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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93/142)

93화

불 꺼진 대신관의 별채에 꺼질 듯 말 듯 바람을 타고 가늘게 춤추는 등불이 가까워졌다.

단숨에 어둠을 밀어내고 들어온 모리스 대신관이 얼굴에 노기를 드러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를 따르는 피터 제임슨이 텅 빈 방을 휘 둘러봤다.

“라이언하트 영애가 그리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할 줄은 몰랐습니다.”

“건방진 것…….”

짓이겨진 감정의 덩어리가 거칠게 뱉어졌다.

등불의 몸통 부분을 거머쥔 손이 분노로 인해 바들바들 떨렸다. 그 안에서 열렬히 타오르는 불꽃을 보니 그 작은 계집아이가 떠올랐다.

[라이언하트 백작이 쓰러졌다 들었는데. 혹 꽃 알레르기라도 있는 건가? 이를테면…….]

[땅콩 알레르기에여. 푸딩에 땅콩 잼이 있었나 봐여.]

[처음 입궁했을 때부터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제가 만든 츄르가 너무 맛있어서 많이 드시는 바람에 배탈이 나신 거여써여.]

[그게 참말인가? 혹시 다른,]

[아이 챰, 대신관밈은 왜 이로케 우리 아빠한테 관심이 많으세여? 우리 아빠 죠아해요?]

터무니없는 반문에 순간 할 말이 막혀 버린 모리스였다.

말끝마다 기죽지 않고 대꾸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역시나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 꺾이지 않는 기세를 담아 놓은 파란 눈동자였다.

‘가증스러운 꼬마 같으니라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데, 아이가 끝까지 잡아떼는 바람에 깊게 추궁하지도 못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대신관님께서 그 영애에게 왜 이리 관대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황실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아이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까진 없어.”

“그런 연유 때문에 지난번에도 백작 영애를 감싸신 거군요.”

피터의 물음에 대신관의 눈동자에서 사나운 기운이 일렁였다.

“지난번이라니?”

“일전에 리르다 병원에 광마병 관련 조사를 보내셨을 때 불손한 발언에도 그냥 넘어가시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린지 자세히 보고해.”

고요한 방에 차분한 피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대신관의 표정이 불빛이 토해 낸 그림자에 뒤섞여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침내 피터의 말이 끝맺어지자, 대신관의 입꼬리가 느리게 미끄러져 올라갔다.

“발칙한 아이였구나.”

“사람을 붙여 놓을까요?”

“그래. 암,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이걸 어떻게 갚아 준다.

등불의 겉면을 천천히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대신관이 기나긴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그자가 이상 반응을 보인 게 그것이라 했나?”

* * *

가정의 달 연회, 두 번째 날이 밝았다.

나는 간밤의 일들을 리챠드에게 살짝 귀띔만 해 줬을 뿐, 이든에게는 비밀로 했다.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할 그에게 굳이 고민거리까지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오늘 일졍은 기부 행사라고 했쬬?”

“예. 오전부터 시작해서 이른 오후까지 진행된다고 합니다. 행사 이후에는 서대륙에서 초청한 악단의 연주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이든의 넥타이를 손봐 주고 있던 리챠드가 즉각 일정을 불러 주었다.

‘기부 행사라……. 그럼 이게 필요하겠네?’

나는 토리에게 빌려온 도토리 가방에서 주섬주섬 공책을 하나 꺼냈다. 내가 직접 적어 놓은 츄르와 릴까스 사업의 매출 장부였다.

‘이게 드디어 빛을 볼 날이 왔네!’

매출 장부를 끌어안고 으흥흥, 웃는 나를 빤히 보던 이든이 새하얀 종이를 가져왔다.

“부탁했던 백지 수표다.”

“감사함미다, 아빠!”

“한데 그 수익을 모두 다 쓸 생각인가?”

애써 힘들게 모은 것 같은데, 아깝지 않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으음. 그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으긴 했었지.’

나는 가만히 장부를 내려 봤다.

짧은 기간 동안 벌어들인 것이지만, 금액이 제법 컸다. 지방에 커다란 별장 몇 채는 거뜬히 짓고, 개인 여행선 다섯 척은 살 수 있을 만한 돈이었다.

그렇게 큰돈을 한 번도 안 쓰고 있다가 갑자기 덜컥 기부 행사에 쓴다고 하니까 내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궁금한 듯 보였다.

“원래의 계획이 틀어졌거든여.”

“무슨 목적으로 모은 돈이길래?”

“으음…… 비밀.”

불만으로 가득 찬 이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요즘 들어 부쩍 비밀이 늘어 가고 있군.”

볼멘소리로 불평을 늘어놓는 그를 향해 그냥 빙긋 웃어 주고 말았다.

‘예전에는 혹시라도 내가 필요 없어져서 아빠한테 버림당하면 어떡하나 걱정돼서 비상금으로 모아 둔 거예요’ ―라는 진실은 그냥 내 마음속에 고이 묻어 두고 말았다.

“맹세코 나쁜 일이나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예여.”

“그렇겠지. 그러지 않기로 나와 약속했으니까.”

“화나써요?”

조금 뚱한 표정의 이든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그럴 리가.”

