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42)

99화

“이제 좀 괜찮아?”

나는 노아의 품에서 엉엉 울어 탱탱 부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오래 울었던 건지.

밖은 어느새 깜깜해졌고, 내 두 눈두덩이는…….

거울로 직접 보지 못했지만, 아마 볼만할 것 같았다.

큭큭, 웃음을 참는 노아를 보면 확실했다.

“그러다 내일 눈 못 뜨겠다.”

“아빠가 푹 잠들어서 다행이야.”

아마 깨어 있었더라면 또 다른 버전의 폭주를 봤을지도 몰랐다.

정말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나는 생각이 현실이 될까 봐서 잽싸게 고개를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에 데려다 쥬께.”

“난 괜찮은데.”

“오늘은 내가 그러고 시포서, 그래. 그리고 나 조금 이따가 폐하를 알현하러 가야 하쟈나.”

노아의 폭주에 관한 보고서가 황제에게 올라갔다.

황궁 내에서 일정량 이상의 마나 사용으로 당장 잡아가도 이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군사들을 보내는 것 대신, 그저 ‘라이언하트 영애와 담소를 나눴으면 하는구나.’ 하는 말을 전해 왔다.

노아의 마법으로 그냥 넘어가게 만든 건가?

그런 생각이 잠깐 들긴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남의 기억을 조작하거나 조종하는 게 가능했다면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할 리 없었으니까.

이것은 순전히 황제의 독단적 의지대로 ‘노아에 대한 처분’이 미뤄진 것이다.

내 확고한 태도에 노아는 못 이기는 척 일어섰다.

“알았어. 대신 오늘만이다?”

“응, 약쇽.”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복도로 나섰다. 아까의 소란 탓인지 귀족들은 제법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잠들지 않고서 복도를 전전하고 있었다.

다들 또 아까와 같은 폭주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 보였다.

“조, 좋은 밤이오. 영애와 영식께서는 평안하신지……?”

눈이 마주치는 이마다 흠칫흠칫 몸을 떨며, 품위를 잃고 말을 더듬거렸다.

대화의 주제를 이상한 안부를 묻는 것으로 이끄는 걸 보면 처세술이 영 형평 없어진 게 분명했다.

그들은 노아의 심기를 거슬리고 싶지 않아 조심조심했지만, 정작 그게 오히려 더 신경 쓰이게 한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노아를 데리고 그들을 지나쳤다.

리아노 공작가가 머물고 있는 방은 우리가 머무는 곳과 반대편 쪽에 있었다.

복도를 가로지르며 내심 먼 방을 배치받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핑계로 노아와 조금 더 오래 달빛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종종 이로케 산책하쟈, 노아.”

“응. 루나가 좋다면 얼마든지.”

어깨로 내려앉은 밤공기가 아늑했다.

리아노 공작가에 배정된 내빈실로 점점 가까워졌다. 그곳에서는 딱히 마주하고 싶지 않은 대화 소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두런두런 들려오던 말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리아노 공작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그런 재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보육원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재능이 보이긴 했소. 한데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 또래 애들처럼 놀고 있었지.”

“공작님께서 거둬들이지 않았더라면 그 귀한 원석이 그대로 빛도 못 보고 썩을 뻔했군요. 실로 국가적 큰 손실이 있을 뻔했습니다.”

리아노 공작가와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이 감히 주제로 올리는 것이 ‘노아’에 관한 얘기라는 것을 듣자마자 알았다.

우쭐대고 있는 꼴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부지불식간 노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역시 명문가입니다. 대대로 리아노 공작가의 마법 수업이 수준급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저 재능 있는 마법사를 길러내 제국에 충성을 다하게끔 만들 생각일 뿐이었소.”

“그 덕분에 제국의 힘이 더욱 굳건해지게 됐습니다.”

아둔한 자들은 노아와 내가 코앞까지 올 때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뒤늦게 알아차린 이들이 급히 몸을 돌리고 딴청을 부렸다.

“공쟉밈.”

추스르지 못한 분노가 멋대로 흘러나왔다.

나는 굳이 예의를 차릴 생각을 하지 않으며, 허리에 커다란 부목을 대고 붕대를 칭칭 감은 리아노 공작 앞으로 걸어갔다.

당한 전적이 있던 리아노 공작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빗겨 섰다.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가 무슨 일이지?”

“우리 아직 볼일이 있쟈나요.”

그는 가지런히 정돈된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미를 물었다.

내 말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어 놓고서도,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을 의식해 제 체면을 생각해서 회피하는 거였다.

당연히 그 장단에 순순히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내기에 지셨으니, 사과하셔야져.”

“…….”

다물린 입술에 핏기가 사라졌다.

사나워진 눈매는 ‘꼭 이렇게 나와야겠어?’ 하고 따져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고작 그걸로 울고불고할 나약한 아기가 아니다.

그의 행동들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약속하신 걸 지켜야져.”

“그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따로 서신을 보내도록 하…….”

