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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100/142)

100화

문지기가 물러가자 넓은 알현실에는 황제와 나 단둘만이 남았다.

“차가 입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황제가 제 반대편 자리에 놓인 도자기 잔에 차를 따랐다. 앉아서 차 한잔하며 담소를 나누자는 의미였다.

“폐하께서 주시는 것이니 기쁘게 마시져.”

나는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입 안에 은은하게 퍼지는 차향에 괜스레 기분이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으음. 이 맛은, 라벤더인가.

땅에 닿지 않는 발을 허공에서 까닥까닥 움직이며 차 맛을 음미했다. 그런 나를 빤히 보던 황제가 물었다.

“의심하지 않나?”

“녜?”

“짐이 그 차에 몹쓸 짓이라도 했으면 어떡했으려고.”

“헙. 혹시 독이 든 차예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으니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내게 따라 줬던 차를 자신의 찻잔에도 따랐다. 그것이 질문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영애는 참…… 사람을 무장 해제 시키는 재주가 있어.”

“좋은 거네요! 적이 되는 거보다는 칭구가 되는 게 좋으니까!”

“친구, 아무래도 그쪽이 좋긴 하겠지.”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황제가 넌지시 본론을 꺼냈다.

“짐이 오늘 영애를 왜 보자고 한 건지 알고 있나?”

“으음, 아까 노아의 일에 관해 하문하실 게 있으셔서?”

“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영애의 아비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지 않은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저녁 내내 황궁을 떠들썩하게 만든 ‘노아의 폭주 사건’에 아빠의 백합 중독 증세는 묻힐 줄 알았건만.

운 나쁘게도 황제의 귀에 든 모양이다.

“리아노 영식이 마법을 쓴 이유가 영애의 아비가 갑자기 쓰러져서라 들었다. 한데, 그 이유가 꽃가루 때문이라는 다소 터무니없는 보고가 있더구나.”

속을 꿰뚫어 보려는 눈동자가 하이에나처럼 빛났다.

황제는 내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자신이 들은 정보가 잘못됐다는 걸 확증받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오해하기 쉬운 상황이라 영애의 설명이 필요할 성싶어 불렀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차라리 의구심을 가진 상대가 모리스 대신관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내게는 모리스를 역으로 협박할 약점이 있으니까.’

하지만 황제의 경우에는…….

아빠가 수인족인 것을 들키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즉결 처형을 명령할지도 몰랐다.

당장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북방 국경 지역에 수인족 토벌을 성공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으니까.

‘황제는 대체 무엇 때문에 수인족을 싫어하는 거지?’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태연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떤 오해여?”

“꽃가루 반응은 선조 때부터 내려온 수인들을 구별해 내는 방법이다. 힘이 강할수록 거부 반응은 더욱 크고.”

“제게 무엇을 묻고 싶으신 건지 알게써요.”

내 입으로 직접 이든 라이언하트가 수인이라는 걸 시인하라는 뜻이겠지.

정황상 합리적인 의심이긴 했다.

이 세계관에서는 ‘꽃가루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전례가 없었으니까.

다시 말해서 <라이언하트 백작이 꽃가루 폭죽의 냄새로 인해 쓰러져서, 리아노 영식이 마법을 각성했다>는 보고를 받았던 것이다. 친밀해진 줄 알았는데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조금 서운했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그저 황제로서, 제국의 안전을 위해 위험의 씨앗을 제거하려는 것뿐일 테니.

“네게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편히 말해 보거라.”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게,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며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위기를 벗어날 큰 힌트이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 쥬실 꼬에요?”

깊어지는 눈동자가 잠시 적당한 단어를 선정하기 위해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술이 움직였다.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영애만큼은 처벌을 면할 수 있게 해 주겠다. 황실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이든 라이언하트가 수인일지라도 나는 살려 주겠다는 제안. 황제가 내게 호의적인 편이라는 걸 증명하는 바였으며, 동시에 이든에게 사망 플래그가 꽂혔다는 뜻이기도 했다.

황제는 내게 선택지를 주었다.

이든 라이언하트를 배신하고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와 함께 심판받을 것인가?’

고민은 짧았고 결심은 금방 섰다.

“있쟈나요, 사실은…….”

* * *

이든이 눈을 떴을 때, 그는 혼자 남겨져 있었다.

황실에 있는 동안 줄곧 무거웠던 머리가 맑아졌다.

‘그 꼬마 녀석의 솜씨인가.’

이든은 제 의식이 끊기기 전, 노아가 자신에게 치료 마법을 부리던 모습을 기억해 냈다.

딸아이의 눈물을 보고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던 보랏빛 마나가 떠올랐다. 살기가 담겨 있었다.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인물이 하나 줄어들었음을 어림짐작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어둠이 덮인 방 안을 헤집는 금안이 조급해졌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방 안.

어디에도 딸아이는 없었다.

“루나.”