그는 결코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봤을 때는 결코 맞는 것 같았다.

새로 만든 마따따비 나뭇가지를 손수 이든의 안주머니에 넣어 주고 나서야, 조금 표정이 풀렸다.

지켜보고 있던 리챠드가 참지 못하고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아가님께 꼼짝을 못 하시는군요.”

“시끄럽다, 리챠드.”

“각하. 애석하지만 저는 이제 살길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이든이 리챠드를 노려보았다.

리챠드는 연신 싱글벙글한 낯으로 내 손등을 가져가 입술을 쪽, 맞췄다. 자신이 평생 모실 레이디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뜻이 담긴 행동이었다.

“제게는 아가님이라는 든든한 뒷배경이 있어서 말입니다.”

“저 망할…… 똥개 놈이!”

“아가님, 도와주십시오!”

그리 넓지 않은 내빈실에서 아침부터 한바탕 우다다다가 시작됐다.

사자님의 컨디션이 어제에 비하면 확연히 좋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다만…….

틈만 났다 하면 먼지를 무한 생성해 내는 이 똥강아지와 똥고양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숨과 함께 나지막이 질문을 했다.

“스텔라는여?”

그런데 못 말리는 우리 털뭉치님들께서는 좀처럼 이 소란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신다.

주인을 찾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진 내 질문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 담았다.

‘에효. 진짜 이 협박까지는 안 쓰려고 했는데…….’

나는 햇살 아래 휘날리는 뿌연 먼지 속에서 네 살짜리 아기보다 더 아이 같은 두 남자를 흐린 눈으로 바라봤다.

덩치만 컸지 아주 두 남자 모두 애였다. 드디어 멱살을 휘어잡은 이든과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는 리챠드의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자꾸 그러묜…….”

중간에 말을 끊고서 두 남자를 바라봤다. 여전히 이 투덕거림이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정말 정말 정말 아껴 두었던 비장의 폭탄 발언을 꺼내는 수밖에.

나는 이 발언의 파급력이 얼마나 클지 어림으로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산만한 정신을 한 번에 집중시킬 정도는 되겠지?

그것이 너무나도 태평한 생각이라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못한 채 입 밖으로 폭탄을 내뱉었다.

“뇨아에게 시집가 버릴 꼬야!”

비장한 선포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동시에 이든과 리챠드가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뭐?”

“예?!”

리챠드의 멱살을 그러쥔 손에서 힘이 탁 풀리고, 이든이 휘청거리며 떨어져 나갔다.

휴, 이제야 말이 통하겠네, ―라고 생각할 찰나.

굳게 닫혀 있는 줄 알았던 내빈실의 문이 끼이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나는 문 앞에 있는 두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

“이 자식한테 간다고? 내가 아니라?”

들고 온 초콜릿 케이크를 바닥에 떨어트린 채로 시간이 멈춰 버린 노아와 그런 노아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길길이 날뛰는 몬크가 그 주인공이었다.

‘너희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거야?’

물어보기도 전에 답을 알았다. 몹시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리는 노아의 혼잣말이 들렸기 때문이다.

“……프러포즈는 내가 하려고 했는데…….”

……노아, 네 충격의 포인트가 거기에 있었던 거야?

“하지만, 꼬맹아. 나한테 오빠라고 했잖아! 나랑 결혼한다는 거 아니었어?”

……몬크, 그게 왜 그렇게 해석되는 건데?

각자의 생각에 갇혀 있는 두 꼬맹이를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루나 라이언하트.”

등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부름이 들려왔다.

아, 생각해 보니 지금 이 순간 가장 격하게 현실을 부정할 남자는 누가 뭐래도 아빠님이셨다.

돌아보니 어느 틈에 다가온 이든이 내 허리를 잡아 올렸다. 어린애의 키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높이였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절대 그 꼴은 못 본다.”

이든은 노아와 몬크를 차례대로 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어린애들을 상대로 참 유치한 모습처럼 비쳤지만, 이든 나름대로는 몹시 진지해 보였다.

이 모든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리챠드가 속삭였다.

“아가님. 아무래도 그 발언은 엄청난 혼돈의 씨앗이 된 것 같습니다만.”

알아요, 리챠드. 나도 지금 이걸 어떻게 수습할까 생각 중이니까 그렇게 굳이 콕 집어서 중계해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잠시 이마를 짚고 생각에 잠긴 나는 최대한 조리 있게 생각을 정리한 뒤,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그러니까 결혼은…….”

그러자 세 남자가 동시에 외쳤다.

“루나, 아무래도 프로포즈는 내가……!”

“차라리 내 눈에 흙을 뿌려!”

“꼬맹아,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세 남자는 금세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아아.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그 사이에 낀 나는 거의 반쯤 울상이 된 얼굴로 리챠드를 바라봤다.

“스텔라를 불러 쥬세여. 얼른.”

“오늘 새벽에 피헨느 씨와 함께 입궁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행사장에 가시면 만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리챠드의 말에는 웃음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이토록 원작의 에피소드가 빨리빨리 진행되기를 바랐던 적은 처음이었다.

이 단단히 꼬인 오해를 겨우겨우 해명했을 때쯤, 기부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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