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42)

91화

사색이 된 시중들이 리아노 공작에게 달려갔다.

“세상에! 저 말이 미친 것 아니오?”

“신전에서 말하길, 광마병이 유행이라더니…….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할 성싶소!”

관객들은 불안으로 떨었다.

야생마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흠칫거리는 게 보였다.

사실상 가문의 이름을 건 승마 대결의 승자가 이미 결정된 시점이었다. 리아노 공작이 다친 허리로 말에 올라탈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물론 허리를 다치지 않았더라도 초코가 자신의 등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어찌 됐건, 일단 첫 목표는 달성이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바로, 우리가 일주일간 이를 갈며 준비해 온 것을 보여 줄 시간이었다.

황실 연회에 오기 전 했던 작전 회의가 떠올랐다.

[이번에 승마 대결의 목표는 단지 승리뿐은 아니에여.]

[승마 도구를 상용화시키려는 거겠군.]

[맞아요. 이렇게 죠은 사업 기회를 놓칠 순 없쬬!]

[네가 좋다면 무엇이든 찬성이다. 준비해야 할 것을 미리 알려 주도록.]

[녜. 각자 역할을 알려 드릴께요. 그리고 또 중요한 게 있는뎨…….]

나는 이든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것이 우리 작전의 신호가 되었다.

“미치긴 누가 미쳤따구.”

내 신호에 맞춰 이든이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승마를 선보였다. 얼마 전에 다친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빈틈없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승마장에까지는 백합 장식이 없어 그는 더욱 쌩쌩했다.

푸르르르―.

포동포동 살이 오른 야생마도 라이언하트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새 승마 도구와 어우러져 아주 근사한 태를 뽐냈다.

“오, 세상에…….”

이번에는 다른 의미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나는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대신관 앞으로 총총총 걸어갔다.

“어때여? 대신관밈이 보시기에도 이 말이 미친 것 같아여?”

야생마가 뒷발로 흙을 긁어모아, 바닥에 쓰려져 끙끙거리는 리아노 공작에게 걷어찼다. 졸지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콜록거리는 리아노는 귀족들의 빈축을 샀다.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 본디 윗사람을 대할 때는 예를 먼저 갖춰야 함을 아직 모르나 보군.”

대신관은 가소롭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지금 실컷 비웃으라지.

나는 그가 엉뚱한 것으로 책잡지 못하도록 네 살짜리 아기가 해내기에 꽤 어려운 귀족식 인사를 훌륭하게 해내 보였다.

“라이언하트 백작가의 루냐 라이언하트가 천지를 챵조하신 유일신의 대리인이쟈, 그의 택하심을 받은 선지자를 뵈옵니댜.”

“…….”

표정이 참 가관이었다.

대신관은 조용히 주먹만 말아 쥘 뿐. 내게 어떤 트집도 잡지 못했다.

“오, 과연 라이언하트 영애요. 명석하다는 소문이 참이었군요.”

“모두 부친의 영향 아니겠어요? 저리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시는 분이니, 영랑께서도 반짝반짝하시는 게지요.”

나는 이든과 나를 칭찬하기 바쁜 이들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당당히 모리스 대신관의 앞에 나섰다.

“대신관밈께 아뢸 말씀이 있었는뎨, 마침 이렇게 만나 뵙게 된 김에 간언 하나 올려도 될까여?”

예사롭지 않은 단어 선택에 사람들은 연신 감탄이 흘려 냈다. 분위기가 분위기이니만큼 타인의 추종을 먹고사는 대신관은 내 말을 거부하지 못했다.

침음을 얕게 뱉어 낸 그가 눈을 치켜떴다.

“……무엇이지?”

“대신젼에서 요즘 잘못된 죠사를 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여.”

“잘못된 조사라니. 지금 내가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인가?”

“왜 이로케 예민하게 구세요? 사람은 누규나 실수할 슈 있는 건뎨.”

“무어라?”

분개한 얼굴 위로 붉은 기가 돌았다.

“낙마 사고가 늘어난 건, 말들이 미쵸서가 아니라, 쟐못된 승마 도구 때문이에여.”

“영애의 말은, 시중에 판매되는 승마 도구 탓에 말들이 폭력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증명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럼 리아노 공쟉밈께 이 마법 고삐를 씌워 볼까여?”

내가 리아노 공작가의 마법 고삐를 가져와 눈앞에 들이밀자, 리아노 공작이 기함하며 자지러졌다.

“무엇 하는 게냐, 저리 치워!”

그는 내가 혹여라도 진짜 고삐를 씌울까 봐서, 필사적으로 허공에 주먹을 휘둘러 댔다.

‘손버릇이 이렇게 나쁘셔야 쓰겠나.’

우아하게 야생마에서 내린 이든이 리아노 공작으로부터 나를 보호한 덕분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 열심히 구제 활동을 하면서 쌓았을 그의 이미지에 실금이 가고 있다는 걸,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이거 봐여. 고귀하신 귀족도 이렇게 폭력적으로 변하게 만드는뎨, 말이라곤 오죽하게써.”

“시중의 용품들은 죄다 상처를 내고 고통을 주는 것들뿐이니, 말 못 하는 동물들이 표현할 방법은 그 길밖에 없던 것이지.”

이든은 나를 품에 안으며 내 말을 거들었다.

본격적인 쇼 타임이었다.

“하지만 내 따님께서 그 해결책을 발견했다. 비효율적이고 야만적으로 제국의 말들을 다 도살시키지 않으면서도 낙마 사고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바로바로, 메이드 바이 라이언하트의 승마 도구랍미댜.”

