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42)

94화

가정의 달 연회 중, ‘기부 행사’는 귀족뿐만 아니라 제국민 전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일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들에게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명예로운 일이었으며, 평민들에게는 그 베풂으로 인해 삶이 한층 윤택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귀족들 특성상 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그냥 넘길 리 없었다.

일찍이 행사가 열리는 야외 파티장으로 부지런히 나온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실컷 입방정을 떨었다.

“이번 타이틀은 아무래도 코노미야 백작가에서 가져갈 확률이 높겠지요?”

“리아노 공작가는 아무래도……. 부상으로 참여하시지 못하게 되셨으니 지지부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긴요. 아무리 후계자가 있다고 한들, 아직 어린아이니까요. 역시 코노미야 백작 쪽이 가장 가능성 있겠네요.”

“작년에 아쉽게도 리아노 공작가에 그 타이틀을 뺏겼었죠, 아마? 이번에는 라이벌이 없으니 타이틀은 따 놓은 당상이겠습니다.”

모두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기억하기로는 작년 이맘때쯤, 리아노 공작은 ‘보육원의 소외 계층을 구제하겠다’는 포부를 앞세워 비스의 보육원에 꽤 큰 금액을 기부했다. 게다가 몸소 직접 아이를 입양하겠다고까지 선언한 덕에…….

당시 여론은 리아노 공작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세가 역전됐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리아노 공께서는 남의 아이부터 챙길 것이 아니라, 본인 아이부터 챙겨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제 코가 석 자라는 말도 있던데.”

귀족들은 리아노 공작가가 사생아를 숨기고 있었던 것을 은근히 지적하며 비웃었다.

물론 당사자 앞에서는 꺼내지도 못할 말이었다.

귀족들의 세계란 그랬다. 앞에서는 굽신굽신 웃어 주면서, 뒤에서는 서로의 등에 칼을 꽂아 버리는.

아주 얄팍하고도 허술한 관계였다.

“뭐. 그렇다고 코노미야 백작가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완벽한 표본은 아니지만요.”

“어쩌겠어요. 또 똑같은 공략을 걸고 나오겠지만……. 마땅히 대적할 자도 없잖아요?”

기본적으로 던버르레 공작은 이 타이틀에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던버르레의 가신들 중에 명예 욕심이 있는 것이 코노미야 백작뿐이었다.

그는 벌써 5년째,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해 똑같은 공략을 걸었다.

자신의 상단에서 유통하는 식자재를 이용해 빈민촌에 일 년에 두 차례, 투자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뭐, 실상은 까 보지 않아도 뻔했다.

‘황실 요리 대회 때처럼 시원찮은 식자재들을 모아 대충 만들어서 구색만 갖추려는 거겠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은연중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올해도 진정 이 타이틀에 걸맞은 가문이 나오지 않겠네요.”

누군가 쯧, 혀를 차며 비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제가 가지지 못할 명예라면 망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모두가 그자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누군가 목소리를 냈다.

“유력한 새 가문이 있지 않습니까?”

호기심 가득한 귀족들의 눈길이 한곳으로 모였다.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자가 마침 야외 파티장으로 나오는 두 부녀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 주인공이 저기 오네요.”

* * *

나의 아빠 이든 라이언하트에게 ‘시집’ 발언은 진심이 아니었노라고 충분히 설명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어깨에서 내려 주지 않았다.

칭얼거려 봤자 어차피 아빠가 만족할 만큼 업고 다닌 후에야 내려 줄 것 같아서 얌전히 있었다.

그런 우리에게로 수십, 수백 개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어떻게든 말을 붙이고 싶다는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눈빛들이었다.

대부분은 이든의 눈치만 살피며 곁을 맴돌았는데, 개중에 용기 있는 이는 직접 말을 붙여 왔다.

“어머어.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라이언하트 백작님. 영애께서도 여전히 아름다우시고요.”

“내 딸은 언제나 그렇지.”

저 여자는 정말 운이 좋았다. 다른 식으로 말을 붙였더라면 깔끔하게 씹혔을 텐데.

아빠가 유일하게 대꾸해 주는 주제를 골랐으니 말이다.

“호호. 역시나 늘 생각하는 거지만 백작님께서는 참 좋은 아버지이신 것 같습니다.”

“내 딸도 그리 느낀다면 좋겠군.”

“당연히 그리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리도…… 완벽하신데.”

귀부인이 꼬리 깃털 부채를 넓게 펼쳐 눈 아래로 흔들며 야시시하게 웃어 보였다.

당연하게도 그런 필살기가 우리 아빠한테 통할 리가 없었다.

“어머. 평소 운동을 좀 하시나 봅니……,”

“불필요할 정도로 가까이 붙지 말도록.”

이든은 은근슬쩍 팔뚝을 터치하려는 여자에게서 한발 물러섰다. 허공에서 갈 길을 잃은 여자의 손이 안타까워 보였다.

그런 의미로 봤을 때 그 여자는 어리석었다. 자신한테 일말의 관심도 없는 남자에게 달라붙어서 추파를 던지니까 말이다. 그것도 버젓이 남편이 있어 보이는 고귀한 귀부인께서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기죽고 물러설 여자였다면, 애초에 아빠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는 철면피처럼 표정을 숨기고 그대로 손을 내 뺨으로 옮겼다.

