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42)

95화

“백지 수표라니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다 들려왔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지도 몰랐다. 귀족들 중 기부에 진심인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동안 다들 형식적으로 기부하는 시늉만 해 왔겠지?’

비스의 대부호로 알려진 던버르레 공작이 참여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리아노 공작이나 코노미야 백작처럼 ‘명예’를 중시하는 이들이 아니면 굳이 많은 돈을 쓰려 하지 않았다.

“라이언하트 백작가의 비밀 금고를 푼 걸까요?”

“맞아요. 그 소문 속의 그 금고일지도 몰라요.”

그들이 말하는 ‘비밀 금고’란, 아빠를 둘러싼 수많은 소문 중 하나였다.

‘라이언하트 백작저의 지하에 귀한 보석들과 성물을 숨겨 놓은 비밀 금고가 있더라―’라는 대체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을지 모를 소문.

물론 평소 사자님의 씀씀이로 봤을 때 진짜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추측은 모두 다 틀렸다.

단상에 올라선 나는 깃펜으로 직접 백지 수표에 사인을 했다.

<루냐 라이언 하튜>

서툴지만 열심히 적은 백지 수표를 황제에게 공손히 건넸다.

수표에 적힌 내 이름을 본 황제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

“라이언하트 영애. 본인의 이름을 걸고 기부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것인가?”

“녜! 제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떼어 쥰다는 뜻이지여.”

갸륵한 충신을 보듯이 그는 작게 미소 지으며 내 손에 백지 수표를 쥐여 주었다.

어라라?

얼떨결에 수표를 돌려받은 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씨가 고운 것은 좋으나…….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유산을 너무 덜컥 내놓는 건 아닌지 염려되는구나.”

“제가 전액 기부 한다고 해서여?”

“그러하다. 이게 지루한 잔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언제나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재산은 여유롭게 채워 두는 것이 좋아.”

절대 비꼬는 말투는 아니었다. 황제는 진심으로 나를 존중하고 걱정하는 눈치였으니까.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워 악착같이 돈을 모으거나, 노후 대비로 시간을 쏟아붓는다.

‘오늘’이라는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실제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욕심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폐하의 말씀대로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는 아직 어리고 순수한 것 같습니다.”

“호호호,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께서 말리시지 않았더라면, 먼 훗날 오늘 일을 땅을 치며 후회할 날이 왔겠지요.”

―마치 이들처럼.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데 쫓기느라 오늘의 작은 행복들을 즐기지 못하고, 정작 가진 것을 나누는 데서 오는 행복을 모르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

나는 내 선택이 무조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후회하지 않을 뿐이다.

“괜챠나요. 그거 아빠한테 상속받은 유산이 아니고든요.”

웅성거림은 한층 더 커졌다.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점잔을 떨던 이들의 떡 벌어진 입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그럼 그렇게 큰돈이 대체 어디서……?”

“졔가 번 돈이에여. 다들 아시다시피 제 사업이 조금 성공한 편이쟈나요.”

준비해 온 사업 매출 장부를 내밀었다. 모두를 대표해서 장부에 적힌 액수를 확인한 황제의 눈꼬리가 가늘게 진동했다.

“……정말로 이 금액을 다?”

“녜. 앞으로 매달 수익을 다 기부할 꼬에요.”

나는 벙 쪄 있는 귀족들 쪽을 돌아보며 말을 덧붙였다.

“제 걱정을 해 쥬시는 건 고맙지만……, 츄르랑 릴까스 사업의 수익을 몽땅 기부한다구 해도, 모두가 염려해 쥬시는 것처럼 갑자기 저희 집이 쫄딱 망하는 일은 없을 꼬에요. 그쵸 아빠?”

사자님 금고도 빵빵하죠? 라는 의미를 듬뿍 담은 눈빛을 보냈다.

멀리서 눈이 마주치자, 이든의 입꼬리가 나른하게 올라가고 오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이지.”

거봐요. 우리 아빠도 부자, 나도 부자니까 이제 문제없는 거죠?

해맑은 얼굴로 황제를 바라봤다.

“그럼 다시 받아 쥬실 수 있으실까요, 폐하?”

“라이언하트 영애는 정말이지 매번 짐을…….”

황제가 허탈하게 웃으며 기꺼이 백지 수표를 받았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그렇지만 저를 미워하시면 안 돼여.”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미워할 수 있을 리가 있겠나. 허허허. 마저 후원 계획도 발표해 주겠나?”

“녜! 제 후원 계획은…….”

때마침 스텔라가 피헨느와 프로스트의 안내를 받으며 야외 파티장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게 집중하고 있느라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눈이 마주친 스텔라가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에 답하듯 나도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이리 올라와, 스텔랴.”

그제야 스텔라 쪽으로 이목이 쏠렸다.

“어머!”

“라이언하트 영애가…… 쌍둥이였나요?”

