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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101/142)

101화

나는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

목숨을 건 승부수지만, 그것만이 이 사망 플래그로부터 우리 식구들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있쟈나요, 사실은……. 실험을 하고 있어요.]

[실험이라니? 무슨 실험을 한다는 것이냐?]

[츄릅츄릅 병에 이어서 또 다른 변이 전염병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여.]

[무어라?]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츄릅츄릅 병 이후로 에덴 제국을 뒤흔들 만한 큰 병은 언급된 바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뻔뻔하게 황제를 속였다.

우리 식구들을 지키기 위해서!

[녜. 만일을 위해서 치료제를 만들던 중이었어요. 폐하께서도 아마 아시겠지만, 제가 좀 천재쟈나요.]

[그렇지.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츄릅츄릅 병으로 제국의 타격이 막대할 뻔했으니까.]

[그때도 미리 연구를 해 놓은 덕분에 바로 치료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거거든여.]

속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무릇 인간이란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공포에 쉽게 굴복하는 법이니까.

그것이 과거로 미리 학습된 두려움이라면 더욱 설득하기 쉬웠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또 다른 전염병이 돈다는 뜻인가?]

[대비는 언제나 먼저 이뤄져야 하는 법이니까여.]

[그럼 라이언하트 백작이 보인 증세가…….]

[녜. 수인이라는 증거가 아니에요. 이번 치료제 개발에 부작용이거든요.] 

마지막에 눈물을 글썽이는 것으로 화룡점정을 장식하니, 황제는 당혹스러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로써 이 판은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셈이었다.

[……실은 아빠가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서 연구를 비밀로 하라고 하셨는뎨. 제가 다 말해 버려써요. 전 못된 딸이에오.]

[뚝 하거라, 뚝. 저런 그것도 모르고 짐이 오해할 뻔했군.]

[그럼 우리 아빠 안 혼내실 거져?]

[도리어 상을 줘도 모자란 상황인 것 같구나.]

[약소옥.]

훌쩍이며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어린아이를 매몰차게 외면할 수 있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황제는 결국 나의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뚝> 작전에 완벽히 굴복하고 말았다.

으흥흥. 완벽해.

* * *

황제는 내가 열변을 토해 말한 아빠의 희생정신에 몹시 감격한 눈치였다. 우리에게 가정의 달 마지막 날 행사에 참여할 기회를 줬다.

그건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무려 대신전 출입 허가권을 준다는 거였으니까!’

이런 방법으로 얻게 될 줄은 몰랐지만, 뜻밖의 행운에 마음이 들떴다.

앞으로도 황실에서 라이언하트 가문을 지켜보겠다는 황제의 약속을 끝으로 대화는 막을 내렸다.

‘이로써 우리도 기반을 제대로 다질 수 있게 됐네.’

이번 일은 라이언하트 가문에게 확실히 이득이었다. 자칫하면 사망 플래그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을 무사히 넘기는 것도 모자라, 황실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게 된 셈이니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빠는 서궁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의 품에 달랑달랑 안겨 눈치를 살피던 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빠. 저 잘해쬬.”

“…….”

우뚝 멈춰선 그가 말없이 나를 내려다봤다.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의 영향 때문일까. 그의 기분이 유독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났나?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는데, 다행히도 그가 먼저 침묵을 깨 줬다.

“조그만 게 겁도 없는 게 문제다. 황제가 속지 않았더라면 어떡했으려고.”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쟈나요.”

“반대의 경우에는 최악이 될 뻔했지.”

엄격한 말투 안에는 초조함이 엿보였고 얼핏 안도감이 보이기도 했다.

“불리한 상황에서 판을 확실히 뒤집는 방법은 모든 걸 건 승부수뿐이라고 배워써요.”

“다음부터는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다.”

확실히 이든의 말대로 위험한 묘수이긴 했다.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들켰다가는 황족 모독으로 나부터가 심판받았을 테니까.’

물론 믿는 구석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츄릅츄릅 병 치료제 개발과 황실 요리배 대회 우승부터 시작해서, 츄르와 릴까스 사업의 연이은 성공, 그리고 기부 행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표한 올해의 어린이가 되기까지.

그간의 노력들이 빛이 발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황제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는 이미 내게 오래전부터 푹 빠져 있었는걸?

“그 덕분에 우리는 엄청난 이득을 얻었쟈나요.”