“영애의 피부는 또 어찌 이리 고운지…….”

흰 장갑을 낀 여자의 손은 내 볼에 닿지 못했다. 이든이 또 한 발짝 물러섰기 때문이다.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건 내 딸에게도 마찬가지다. 쓸데없이 만지지 않았으면 하는데.”

나 역시 아껴서 만지는 것이니까. 귀부인에게 단호하게 제 의견을 표명한 이든이 쌩하니 그녀를 지나쳤다.

‘아이코, 이런. 민망하시겠다.’

나는 이든의 어깨에 달랑달랑 매달린 채로 그녀를 뒤돌아봤다. 대놓고 무시를 당한 귀부인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다른 곳으로 급히 자리를 옮겼다.

그러게, 왜 임자도 있으신 분이 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시고 그러나.

그래도 저 귀부인이 본보기가 되었는지, 아빠에게 귀찮게 치근덕거리는 여자는 더 이상 없었다.

이든은 정해진 자리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를 목말에서 내려 의자에 앉혀 줬다.

야외 파티장에도 백합 장식이 제법 보여 이든에게 귀엣말을 속삭였다.

“몸은 괜챠나요?”

“해독 덕분에.”

이든이 안주머니를 톡톡, 가리키며 답했다. 아직까지 혈색이 괜찮은 걸 보니 확실히 마따따비가 제 기능을 잘 수행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제처럼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만 조심하면 문제없겠어.’

평소보다는 감각이 조금 무딘 상태겠지만, 별일 없이 행사를 소화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정의 달 연회를 맞이하여, 기부 행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타이밍 좋게 나타난 황궁인이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귀족들이 나서서 자신이 베풀 구제 활동 계획에 대해 장황하게 펼쳐 놓기 바빴다.

대부분 앞서서 말하는 이들은 어른들이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은 ‘기부’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팔려 있었다.

이를테면 테이블 위에 오밀조밀 만들어 놓은 설탕 장식의 과자라든가, 아니면 어여쁜 또래의 이성 아이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억지로 끌어다 세워 놓고 열변을 토하는 동안에 ‘병풍 역할’을 하는 게 다였다.

나의 바보스러운 친구, 몬크 코노미야 영식도 마찬가지였다.

“코노미야 백작가에서는 빈민촌에 투자하겠소. 아시다시피 우리 코노미야 상단에서 유통하는 식자재는 황실 요리 대회의 재료 공급을 담당할 정도로 아주 훌륭한 것으로…….”

하얗게 센 눈썹을 열심히 흩날리며 열성을 다하는 코노미야 백작에게는 미안했지만, 지루했다.

다른 귀족들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간간이 하품을 하는 이도, 대놓고 딴짓을 하는 이들도 더러 보였다.

‘들으나 마나 자기 돈 많고 능력 좋은 거 실컷 자랑하다가, 으스대면서 거지 적선이라도 하는 것처럼 굴겠지.’

내 예상은 아주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기부’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서 남을 돕는 게 아니라, 기부를 자신의 능력과 힘을 과시하는 도구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정말 저런 말도 안 되는 공략으로 표를 얻을 수 있따고 생각하는 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데, 문득 단상 위에 올라간 몬크와 눈이 마주쳤다. 몬크는 ‘루나, 이것 봐. 나 여기 대표로 올라왔어. 멋지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헤벌쭉 웃었다.

정말 코만 안 흘렸다 뿐이지, 바보 같았다.

‘진짜, 쟤가 오빠라는 게 의심스럽다니까.’

지루한 행사가 막바지를 향해 흘러갈 때쯤, 내내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탓에 단상에 있던 귀족은 얼떨결에 말을 하다 말고 쫓겨나 버렸다.

단상에 올라선 황제가 찬찬히 자리를 둘러봤다. 끝에서부터 끝까지 훑고 지나간 시선의 종착점은 라이언하트 가문의 지정석이었다.

“짐은 라이언하트 백작가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만. 혹, 준비한 게 없는가?”

엇. 우리 차례는 일곱 번째 후인데.

내가 머뭇거리는 걸 보자, 황제가 친히 손짓을 했다. 괜찮으니 먼저 나와서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혼자 가기 무서운 것이면 같이 가 주겠다.”

이든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부드러운 눈동자는 정말로 내가 원한다면 기꺼이 그리하겠노라는 의지가 담겨 있었으나, 그 안에 피로함도 녹아 있었다.

나는 이든이 지금도 충분히 무리하고 있었음을 알았기에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괜챠나요. 혼자서도 잘할 수 있써요.”

정말로 그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의자에서 폴짝, 힘차게 뛰어내렸다.

그러고서 미리 준비한 매출 장부와 백지 수표를 양손에 야무지게 들고 황제가 있는 단상으로 포르르 달려갔다.

내 움직임을 좇는 셀 수 없이 많은 눈동자가 점점 커다랗게 변했다. 아무래도 내가 들고 있는 백지 수표에 적힌 금액을 본 모양이다.

아잇, 벌써 놀라면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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