귀족들의 눈이 저마다 빛났다. 새로운 가십거리에 대한 기대감이 엿보이기도 했고, 또 다른 경쟁자의 등장은 아닐까 하는 경계심이 섞여 있기도 했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몬크와 뻣뻣하게 굳어 버린 노아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모두의 반응을 하나씩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이 기부금으로 비스에 정식 후원 센터를 만들 꼬에요. 그리고 저기 오는 친구가 제 첫 후원 대상이구여.”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텔라는 귀족들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는 화사한 미소와 함께 단상으로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제 폐하. 저는 루나의 친구 스텔라 리리카이예요. 제가 황궁 예법을 몰라서 실수를 하더라도…… 부디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조금 서툴지만 귀족식 예법대로 치마 끝을 살짝 잡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보니까 그녀가 이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갔다.

‘으음. 연습 때보다 잘하네.’

단장도 여느 명문 귀족가 영애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완벽했다.

사실 스텔라에게는 황실 연회에 맞는 격식 차린 옷이 없어서 피헨느에게 급히 부탁해 둔 건데…….

‘역시 꾸미는 건 공작새 수인의 솜씨가 최고라니까.’

스텔라 못지않게 피헨느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단출한 차림으로 다녀서 몰랐는데.’

피헨느는 귀부인이 입을 법한 레이스와 보석 장식이 화려한 드레스를 갖춰 입고, 머리를 업 스타일로 깔끔히 틀어 올렸다.

자칫 촌스러울 수도 있는 스타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완벽히 소화해 냈다.

‘언니 날 가져, 엉엉!’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세련되고 우아했다.

“어머, 세상에……. 저렇게 완벽하신 분이 있다니.”

영애들은 제 사랑의 라이벌이 될지도 모르는 피헨느를 보고 시기 질투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감탄하며 그녀의 미모를 감상했다.

“저…… 저런 여인이 있었소?”

“어느 가문의 영애지?”

한창 결혼 상대를 물색하고 다닐 젊은 나이의 영식들이 얼굴을 붉혔다.

‘우리 언니 잘난 얼굴 다들 잡솨 봐.’

흐뭇한 미소가 절로 퍼졌다.

나만 아는 가수가 유명해졌을 때, 이런 기분일까?

피헨느의 포텐 터지는 미모를 감상하느라 모두 넋이 나가 있는데, 유일하게 언짢아 보이는 이가 있었다. 그녀의 파트너로 온 프로스트 남작이었다.

“크, 크흠! 피헨느 씨, 어깨가 몹시 추워 보이십니다.”

“오늘 날씨 더운데요?”

“이럴 때일수록 감기를 조심해야 하는 법입니다.”

“아니, 덥다니까?”

프로스트는 기어이 피헨느의 어깨에 제 겉옷을 입혀 주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제가 못 살겠어요, 프로스트 씨 때문에.”

“오오, 하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피헨느 씨.”

피헨느는 더워 죽겠다고 하면서도 끝내 프로스트의 겉옷을 벗지는 않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남자가 제 여자를 훔쳐보는 건 못 참지. 암 그렇고말고.’

나름 치열히 제 여자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프로스트를 뒤로하고, 다시 황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스텔라와 황제는 그사이에 몇 마디를 나눈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괜찮으니 고개를 들고 이리 가까이 오거라.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네, 폐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스텔라가 조금 더 가까이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래, 라이언하트 영애가 너를 후원했다고 들었다.”

“네. 루나는 정말 정의롭고 다정한 친구거든요!”

“허허허, 짐도 이미 알고 있는 점이지. 그래, 이번에 후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이느냐?”

스텔라를 찬찬히 살펴보는 황제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아무래도…….”

황제는 혹여라도 스텔라가 상처를 받을까 봐, 그녀를 배려해서 뒷말을 아꼈다.

하지만 우리 모두 그 답을 알았다.

단상에 집중하고 있는 귀족들의 얼굴에 ‘평생 놀고먹어도 될 만큼의 경제적인 지원이겠지’―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그렇게 시시한 걸 계획할 리 없잖아?

“넘겨짚으실까 봐 말씀드린 건뎨, 옷은 그냥 친구로서 선물해 쥰 거에요.”

“하면?”

나는 총총총 앞으로 걸어 나가 모두의 시선을 능숙히 사로잡았다.

“제가 후원해 쥬기로 한 것은, 꿈이에여.”

“꿈?”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하는 황제의 눈썹이 산처럼 휘었다.

“현실에 부딪혀 꿈을 포기한다는 건 슬픈 거쟈나요.”

일순 야외 파티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대부분은 내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하긴 이런 고민을 해 본 사람이 여기 몇이나 있겠어.’

엄청난 호응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꿋꿋이 내 이야기를 펼쳐갔다. 다행히 그간의 행적 덕분인지 황제는 내 말에 끝까지 귀 기울여 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꿈을 접는 사람들이 없으면 해여. 그래서 전 기부금으로 후원 기구를 설립할 거고여.”

“그 말은 제도화하고 싶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짐이 옳게 해석한 것이냐?” 

“녜. 라이언하트 후원 제도의 첫 시범 대상이 스텔라고, 보육원이나 소외된 계층의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점차 후원 대상을 넓혀갈 검미댜.”

호기로운 발표가 끝남과 동시에 예정대로 스텔라가 나섰다. 누구든 단연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미소와 함께였다.

“루나가 제가 제도 아카데미에서 마음껏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게끔, 학비와 생활비와 기숙사비 전액을 졸업 때까지 지원해 주기로 했어요!”

자, 다들 심장 부여잡으시라!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의 치트키는 자고로 햇살 같은 미소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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