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아, 아니 잠깐만 루나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괜챠나. 그래도 목격자는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비밀로 해 쥴게!”
노아는 짧게 앓는 소리를 뱉어 내더니, 이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꽃을 함부로 꺾지 않을게.”
“죠은 자세야 노아!”
하마터면 큰일 치를 뻔한 한 어린 영혼을 구원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으흥흥, 웃으며 노아의 손을 붙잡자, 심각했던 미간이 눈 녹듯이 풀렸다.
“내가 정말 못 살겠다니까…….”
“그래. 방금 상황을 다른 황궁 사람들한톄 들켰으면 더 못 살 뻔했다니까.”
노아가 똘똘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의 어린애였다면 울고불고하면서 귀찮게 했을 테니까.
으으, 몸서리치는 나를 보며 노아는 피식 웃었다.
얘는, 얘는. 위험할 뻔했대도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걸까.
아무튼 간에 주인공이라는 녀석들은 뇌 구조가 특이했다.
“그나져나, 왜 불러써?”
“으음, 그게…….”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망설이던 노아가 적당한 대답을 떠올렸는지 입술을 열었다.
“소꿉놀이할래?”
“노아, 황실에서는 꽃을 안 꺾기로 방금 약속했쟈나.”
“풀꽃 밥은 안 지어도 돼. 그냥 엄마 아빠 놀이가 하고 싶어서, 너랑.”
노아가 남자 주인공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와 함께 내 손을 이끌었다. 내가 그의 미소를 그렇게 부른 데는 ‘좀처럼 거부하기 어려운’ 무언가 특이한 힘이 있어서였다.
“보육원에서 지낼 때는 너랑 누나들이랑 자주 했었는데 입양 간 후로는 한 번도 못 했잖아, 우리.”
그건 그렇지.
문득 보육원에서의 추억이 생각났다.
그 당시 우리에게는 소꿉놀이가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나는 언니들을 따라 프리마 숲을 누비며 열심히 풀꽃을 땄다.
정성껏 딴 풀잎들을 엮어 꽃반지를 만들 때도 있었고, 때로는 돌멩이 위에 짓이긴 풀꽃을 올려놓고서 포비에 식당의 고급 요리를 먹는 귀부인을 연기하기도 했다.
“으아. 갑자기 이렇게 생각하니까 추억이다.”
“그럼, 나랑 지금 할래?”
곧바로 “응!” 하고 답하고 싶은 걸 꾹 참은 것은 순전히 사자님을 향한 애정 때문이었다.
습관적으로 아빠가 누워 있는 내빈실 쪽을 바라봤다. 여전히 창문이 닫혀 있는 걸 보면 아직 주무시고 있는 모양이다.
‘조금은 놀다 가도 되겠지?’
동심(?)으로 돌아갈 마음에 목소리가 조금 들떴다.
“죠아! 그런뎨…… 노아 너는 남자애들이랑 말뚝박기 놀이하고 싶었던 거 아니여써?”
“네가 늘 엄마 역할이었잖아.”
“응?”
맞잡고 있는 노아의 손이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는 봄바람에 나부끼는 민들레 씨앗처럼 보드랍고 간지러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네가 엄마 역할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말뚝박기나 하고 있을 수 있어.”
그 순간 노아는 계절이 되어 내 마음에 머물렀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여린 새싹이 움트는 소리가, 바람의 냄새와 햇살의 온도가 나를 감쌌다.
누군가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닌데.
이 애와 나를 둘러싼 세계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계절을 처음 배운 갓난아이처럼 모든 감각을 새롭게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오늘도 나랑 엄마 아빠 놀이해 주지 않을래?”
다정하게 접히는 노아의 눈웃음이 내 마음 한구석에 붙어 여름 매미처럼 찌르르, 울었다.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이 애가 가진 온도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럼 청혼부터 할게.”
“어?”
노아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꽃을 슬며시 내밀었다.
“……역시 프러포즈는 내가 하고 싶어서.”
노아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무어라 웅얼거리며 뺨을 긁적였다.
이제 와 자세히 보니 그냥 평범한 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머리카락 색을 닮은 하얀 풀꽃을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소꿉놀이용 반지였다.
우리는 소꿉놀이를 할 때마다 매번 풀꽃 반지를 만들곤 했다. 노아는 한결같이 서툰 솜씨였지만,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내게 반지를 만들어 주었다.
‘실력은 여전하네.’
엉성했음에도 예뻐 보였다. 마음과 시간이 내려앉아서 그런가?
“흠, 흠.”
잠시 목을 가다듬은 노아가 내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반지를 끼워 주겠다는 의미였다.
늘 소꿉놀이에서 그랬듯 그의 손바닥 위에 가지런히 손을 올렸다.
노아는 또 그새 컸는지, 예전보다 손바닥 크기 차이가 더 났다.
“나 손 떨어지겠댜, 노아.”
퍼뜩 정신을 차린 노아가 내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루나, 나랑 결혼해 줄…….”
천천히 벌어진 예쁜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나풀거리는 것도 잠시였다.
어디선가 불어온 익숙한 바람이 말허리를 뚝 끊어 놓았다.
이윽고, 하늘에서 사뿐!
언젠가 봤던 커다란 그림자가 사뿐히 우리 앞에 착지했다.
“누구 마음대로.”
곧이어 사나운 으르렁거림이 낮게 깔렸다.
어째서 왜.
내빈실 침대에서 한창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거나, 내지는 리챠드와 대화를 하고 있어야 했을 분이, 왜 또.
