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노아를 보고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이유를 안다.
서류상이긴 하지만, 명색의 아버지를 망신 준 가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자식 된 도리가 아니라고 여길 테니까.
“역시…… 친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직 완전한 귀족으로 거듭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지요. 뭐, 원래 태생부터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긴 하다만.”
부채로 입을 가리면 뭐 하나. 목소리는 뻔히 다 들리는데.
나는 노아를 평가 내리며 흉을 보는 귀족 부인들을 샐쭉 노려보았다.
다 아는 얼굴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이든에게 치근덕거렸던 그 작자들이었다.
‘겉으로는 고귀한 척 구는 사람들이 꼭 속이 더 썩었다니까.’
남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충당시키려는 자들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타인을 자기 발아래 둔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도 아닌데.
왜 자신이 남보다 더 낫다는 우월감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하는 걸까.
배운 건 많을지언정, 정작 마음이 비어 있는 이들이 안타까웠다.
‘나’는 남보다 나아서 소중한 게 아니라, 그냥 ‘나 자체’로도 하나뿐인 귀중한 존재인 것인데.
나는 그들에게 보란 듯이 노아의 손을 꼭 잡았다.
“왔써, 뇨아?”
“응. 보고 싶었어, 루나.”
그간 열심히 배운 건지 노아가 귀족식 인사대로 조그마한 내 손등 위에 입술을 쪽, 맞췄다.
내심 이곳에 관심을 두던 귀부인들이 우리를 보고 “어머머, 요즘 애들은 참.” 하며 괜히 부채질을 해 댔다.
반면 대부분은 우리의 풋풋한 모습에 소꿉놀이를 보듯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예절 수업을 열시미 들었나 보녜?”
“루나 너를 웃게만 할 수 있다면 뭐든 배울 수 있어.”
얘가. 못 하는 말이 없네.
내 손등 위로 닿는 따뜻한 온기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오래도록 머물렀다.
나에게만 맹목적으로 따라붙는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쉽게 시선을 놓아주지 않을 듯한 그 눈빛에는 은근히 집요한 구석도 있었다.
이제 진짜 주인공 후광이라는 건가.
잠시 홀린 듯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나의 시간이 억겁처럼 흘렀다.
“하하하. 미래의 잉꼬부부가 여기 있었구나.”
홀 전체에 호탕하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그 끈질긴 보라색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돌아보니 만찬회에 들어선 황제가 나와 노아를 보고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홀에 있던 이들이 일동 기립해서 예를 갖췄다.
“오랜만에 보는군,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
“창죠신의 무한한 영광과 축복이 당신의 발아래 깃들기를. 제국의 지고하신 태양, 황졔 폐하를 뵙슴미다.”
“제국의 지고하신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리아노 공작가의 노아입니다.”
옆에 서 있던 노아도 함께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조금 서툰 구석이 있어도 황제는 우리에게 무한한 미소를 베풀었다.
“리아노 공이 아주 영특한 아이를 데리고 왔구나.”
“라이언하트 영애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요.”
“하하하. 제법이야. 자신의 레이디를 높일 줄도 알고. 벌써 신사의 자질은 다 갖추었어.”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하.”
황제는 즐거운 얼굴로 노아에게서 내게 시선을 옮겼다.
“특히나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겠어, 이번 연회는.”
“녜?”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연회가 시작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짐의 귀에 벌써부터 영애의 소식이 들리고 있어서 말이야.”
아. 리아노 공작과의 내기를 말하는 거구나.
“그져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내기한 고에요.”
“가문의 영광을 걸었다지?”
“멀리 놓고 보쟈면 약자의 행복을 위해서여.”
황제의 두 눈이 온화함으로 물들었다.
“대신관에게 비스 전역에 내린 말 도살 명령을 거둬 달라는 것과 다페 남작의 검투장 소유권을 넘겨달라는 청을 했다고 들었다.”
“녜, 대답은 아직 못 들었슴미다.”
비어 있는 대신과 자리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신관은 끝끝내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거절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생각해 보겠노라 말하고 성난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하는 리아노 공작을 매몰차게 버려 두고 말이다.
“영애는 떼를 쓰지 않는군. 검투장 소유권이 갖고 싶지 않았던 건가?”
“그건 아님미다. 대신관밈에게도 생각할 시간은 필요하시겠죠.”
보나 마나 우리가 무슨 꿍꿍이로 그런 얘기를 하는 건지 뒤를 캐낼 시간을 벌려는 거겠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한 것을 달성할 생각이었으니까.
얌전히 때를 기다리는 것은 내 전문이었다.
나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무언가 좋은 수를 떠올렸는지 빙긋 웃었다.
“하면 짐이 허락을 내리겠다.”
“……녜?”
이번에는 정말 나도 깜짝 놀랐다.
허락을 내리겠다니?
설마, 검투장 소유권을 말하는 거야?
귀동냥으로 대화를 훔쳐 듣던 귀족들도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고 멈칫했다.