혹여나 제 눈이 작은 몸집을 놓친 건가 싶어 입 밖으로 내뱉어 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가슴 속에 선연한 바람이 스쳤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내빈실을 나섰다. 노아의 마법 덕분인지 더는 숨 쉬는 것도 괴롭지 않았다.

동궁으로 이어진 복도 쪽에서 미미하게 딸아이의 체취가 났다.

‘늦은 시간에 혼자 어디를 간 거지?’

그는 체취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지나는 길에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잠을 청하지 않고 복도를 서성이는 이들이 많았다.

빠르게 그들을 지나치려는데, 쑥덕거리는 작은 소리가 고막을 사로잡았다. 청력이 뛰어난 그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소리였다.

“라이언하트 백작께서 깨어나셨네요.”

“아까 그 마력 못 보셨어요? 한데 저렇게 돌아다니게 둬도 될는지…….”

“쉿, 아직 확실한 건 아니고 추측일 뿐이잖아요.”

분명 이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벌써 소문이 퍼진 모양이군.’

평소의 그 같으면 혹시 모를 뒷일을 대비해 그들을 처리할 방법을 모색하는 걸 우선시했을 테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럴만한 심적 여유가 없었다.

이든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딸아이를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우선이 될 수 없었다.

‘황제를 보러 간 건가?’

이 늦은 시간에 굳이 그럴 이유는 없을 터. 차라리 황제의 호출을 받고 간 쪽이 더 논리적이었다.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최악의 경우는 루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복수는…….’

후일로 미룬다.

그간 투자했던 시간과 노력이 무산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우선순위가 바뀐 지는 오래였다.

다급한 발걸음이 막 동궁 중앙에 다다랐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라이언하트 백작. 벌써 몸은 회복된 건가?”

“…….”

“안 그래도 회복하는 대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잘됐군, 그래.”

등 뒤에서 들려온 황제의 목소리에 두 다리가 멈췄다.

이든에게는 일말의 평정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간 잠들어 있던 잔혹성이 서서히 고개를 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빠! 몸은 괜챠나요?”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져졌다. 그것이 마치 제어 장치라도 되는 것처럼 이든의 속은 빠르게 차분해졌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뒤돌아선 이든은 황제의 품에 안겨 있는 딸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무탈했다.

어디 다치지도, 협박을 당한 것 같지도 않았다.

“루나.”

단숨에 다가간 이든이 아이를 제 품으로 돌려받았다.

황제는 예를 갖추기도 전에 제 아이를 챙기기 급급한 이든을 나무라지 않았다. 무릇 부모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그 역시 알고 있었으므로.

“이 야밤에 본의 아니게 놀라게 했군, 그래.”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경계심이 다분하게 보이는 질문이었다.

“그대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어 불렀지.”

자신에 관해서라면…….

이든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동궁으로 오는 길 내내 귀족들이 떠들어댔던 주제.

[이든 라이언하트 백작이 쓰러진 게 꽃가루 때문이라며?]

수군거리던 음성이 여태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일이 커지기 전에 황제의 목을 비틀어 버리는 것.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뒷감당 따위 두렵지 않을 만큼 그는 강했으니까.

인간은 수인보다 약하다. 특히나 수인족 우두머리인 이든에게 있어서 나이 든 황제는 시시한 사냥감에 불과했다.

“루나에게 얘기는 들었네. 자네가 꽃가루 때문에 쓰러진 이유에 대해서 말이야.”

“……루나가 직접 말입니까?”

가슴 언저리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리니 동글동글 곱게 빗어 놓은 밀가루 반죽이 저를 보며 헤실헤실 웃고 있다.

‘아빠. 걱정 마세요.’

소리 없이 입만 벙긋벙긋하는 모습이 와중에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이든은 순간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걸 아예 잊어버렸다. 홀린 듯이 손가락을 뻗어 통통한 뺨을 만지작거리기 바빴다.

“하마터면 짐이 라이언하트 가문을 크게 오해할 뻔했어.”

이든의 움직임이 멈췄다.

오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황제를 바라봤다.

“그대가 영애와 함께 제국을 위해서 힘쓰고 있었다는 걸 진즉 말해 줬으면 내 그리 무례한 질문도 하지 않았을 것을.”

갈수록 알 수 없는 말이 되어 버려서 이든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재미있었는지 아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으흥흥.”

북방의 만년설 같은 이든의 마음을 녹여 낸 것은 이번에도 이 작고 하찮은 존재였다. 마성의 웃음소리에 제 입꼬리를 저당잡힌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당황스러워할 필요 없네. 굳이 공로를 내세우고 싶지 않아서 비밀로 연구했다는 것도 다 전해 들었으니까.”

연구라니, 그러니까 뭘?

대화의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황제가 그에게 매우 호의적이라는 것만큼은 느껴졌다.

딸아이가 무언가 또 해 놓은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식대로 말하자면 ‘치트키’를 사용한 거겠지.

“꽃가루 반응은 연구의 부작용 중 하나였다지?”

이어진 황제의 말은 이든의 잔혹한 본성을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모두 제 품 속의 작고 무용한 존재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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