“명문가의 귀족들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질 줄도 모르나 봐여.”

“무어라?”

“그래 가지고 어찌 더 큰 포부를 이루게써요. 안 그래여?”

넌지시 리아노 공작의 뒤로 숨어 있는 이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리아노 공작을 찬양하기 바빴던 이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눈치를 보았다.

“여, 영애님의 이야기가 맞습니다. 본디 가문의 명예를 걸고 한 내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사과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조속히 하심이 어떠실는지…….”

그들은 혹시나 미운털이 박힐까 벌벌 떨었다.

리아노 공작은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어 버린 제 추종자들의 태도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것이 감히!

이 위대한 리아노 공작가의 가주에게 주제넘게!

분개한 눈동자에 폭풍이 몰아치는 게 보였다.

그가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자, 내내 지켜보고 있던 노아가 나지막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공작님. 진정 하실 말씀은 없으신 겁니까.”

딱 한 마디의 말이었다.

그것이 뇌성처럼 리아노 공작의 귓전에 내리꽂혔다. 오만함으로 가득 찼던 어깨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배경처럼 서 있던 추종자들의 낯빛은 이제 시체처럼 창백히 질려 있었다.

“각하,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얼른요!”

“맞습니다. 그깟 자존심은 버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곳에 더는 리아노 공작의 편은 없었다.

두려움에 배신을 선택한 이들에게 등 떠밀린 리아노 공작은 겨우겨우 쥐어짜 낸 것을 사과랍시고 던졌다.

“……내 패배를 인정하지.”

“그게 다에여?”

“그래.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내 본의 아니게 오해하게 만들었다. 앞으로는 신중하게…….”

나는 개소리를 아주 성의껏 지껄이는 리아노 공작의 말을 끊어 냈다.

“교육의 명문가라는 소리는 다 헛소문인가 봐여. 사과의 기본 공식도 모르는 걸 보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지?”

“사과를 하랬더니 변명이나 대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계시쟈나요.”

정말 끝까지 비호감 캐릭터였다.

“모든 걸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해서 잘못했댜. 나의 방법이 그릇된 것 같댜. 깔끔하게 인정하세요. 쵸코 앞에 가서.”

“…….”

리아노 공작의 눈두덩이가 경련했다.

등 뒤로는 두려움을 집어삼킨 이들이 재촉했고, 눈앞에서는 노아와 내가 두 눈 부릅뜨고 그가 사과를 입에 올리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에게 도망칠 곳은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억지로 숨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모든 걸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해서…… 잘못했다. 나의 방법이 그릇됐음을 인정한다.”

그리 진실성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더는 얼굴을 맞대고 있고 싶지 않았다.

평소 콧대 높은 리아노 공작의 성격상, 당분간은 낯부끄러워서라도 설치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한 결실이었다.

당연히 가장 중요한 걸 잊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한 번만 노아를 물건 취급해 봐여. 쵸코한테 말해서 확!”

“흐억!”

확실히 초코에게 옆구리를 차인 기억이 단단히 각인된 건지, 리아노 공작은 품위도 잃고서 화들짝 나가떨어졌다.

* * *

나는 노아를 방까지 데려다준 후, 황제의 알현실로 향했다. 걱정이 가득한 노아를 겨우겨우 떼어 놓고서였다.

살살 어르고 달래지 않았더라면 노아는 알현실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황제의 호출 없이 알현하러 가는 것은 무례하고 불손한 행동이다. 리아노 공작가에서 귀족 수업을 받은 노아도 그 사실을 배워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오겠노라고 고집했다. 순전히 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나는 노아가 사람들이랑 틀어지지 않고 잘 지내면 더 멋있을 꼬 같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우습게도 노아는 그 한마디를 듣자마자 자신의 고집을 꺾어 버렸다.

방에서 내일 아침까지 얌전히 기다리겠노라 대답한 노아와 ‘내일 아침 산책을 같이하기’로 약속도장을 찍고 나서야, 알현실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폐하,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가 도착했습니다.”

문지기가 나의 방문을 황제에게 알렸다. 나는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집무실 앞 복도를 찬찬히 살폈다.

노아가 우려했던 것들은 없었다. 위협적인 무기를 빼든 무장 군인이나, 엄청난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는 마법사가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상상들 말이다.

‘황제가 나를 무슨 이유 때문에 불렀을까?’

딱히 잡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어림짐작하는 것은…….

‘아무래도 오늘 노아가 폭주한 것에 관한 얘기겠지?’

그것뿐이었다. 황실 소속 마법사가 노아의 엄청난 마력이 주는 압박감에 허덕이며 아무런 대처도 못 하고 있었을 때, 폭주한 노아를 유일하게 컨트롤한 게 나였으니까.

“들라 하라.”

안쪽에서 들려오는 황제의 목소리는 낮에 들었던 한없이 다정했던 것과는 조금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나는 빈주먹 사이로 긴장감을 조용히 말아 쥐며 알현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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