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짧은 정적이 흘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귀족들이 서로 의문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후원 제도에 투자를 한다고?”
“밑 빠진 도자기에 물 붓는 사업을 왜……?”
다들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대놓고 입에 올리지 않았다 뿐이지 ‘그것이 가문의 발전에 하등 무슨 도움이 된다고?’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무슨 계획이 따로 있는 거 아닐까요? 후원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든가…….”
개중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저 정도 수준이었다.
내가 ‘어떤 이득을 기대하고’ 사업처럼 투자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뭐, 이러리라고 처음부터 예상하긴 했다.
애초에 귀족이라는 족속들은 근시안적으로나, 먼 훗날에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움직이는 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오늘, 그 틀을 완전히 바꿔 놓을 생각이었다.
“제가 선견지명이 쫌 이써요.”
갑작스러운 발언에 귀족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제 그들도 내가 결코 헛된 얘기를 꺼내는 아기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잘 생각해 보시면 제가 츄릅츄릅 병 치료제의 최초 개발쟈인 거 아시져?”
“영애 덕분에 제국이 큰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요.”
그때 당시를 회상했는지, 몇 귀족들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내 의견에 동감했다.
“사실 릴까스도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던 드래곤 고기로 만들어 낸 거구여.”
“오, 맞아요. 사실 드래곤 고기는 환경단체의 골칫덩이였죠. 매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라이언하트 영애님 덕분에 올해는 그 걱정을 덜었습니다.”
선뜻 감사를 표하는 이는 지방에서 환경 보호가로 저명한 에이코 백작 부인이었다. 평소 평판이 좋은 귀족이었는지, 에이코 부인은 어렵지 않게 주변인의 동조를 이끌어 냈다.
이로써 빌드 업은 충분했다.
이제 마지막 일격 필살을 날릴 차례였다.
“제가 엄청난 돈을 번 것듀 다 그 선견지명 덕분이거든요. ……아, 맞따. 아빠가 이거 비밀이랬는뎨.”
나는 정말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눈을 깜빡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마주쳤다. 그러면서 “다들 비밀로 해 주실 거죠?” 속삭이며 방싯방싯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자 주인공처럼 후광이 훤히 비치는 버프까지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 미소도 제법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저희 가문에도 한번 논의를 해 보자고 해야겠어요.”
“그, 그럼 저희도 숙부님께…….”
다들 다급히 하녀들을 호출해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마 각자의 가문에 ‘조속히 라이언하트 가문이 계획하는 후원 활동을 지지할 것’을 명하는 듯했다.
하녀들이 주인의 재촉을 받고 분주하게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으흥흥흥.”
뿌듯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도 자연스럽게 후원하는 문화가 자리 잡겠지?’
그럼 더 많은 평민들에게 더 좋은 기회가 갈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 부딪혀 꿈을 포기할 사람도 줄어들 테고.
모두 내가 바랐고, 계획했던 대로였다.
“다들 도와쥬신다니 감동이에오! 덕분에 라이언하트 가문에서 계획하는 후원 센터가 더 번창하겠써요.”
양손을 꼭 모아 쥐고서 잔뜩 감동 받은 어린아이를 연기하는 것쯤은 내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무려, 우리 사자님을 쥐락펴락하는 마성의 아기니까!
“하하핫!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영애님. 그러니 부디, 나중에 저희 가문에서 도왔다는 걸 잊으시면 아니 됩니다?”
“그럼여! 당연하져.”
당신들 돈으로 소외된 계층을 어린아이들부터 시작해서 방치되는 사생아, 소년 가장, 한부모 가정, 미혼모, 홀로 쓸쓸히 늙어 가는 노인들…… 가능하면 많은 이들을 최선을 다해 도울 거니까.
후원 기구를 본격적으로 어떻게 확장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는데, 불쑥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짐이 굳이 나서서 정리하지 않아도 이번 행사의 결과는 정해졌군, 그래.”
황제가 무척이나 감명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세속의 온갖 번뇌에서 허덕이던 인간이 성스러운 존재를 마주쳤을 때처럼 경건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어라? 이 묘한 분위기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햇빛이 구름 뒤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할 때마다 황제의 두 눈이 촉촉이 빛났기 때문에!
헉. 폐하, 설마 지금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시는 건 아니시죠?
“그래도 발표는 해야겠지. 음, 그래. 그렇고말고. 공표하겠다. 올해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문…… 아니, 올해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표한 어린이는 라이언하트 영애다.”
박수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누구도 황제의 결정에 반박을 내놓는 이가 없었다.
“가문에 큰 영광임니댜, 폐하.”
나는 황제에게 끝까지 예를 갖추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들고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향했다.
“아빠!”
이든은 조용히 양팔을 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가 또 해냈어요!’
쪼르르 달려가 폭 안긴 품은 언제나 그렇듯 넓고 다정했다.
“고생했다.”
콩. 이든이 내 이마 위에 자신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살짝 맞대었다. 그것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얻기 힘들고 값진, 고양이식 애정 표현이었다.
