숨겼다.
“나는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이보다 더 높은 곳에서도 충분히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게 고양잇과에 속한 그의 능력이긴 하다만.
“자꾸 그러면…….”
양팔을 단단히 꼬고서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아빠 따라 할 꼬야.”
“뭐?”
“부모는 쟈식의 거울이래써요. 나도 아빠 따라서 높은 곳에서 폴짝,”
‘―할 거예요.’ 돌연 나를 와락 끌어안은 이든 때문에 뒷말은 맺어지지 못하고 목구멍 뒤로 삼켜졌다.
“안 그러겠다. 그러니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
쿵, 쿵, 쿵! 널따란 가슴팍에서 불안으로 요동치는 그의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깜짝이야.’
이든은 두려울 게 없는 남자였다.
그간 숱하게 지나쳤을 죽음의 그림자에 눈 하나 깜짝 않던 그가 두 무릎을 꿇고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언제부터 사자님은 이렇게 겁이 많아지신 걸까.
무릇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자는 그만큼 겁도 많아지는 법이었다.
나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빌런들이 이 빈틈을 눈치채고 아빠의 발목을 잡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의 계략을 밝혀 다 처단해야겠노라고.
“쟈, 얼른 약속해요.”
이든의 앞으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황궁에 머무는 사흘 둉안에는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겨도 계단으로만 다니기.”
“그래.”
그는 고민도 없이 고분고분히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꽃도 죠심하기.”
“무엇이든 네 뜻에 따르겠다.”
이든이 나를 품 안에 소중히 안고 속삭였다.
휴, 가까스로 두 남자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흘간 이든의 후각을 백합 중독으로부터 지켜 줄 치료제도 만들어 뒀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건으로 뛰어들 때였다.
“리챠드, 오늘 일졍은 어떻게 돼요?”
“연회 첫날이라 공식적으로 정해진 일정은 저녁 만찬 외에는 없습니다. 그 외의 시간은 서궁에 한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도 된다는 황제의 명이 있었다 합니다.”
금세 장난기를 지운 리챠드가 가정의 달 연회 일정을 일러 주었다.
첫째 날 성대하게 열리는 저녁 만찬회는 마지막 날의 특별 만찬과 달리 초대받은 모든 이들이 참석할 수 있다.
그 말인즉슨, ‘그놈’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
나는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건너편에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별채가 눈에 들어왔다.
황제가 대신관에게 특별히 하사한 공간이었다.
‘드디어 만나네, 이든의 원수.’
이든도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예리하게 변하는 눈빛이 사나운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럼 저녁 만찬 전까지 두 분이서 쉬고 계십시오. 저는 함께 데려온 야생마의 컨디션 확인을 위해서 마구간에 다녀오겠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리챠드가 문에 다다른 순간,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우리는 동시에 시선을 교환했다.
딱히 살갑게 안부 인사나 나누며 노닥거릴 귀족가는 없었다.
그렇기에 문밖에 찾아온 이가 누구든 우리에게 불청객일 게 뻔했다.
똑똑.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다시 한 차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온몸의 감각이 곤두세워졌다.
“리아노 공작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리아노 공작가에서 보내온 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