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내빈실로 들어선 하인이 가져온 커다란 나무 상자를 내려놓았다.
“약속한 승마 대결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대결 장소는 황실 측에 허락을 구해 승마장을 빌려 놓았으니 준비되시는 대로 오시면 됩니다.”
“가져온 건 뭐지?”
“각하께서 아량을 베푸셔서 특별히 마법 고삐를 빌려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상자를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리아노 공작가의 인장이 커다랗게 박혀 있는 마법 고삐가 있었다.
‘사람 놀리는 건가?’
묘하게 투지가 불타오른 나는 상자의 뚜껑을 도로 닫아 버렸다.
“아뇨, 도로 가져가세요. 그런 거 필요 업쓰니까.”
“후회하실 텐데요. 라이언하트가의 체면을 생각해서 로얄 클럽의 멤버들만 대결에 참관 가능하게 해 놓기는 했지만……. 보는 눈을 생각하셔야지요.”
“그런 거 없이도 해내는 거 보여 드린다고 했쟈나요.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뎨요. 참관 조건을 전체로 바꾸는 건 오때여?”
“예?”
하인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명색에 가문의 명예를 걸고 하는 대회인데 장비를 마다하는 데다가, 굳이 판을 키우고 있으니…….
그 의중이 궁금했을 것이다.
“기왕이면 황졔 폐하도 불러 주시면 더 좋구여.”
“아니, 도대체 그리하시는 연유가…….”
“좋은 건 같이 봐야죠.”
“네?”
의아해하는 하인에게 대답 대신 그저 조용히 미소 지어 줬다.
빌런 뚝배기 깨지는 건, 혼자 보기 아깝잖아?
* * *
가정의 달 황실 연회는 일반 연회에 비해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서궁에 한해서 공식 일정 외의 시간 동안 자유롭게 이용도 가능했다.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다면서요?”
“이번에 리아노 공작가와 라이언하트 백작가가 가문의 명예를 걸고 대결을 한다더라고요.”
“다시없을 구경거리네요.”
일찍이 입궁해 저녁 만찬회 전까지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던 귀족들은 소식을 듣고 황실의 경마장으로 몰려왔다.
서궁에 붙어 있는 황실 경마장은 황제의 취미 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푸르르르―.
오늘의 주인공인 야생마가 승마장으로 나오자, 몰려온 구경꾼들의 이야기 소리가 점점 커졌다.
‘오늘 지면 두고두고 회자되겠네.’
나는 승마 장비를 착용하는 이든의 옆에서 관람석을 바라봤다.
어느덧 제법 구경꾼이 찼다. 모두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지만, 은근한 흥미로 상기되어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오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귀빈 맞이로 한창 바쁠 시간이라 황제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대신 자리를 차지한 자는 의외로…….
못 박힌 듯이 한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든에게 작게 속삭였다.
“모리스 대신관도 올 쥴 몰라써요.”
“황궁은 저자의 주요 활동 영역이니까. 그러리라 예상했다.”
“괜찮으세여?”
“…….”
말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내게 눈높이를 맞춘 이든이 내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핏줄이 불거져 나온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가 내뱉는 깊은 숨결 속에 뿌리내린 지울 수 없는 울화가 느껴졌다.
“……내 딸과 약속했으니까.”
나지막이 고막 위로 내려앉은 울림이 내게 속삭였다.
‘반드시 이겨서 잘못된 것을 고치기로 약속했으니까. 기필코 그들에게 복수하기로,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약속을 믿고 참겠노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서로에 대한 신뢰에 코끝이 찡했다.
“열심히 응원하께요.”
쪽. 그의 목을 끌어안고 볼에 짧게 입술을 맞췄다.
“…….”
잠시 시간이 멈췄다.
맹수의 눈동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온기를 갖게 됐을까.
다정한 눈빛을 건넨 이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치지 말고 무리하지 말고 잘하고 오세여.”
“내 따님의 명령이니 당연히 그리해야지.”
때마침 다가온 리아노 공작이 나와 이든을 번갈아 보았다.
“준비됐는가? 듣기론 내 성의를 거절했다고 들었네만. 아, 그 교감이라는 걸 보여 준다고 그랬던가.”
그 오만함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겠소. 코웃음 친 리아노 공작이 흑마에게 다가갔다.
“오오! 리아노 공작 쪽에서 먼저 시범을 보일 생각인가 봅니다. 이거, 시작도 전에 상대 기를 꺾어 버리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저게 그 어떤 짐승도 복종시킨다는 마법 고삐라던가요?”
“이번 대회의 결과를 보고 저 마법 고삐의 판매권에 대해서 한번 논해 봐야겠습니다.”
관람석에 앉은 귀족들은 모두 리아노 공작이 우세할 거라고 떠들었다.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들 대부분이 로얄 클럽의 멤버였다.
‘저것도 리아노 공작이 시킨 거겠지?’
상대를 위축시켜 아예 망쳐 버리게 만들려는 고도의 심리 기술.
미안하지만 그런 것쯤은 우리를 무너트릴 수 없었으며,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리는 더한 것을 준비했으니까!
히히히힝!
요란한 투레질 소리에 시선이 집중됐다.
리아노 공작이 마법 고삐를 붙잡고 야생마와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야생마는 우리 저택에서 머무는 일주일 동안 리아노 공작가에서 사용하던 장비들을 빼 놓은 탓에 다시 착용시켜야 했다.