* * *
공식적인 기부 행사가 끝난 후, 우리가 머무는 내빈실로 많은 귀족들이 찾아왔다. 대부분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으려는 자들이었다.
물론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저희 에이코 가문이 라이언하트 가문을 지지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영애님.”
“당연하져. 나중에 제가 티 파티를 열면 부인께 꼭 초대쟝을 드릴게여, 약속!”
“귀여운 아기 영애님의 초대라면 언제든 환영이지요.”
이번 기회에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 같은 자들과 안면을 트기도 했으니까.
‘에이코 백작 부인과 친분을 쌓아 두면, 다음 에피소드에 도움이 될지도 몰라.’
조금 계산적인 인간관계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소설의 엑스트라인 나는 다음 에피소드를 위해서 스스로 차곡차곡 치트키를 쌓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나는 에이코 백작 부인의 따스한 눈웃음이 진심으로 좋았다. 또한 환경을 사랑하고 아끼는 그녀의 열정을 진심으로 지지하기도 하고.
“후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몰리는군요.”
에이코 백작 부인을 막 마중 나갔다 온 리챠드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컨디션 조절을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가주를 대신해서 간만에 집사다운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그만큼 우리 아기님께서 사랑받는다는 뜻 아니겠어요?”
“피헨느 씨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피헨느 씨 그……, 조금 춥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어깨에 제 옷을 걸치셔야 할 것 같…….”
“프로스트 씨. 알았으니까 제발 우리 아가님 앞에서는 그 입 좀…… 조용히 좀 있어 주세요.”
여전히 꽁냥꽁냥거리는 피헨느와 프로스트도 나를 도와준 덕분에 일사천리로 후원하겠다고 나선 귀족들의 명단과 사인을 받아놓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피헨느가 이렇게 사교술이 좋은 건 몰랐는걸?’
솔직히 오늘 피헨느의 다른 면모를 보고 놀랐다.
소설 속 묘사에는 그저 <라이언하트 가문의 세작, 낮의 새>로만 서술이 돼서 몰랐었는데.
‘이런 뜻밖의 재능을 숨기고 있을 줄 몰랐어.’
대화 상대를 즐겁게 만드는 센스 있는 언변과 그냥 태생부터 호감일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비주얼.
만약 그녀가 평범한 귀족가의 영애로 태어났더라면 사교계를 주름잡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정작 피헨느 자신은 암살이나 정보 수집에 능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모두 틀렸어.
피헨느, 당신은 얼굴 천재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칭찬은 속으로 삼켰다. 의외로 칭찬에 약한 피헨느가 내 진심을 안다면 도망칠까 봐서.
“왜 그러세요, 아가님?”
간지러운 곳을 못 긁는 사람처럼 끙끙거리는 나를 보고 피헨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어떡해. 우리 언니는 저런 모습도 예뻤다. 누군가 갑자기 나에게 왜 갑자기 피헨느를 언니라 부르냐고 묻는다면…… ‘예쁘면 다 언니 아니야?’라고 답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칭찬 폭탄으로 피헨느를 혼쭐내 줄까, 잠시 고민하다가 관뒀다.
“으음…… 그냥, 잠시 피헨느랑 종종 사교 활동을 다니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써요.”
“아가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준비해 두겠습니다.”
피헨느가 곧장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답하자, 프로스트의 절규가 이어졌다.
“오오! 아가님! 부디, 듣는 것만으로도 어질어질한 명령은 거둬 주십시오!”
“……왜 당신이 그렇게 질색팔색해요?”
절박한 프로스트와 그런 그를 어이없는 눈으로 보는 피헨느의 케미스트리는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까.
두 사람을 관찰하며 키득키득 웃고 있는데, 리챠드가 다가와 속삭였다.
“아가님, 친구분께서 다녀가셨습니다.”
“노아가여?”
“네. 서궁 뒤쪽 산책로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서궁 뒤쪽 산책로라면, 마따따비 껍질을 손질했던 그곳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이든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선잠에 든 건지 이든은 반응이 없었다.
‘잠깐 다녀와도 될까?’
내 마음을 읽은 리챠드가 내빈실 밖으로 내 등을 슬쩍 떠밀었다.
“다녀오십시오. 제가 각하께는 잘 말해 놓겠습니다.”
“그럼…… 진쨔 금방 다녀올게요, 리챠드.”
“조심히 다녀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금방 층계를 내려가 노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익숙한 뒤통수가 내빈실 뒤뜰을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게 보였다.
나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내빈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노아!”
흠칫, 등이 떨리더니 노아가 천천히 돌아섰다.
“루나, 왔어?”
노아가 풀물이 잔뜩 든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가 들고 있던 것을 봐 버리고 만 후였다.
“노아 설마 너 그 꽃…….”
“아, 그, 그러니까 이건…….”
눈처럼 뽀얗던 뺨이 순식간에 한겨울의 생딸기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무리 나랑 소꿉놀이를 하고 싶다고 해도 황실의 꽃을 그렇게 함부로 꺾으면 오또캐!”
“……어……?”
내가 너무 팩트로 때렸나?
노아의 표정이 어쩐지 바보 같아졌다. 조금 살살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