짜잔, 하며 벤 쟝이 만든 새 디자인의 고삐와 박차, 안장을 내보였다. 마치 눈앞에서 홈쇼핑의 장면을 재현하듯 물건의 장점과 기존 것과의 차별점을 알려 주니, 모두 홀린 것처럼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어릴 적 읽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한 ‘해와 바람 이야기’ 동화를 인용해서 설명하니 사람들은 더 쉽게 내 주장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새로운 디자인은 말의 고통을 덜어 줄 뿐만 아니라, 말과 유대감을 쌓을 수 있게 된답미댜.”

“그럼 영애가 보여 줬던 것처럼 북방의 야생마의 아양 떠는 모습도 볼 수 있는 건가?”

누군가의 질문이었다.

“그건 츄르 당근의 힘도 필요한 건뎨. 츄르 당근 사실 분?”

“내가 사겠소!”

“우, 우리 가문도!”

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난 장사에 재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야생마에 관심이 지대한 남자 둘이 앞다투어 내게 다가왔다.

“예약제로 제작 판매를 할 것이니 관심 있는 사람은 보좌관을 통해 연락하도록.”

이든이 리챠드 쪽을 눈짓하니, 리챠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귀족들을 향해 핑크 수첩을 흔들어 보였다. 물론, 모두 사전에 계획된 연출이었다.

“에잇, 기분이댜! 사젼 예약 하시면 야생마의 마음도 사르르 녹일 수 있는 츄르 당근을 서비스로 드리겠슴미다!”

주머니 속에서 츄르 당근을 꺼내 보이자, 야생마 초코가 ‘히히힝!’ 기뻐하며 내 얼굴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감탄을 터트렸다. ‘내가 알던 그 악명 높은 북방의 야생마가 맞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 표정에서 다 드러났다.

“예약하겠어요.”

관람석에서 터져 나온 여성의 목소리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얼굴을 보니 우리 츄르 가게에 매출을 올리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니도 백작가의 영애였다.

참고로 라이언하트가의 정보통에 의하면 니도 백작은 사교계에서 꽤 힘이 있는 편이다.

“자네, 할 건가?”

“당연하죠. 저는 라이언하트가의 츄르를 알게 된 이후로 삶의 질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몰라요.”

“왜 아니겠어요. 릴까스는 제 삶의 낙이라니까요. 저 범상치 않은 승마 도구를 좀 보세요. 이번에는 또 어떤 유행을 불러일으킬지 참으로 기대가 된다니까요.”

니도 백작 영애가 움직이니 그녀의 측근들도 줄줄이 나섰다.

영애들이 적극적으로 굴자, 가만히 앉아 점잔 떨고 있던 남자들도 슬그머니 줄을 섰다.

딱 우리가 원하던 그림이었다.

나는 눈매가 가늘어진 모리스 대신관 앞으로 나아갔다. 마지막으로 가장 원하던 바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대신젼의 마차에도 쓸 수 있게끔, 라이언하트표 승마 도구를 지원해 드릴께여.”

“공물로 바치는 것일 터이니…… 달갑게 받겠다.”

그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대놓고 거절하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승마장의 분위기를 우리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게임판이 우리 손바닥 위에 있게 됐네?

체크메이트를 외칠 시간이었다.

나는 미소 띤 얼굴로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말했다.

“대신 비스 전역의 말을 도살하겠댜는 결정은 물러 쥬시고, 제게 문제가 있는 말들을 보살필 권한과 검투쟝의 소유권을 쥬세요.”

리챠드에게 승마 도구를 예약하던 귀족들이 멈칫했다.

다소 예민할 수 있는 주제였기에 그들은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걸로 무엇을 할 생각이지?”

“마음이 다친 말들을 치료해 쥬는 곳을 만들 꼬에요.”

“라이언하트 영애가 직접?”

모리스 대신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내 속을 가늠해 보려는 듯 나를 면밀히 살폈다.

사실상, 모리스 대신관이 말을 집단 도살해서 얻는 이익은 딱히 크지 않았다. 그는 단지 연막작전으로 쓰기 위해 ‘광마병’ 운운하며 말들을 처리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라이언하트 가문에서 광마병을 해결하겠다고 나섰다’는 소문으로도 충분히 그가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이슈든 간에, 그 파급력이 크기만 하다면 몰래 대신전의 벽화를 바꿔놓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머리 굴려 봤자, 내가 가진 수를 알 수는 없을 거야.’

나는 미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뇨. 적임쟈는 이미 생각해 두었쬬. 아직 본인한테 물어보진 못했지만……, 아마 좋아할 거 같긴 하녜요.”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에 대체 어느 정신 나간 자가 동참한다는 말인가!”

바닥에 참 못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 리아노 공작이 목에 핏대가 서도록 외쳤다.

나는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공작님 딸이요.”

승마장 내에 또 한차례의 큰 파란이 일었다.

* * *

공작에게 딸이 있었소?

왜, 모르십니까? 공작 부인의 수발을 들던 하녀에게서 낳은 사생아를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잖아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요.

모두 쉬쉬하고 있지만 이미 이 저녁 만찬에 초대된 이들의 입에는 한 번씩 오르내린 주제였다.

공작 부인의 수발을 드는 평민 출신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셀리 리아노.

리아노 공작이 평생을 꽁꽁 유폐하다시피 했을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자,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쉬잇, 저기 리아노 공작가의 후계자가 옵니다. 다들 입단속 하시오.

“크흠!”

그들은 포크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곁눈질로 차기 리아노 공작가 후계자로 알려진 노아의 움직임을 좇았다.

“루나!”

이윽고 그가 향한 곳이 어디인지 확인하고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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