“이, 짐승이, 왜!”
그는 채신머리도 잊은 채로 야생마의 목을 부여잡고 낑낑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야생마는 더욱더 격렬하게 몸을 비틀면서 고삐를 채우려는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히히히힝!
“뭐죠,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그러게 말이오. 크흠, 야생마 상태가 왜 그러는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리아노 공작이 말 위에 오르기는커녕, 고삐 하나도 매지 못하자 웅성거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내 생각대로야.’
우리는 모든 순간을 잠자코 지켜봤다.
상황이 내가 그렸던 대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고서였다.
끝내 야생마에게 고삐를 채우지 못한 리아노 공작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으르렁거렸다.
“대체, 무슨 헛짓을 해 놓은 것이오?”
“그게 무슨 소리세여?”
“멀쩡히 잘 씌워 놨던 남의 고삐를 풀어 버린 것도 모자라서, 뭘 해 놨기에 고분고분했던 짐승이 저렇게 된 것이냐 물었소.”
“뭘 하긴요. 그냥 잘 먹이고 포둉포둉 찌운 것밖에 없는뎨. 그쵸, 아빠?”
“삼시 세끼 특식을 먹이고 산책을 시켰을 뿐.”
“마쟈요. 우리는 사랑만 듬뿍 줬써요!”
기력을 되찾은 야생마가 온 힘을 다해서 반항을 하니, 나이 든 리아노 공작이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황실이라 멋대로 마법을 쓰지도 못할 테니 속이 꽤 뒤집힐 거야?’
꽉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리아노 공작 측은 야생마에게 고삐는 물론이고 아직 안장까지 채우지 못했다. 흑마가 일말의 손길조차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공쟉밈의 방법대로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우리 먼져 보여 드려도 되져?”
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리아노 공작을 지나쳐서 야생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쵸코!”
짧은 부름에 흑마의 고개가 내게로 향했다. 생기가 흘러넘치는 까만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푸르르르!
마치 내 부름에 대답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관람석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니, 마법 고삐도 없이 저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 그저 우연이겠지요!”
“아니, 그보다 초코……라니? 짐승에게 이름을 붙이다니, 이 무슨 남사스러운.”
웅성거림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야생마를 향해 팔을 벌렸다.
“쵸코, 이리 와!”
히히힝!
야생마는 곧장 내게로 걸음을 옮겨 왔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갈기가 휘날리며 점점 다가올수록 관람객들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착하지, 쵸코. 고삐를 찰까?”
말이 순순히 머리를 내주었다.
“세상에!”
고작 네 살짜리 어린애 앞에서 온순하게 구는 야생마의 모습에 관객들은 입을 쩍 벌리고 경악했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야생마가 원래 저렇게 순한 짐승이었던가?’
‘애초에 마법 고삐 없이 저게 가능한 일이었어?’
술렁거리는 관람석 틈에서 들려온 어떤 이들의 대화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어 놨다.
“생각해 보니 대신전 벽화에 비슷한 게 그려져 있지 않았소? 그 왜, 건국 신화 중 북방의 검은 말이 유일하게 동료로 받아들인 영웅이 있었다는…….”
그 영웅이 환생한다면 바로 저런 모습인 것 아니오?
함께 온 일행이 “이봐.” 하며 눈치를 준 탓에 남자의 목소리는 차츰 기어들어 갔다.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한곳을 의식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모리스 대신관이었다.
리아노 공작이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이는 모리스 대신관에게로 급히 다가갔다.
“리아노 공. 굳이 내게 시간을 내라고 한 이유가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나?”
“저들이 얕은 속임수를 쓴 것 같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마법을 사용해 헛소문을 속히 정리하도록 하겠습니,”
“공께서는 이곳이 황실이라는 걸 잊었는가?”
싸늘한 음성이 리아노 공작의 말을 끊어 냈다. 모멸감에 얼굴이 붉어진 그가 우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직 승마 대결은 시작도 안 했습니다.”
이를 바드득 가는 그를 보며 콧방귀를 흥, 뀌어 줬다.
“탈 수는 있게써요?”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마법 고삐 없으시면 타는 것듀 못 하실 거 같은뎨. 아닌가? 우리 아빠는 그런 것 없이도 가능하시거든여. 그쵸, 아빠?”
이든이 가벼운 몸짓으로 단숨에 야생마 위로 올라탔다. 한 폭의 그림처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는 모습에 관객석에서 부지불식간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혼자 힘으로는 일어서지도 못하는 자에게 달리기 시합을 하자는 꼴과 다를 게 없군.”
야생마를 몰고서 유유히 리아노 공작 앞으로 다가간 이든이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존심이 팍 상한 리아노 공작의 주먹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깟 것, 당장에라도 보여 줄 수 있으니 내려오시오.”
분개를 참지 못한 그가 야생마의 목에 손을 대려던 순간.
히히히힝!
얌전했던 말이 발을 높게 쳐들면서 리아노 공작의 비실비실한 옆구리를 발로 퍽! 차 버리고 말았다.
“크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리아노 공작이 쓰러지고, 승마장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아이코, 저런.”
나는 겉치레처럼 탄식을 뱉었다.
맹세코 내가 시킨 것은 아니다. 순순히 야생마의 의지로만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제법 속이 후련해서 으흥흥흥, 웃음을 터트렸다.
‘초코한테 빌런 옆구리 브레이커라는 칭호를 줘야겠어.’라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