하늘에서 뚝 떨어지신 걸까.
……정말이지. 똥개님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이든은 자신의 뒷머리에 까치집이 생겼다는 것도 모르고서 노아를 불만스럽게 노려보았다. 노아 역시 지지 않고 아빠를 쏘아보았지만, 열 손가락에 풀물이 든 것 때문인지 잔뜩 하찮아 보였다.
“절대 허락한 적 없는 결혼이다.”
“엄마 아빠 놀이를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더더욱 안 될 노릇이지. 루나의 아빠는 오직 나뿐이니까.”
서로에게 씩씩거리며 기 싸움을 하던 두 남자가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루나, 네가 정해. 누가 아빠면 좋을지.”
“그래. 루나. 누가 아빠 역할을 했음 좋겠어?”
……큰아들이랑 작은아들이 생긴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부디 내 착각이길 바랐다.
후우.
나는 기대가 넘치는 두 남자의 눈동자에 등 떠밀리듯 입을 열었다.
“……아빠.”
“역시 내 딸에게 아빠는 나 하나뿐이다.”
“내가 아무 데서나 뛰어내리지 말랬쬬!”
내 잔소리에 잠시 우쭐거렸던 이든의 어깨가 한순간에 물에 젖은 풀떼기처럼 푹, 처졌다.
* * *
결국 노아 한 번, 사자님 한 번. 번갈아서 ‘아빠’ 역할을 시켜 준 후에야 소꿉놀이는 막을 내렸다.
두 번의 엄마 역할을 공평히 수행했어야 했던 나는 반쯤 녹초가 되어 버렸다.
“흐아아. 졸려어.”
이든의 품에 안겨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빈실로 돌아가는 길에 까무룩 잠들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가물가물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떠 올렸다.
“루나, 많이 힘들면 피로 회복 마법을 써 줄까?”
나를 무사히 침대까지 데려갈 아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내빈실 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고집부린 노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법 그렇게 아무 뎨나 막 쓰지 말라니까.”
“널 위해서 쓰는 게 어째서 아무 데나야.”
“노아가 위험해질까 봐 그렇지.”
노아는 내 잔소리가 이제 무섭지 않나 보다.
그저 작게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두어 번 톡톡, 두들겼을 뿐인데.
몽롱했던 정신이 확 맑아지고, 열 시간은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개운해졌다. 노아가 마법을 부린 것이다.
“노아 너, 진쨔.”
한껏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노아를 바라봤다. 바보같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따라 웃을까.
나는 혹여라도 그의 재능이 나쁜 빌런들 눈에 띌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얼른 약속해. 댜시는 조심성 없이 마법을 쓰지 않기로.”
노아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내 손등 전체를 집어삼켰다. 어쩐지 뚱한 얼굴의 이든이었다.
“구두로 해도 충분한 약속이다.”
절대로 작고 소중한 새끼손가락만큼은 네 녀석한테 양보할 수 없다 ―라는 글씨를 얼굴에 써서 붙인 사자님은 절대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였다.
“약속할게, 루나.”
착한 노아가 물러섰다.
진짜 이럴 때 보면 누가 어른인지 모르겠다니까.
그러다 문득,
사자님의 걸음이 멈추었다. 자연스레 나와 노아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나는 곧 불청객이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가장 먼저 정적을 깬 건 노아였다.
“……어? 피터 사제님.”
“오랜만입니다, 리아노 영식.”
모리스 대신관의 최측근, 피터 제임슨이 노아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마 두 사람이 구면인 것은 리아노 공작이 노아를 데리고 대신전을 들락날락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저 남자가 여긴 또 뭐 때문에 온 걸까?’
야금야금 밤하늘을 물들이는 어둠처럼 서서히 번져 온 불안한 감정이 나를 좀먹었다.
혹시 어딘가에서 모리스 대신관이 숨어 있나 싶어서 주변을 살폈다.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더욱 불안했다.
“그리고…….”
피터가 아빠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가볍게 묵례만 하며 말을 이었다.
“오늘도 굿나잇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
“오늘……도?”
아빠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오늘‘도’에 담긴 의미를 내게 묻는 행동이었다.
“어젯밤에 쟘시 얘기를 나눈 적 있거든요.”
곧바로 인상을 구기는 아빠의 손을 꼬옥 잡아 줬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큰일은 없었다.
‘모리스 대신관이 뭔가 냄새를 맡고 떠보기는 했지만…….’
나름 잘 둘러대고 들어왔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나는 피터의 표정을 하나하나 뜯어보듯, 아주 세밀히 살폈다.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우리에게 접근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내 심리를 읽기라도 한 건지, 피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웃었어?
불안이 더욱 가중됐다.
“다름이 아니라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께서 이번 기부 행사에서 폐하의 선택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여?”
“축하 선물을 드리러 왔습니다.”
축하 선물이라니?
원작 어디에도 그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기부 행사 후 에피소드는 작가가 그리 중요히 다루지 않고 생략한 장면이었다.
‘뭔가 이상해.’
본능적으로 수상함을 감지한 내가 거절하려는 순간,
펑! 퍼펑! 펑!
동시다발적으로 컨페티팝이 터졌다. 파티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처럼 허공이 알록달록 물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축하의 의미가 아니었다.
축하용 폭죽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알록달록 예쁜 색종이 조각이 아니라, 꽃가루였으니까.
“아빠!”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내 목구멍을 가르고 튀어 나갔을 땐, 이미 아빠의 몸이 앞으로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