“대부로서 주고 싶은 첫 선물이다. 부족한 것 같다면 다른 것도 고려해 보도록 하지.”
“폐하!”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어지러워진 홀의 분위기만큼이나 머릿속이 혼잡해졌다.
‘내…… 대부가 되어 주겠다고?’
물론 스치듯이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만, 그에 관해서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진짜로?’
얼떨떨한 마음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을 보니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 났다.
“말하지 않았던가. 짐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지만 진짜로 해 쥬신다고 할 줄은 몰랐써여.”
“제국의 번영을 위해 이리 힘쓰는 아기를 마다할 이가 어디 있겠느냐. 짐은 그리하기로 선택했으니, 영애의 의견을 듣고 싶구나.”
이쯤 되면 아빠가 한 소리를 할 때인데.
문득 이든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노아가 내 손등에 입술을 맞췄을 때부터 이미 나서고도 남았어야 할 그였다.
‘웬일로 잠잠하시지?’
무심코 그가 있는 자리를 돌아본 나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빠!”
식탁 위로 거의 엎어지다시피 기대고 있는 이든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
얕게 떨리는 호흡.
백합 중독증의 초기 증세랑 흡사했다.
‘마따따비 효능이 다 된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에 지속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모든 것을 시야에 담았다.
그리고 이든의 접시 위에 담긴 먹다 만 음식.
예쁘장한 모양으로 그럴듯하게 플레이팅 된 크림 푸딩 위에 샛노란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 가루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저 가루……!’
마따따비가 후각적인 중독을 막아줄 수 있을지 몰라도, 직접적으로 먹게 된다면 말이 달라졌다.
“폐하, 저……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슴미다. 피곤해서여.”
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눈에는 오직 이든의 상태만 눈에 들어왔다.
“허허허. 그래, 한창 잠이 많을 나이지.”
다행히 황제는 자리를 비우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나는 최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아빠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급히 리챠드를 호출했다.
무르익어 가는 만찬의 분위기 때문인지, 이든을 데리고 홀에서 무사히 벗어날 때 동안 이든의 상태를 묻는 이는 없었다.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 * *
“괜챠나요?”
내 물음에 소파에 몸을 기댄 이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급히 속을 게워 낸 덕분에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
창밖은 어느덧 어둠으로 물들었다. 서궁의 복도가 조용한 걸 보니 저녁 만찬을 끝낸 귀족들이 각자 배정받은 내빈실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듯싶었다.
“푸딩에 장식으로 뿌린 것이 꽃가루라고 합니다. 아마 백합 계열이 아닐까…… 추측 중입니다.”
“많이 삼키지 않아서 다행이에여. 왕챵 먹었으면 거기서 패닉 상태가 왔을 테니까.”
나는 소파에 걸터앉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의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안색이 창백한 와중에도 내가 힘들까 봐 걱정됐는지, 이든이 내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괜찮다.”
“아빠가 아플 때 옆에서 돌봐 쥴 사람은 제가 유일하쟈나요.”
언젠가 했던 대화를 상기시키자, 손목을 그러쥔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든이 나를 따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무거운 눈을 감았다.
“오늘은 일찍 주무시는 게 좋게써요.”
그가 순순히 침대 있는 곳으로 옮겨 갔다.
늘 강인한 모습만 보였던 사자님께서 이렇게까지 맥을 못 추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리챠드와 함께 이든이 편히 잠들 수 있을 때까지 그를 간호했다.
“…….”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숨소리가 일정해졌다.
리챠드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내게 물어왔다.
“잠드셨습니까?”
“응. 리챠드도 얼른 자러 가여.”
“아가님께서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시고요.”
주변을 간단히 정리하고 방을 나서는 리챠드를 배웅했다.
그에게 주어진 방은 대각선에 있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님.”
“리챠드도여, 굿밤.”
피곤한 기색의 리챠드가 방문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잠시 고요한 황실 서궁의 복도를 눈에 담았다. 여전히 처연하게 피어 있는 백합들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확, 다 뽑아 버리고 싶네.’
종일 고생한 이든의 얼굴을 떠올리니, 예쁜 꽃도 괜히 미워 보였다.
우씨. 확 다 져 버려라.
차마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꽉 말아 쥔 주먹으로 허공에 화풀이를 했다.
얄미운 백합 장식을 노려보며 슉슉, 아빠가 하던 대로 냥냥펀치를 한창 하고 있었는데, 등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다가왔다.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님.”
화들짝 놀란 나는 주먹을 등 뒤로 숨기며 돌아섰다.
‘어? 이 남자는…….’
일전에 리르다 병원에서 본 피터 사제가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신관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모리스 대신관이 직접 행차했다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리챠드의 방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소리를 확 질러 버릴까. 리챠드라면 금방 듣고 나올 텐데.’
하지만 이미 건너편에서는 어둠을 등진 모리스 대신관이 다가오고 있었다.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 얘기 좀 하지. 참고로 그대의 아비에 관한 것이다.”
그가 음울한 목소리로 대화를 강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