“반드시 그런 식으로만 얻을 수 있는 이득이라면 필요 없어.”

“그렇지만 아빠의 복수를 위해서…….”

“네가 더 중요해.”

나를 끌어안은 이든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황금안이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강하게 시선을 옭아맸다.

“너마저 잃어버리면,”

……그땐 정말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그가 짓이겨 뱉은 속마음이 내 어깨 위를 감싸 안았다.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지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전해졌다.

어쩐지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런 일 없이 우린 행복해질 꼬에요. 예지몽을 꿔서 알아요.”

나지막이 거짓을 속삭였다. 그것이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아직 상처가 덜 아문 밤이 조용히 깊어갔다.

* * *

다음 날, 연회의 네 번째 날이 밝았다.

간밤의 걱정과 근심은 새벽안개 속에 잠시 묻어 두고, 각자에게 주어진 오늘을 묵묵히 감내하기로 했다.

“아가님, 가져가실 것은 다 챙기셨습니까?”

“녜. 엘코어랑 신문! 잘 챙겼슴미다!”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챙기는 리챠드와 함께 도토리 가방 속에 루나 신문사의 첫 간행물을 잘 챙겼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내빈실을 나섰다.

“그럼 아가님, 각하. 두 분 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녜. 다녀올께오, 리챠드.”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도와준 리챠드의 마중을 받으며 이든과 함께 대신전으로 향했다.

연회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대신관에서 주체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이 행사는 ‘참여 가문의 안위와 행운을 빌어주는 의식’을 진행하기도 하고, ‘대신전 벽화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의미 있는 행사인 만큼 신전의 출입 허가권을 받은 일부 가문들만 참가가 가능했다. 대부분이 모리스 대신관을 지지하는 기문들이었다.

그렇기에 대신전 앞에서 사람들을 맞이하던 모리스 대신관이 우리를 보고 멈칫한 것은 예견된 반응이었다.

‘이놈들이 여기 왜 온 건가 싶겠지?’

나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눈을 굴리기 바쁜 모리스에게 보란 듯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안뇽하세요, 대머리스 신관밈!”

“무어라?”

“앗차차, 실수 실수. 모리스 대신관밈.”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나는 아빠의 품속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을 참으며 분위기를 살폈다. 대충 보니까, 간밤에 황제 독단으로 결정된 사안에 대해 아는 이들은 없는 듯싶었다.

내부까지 참가하는 가문 외에도 대신전 앞으로 구경 나온 일반 귀족 가문들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가뜩이나 올해는 리아노 공작의 부상과 다페 남작의 근신으로 인해 참가자 명단이 적었는데, 뜻밖의 가문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라이언하트 가문이 여긴 어쩐 일이지?”

“그야 출입 허가권을 받았으니까여?”

“그게 무슨 소리냐. 내게는 그런 기억이 없거늘.”

정색하며 말하는 모리스 대신관 뒤로 마침 황제가 나타났다.

“짐이 직접 초대했다.”

“폐하! 안녕히 주무셨어오?”

“영애도 간밤에 잘 잤는가?”

“그럼요. 황졔 폐하와 산책을 해서 그런지 잠이 솔솔 와써요!”

황제와 곧잘 두런두런 떠드는 모습에 모리스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갔다.

‘언제 이렇게 더 가까워졌나 싶지?’

나는 그를 향해 몰래 콧방귀를 흥 뀌어 줬다.

“폐하…… 제게 상의도 없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무에게나 출입을 허락하시면,”

“왜요? 이 제국에서 황졔 폐하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는뎨, 왜 그러면 안 돼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꼬리를 물고 질문을 던졌다.

이건 황제의 권위를 치켜세워 주는 것은 물론이오, 라이언하트 가문에서 황제 라인 쪽에 서겠다는 것을 표명해 주는 거기도 했다.

“…….”

어린아이의 순수한 얼굴로 가장한 뼈 때리는 질문에 모리스의 윗입술이 꿈틀거렸다. 그는 차마 노발대발하지는 못하고 조용히 분노를 삼켰다.

“그리고 왜 우리가 아무나예여? 황졔 폐하께서 둘도 없을 공신이고 충신이랬는뎨.”

그렇죠, 폐하?

동의를 구하듯 넌지시 눈빛을 던지니 황제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이토록 최선을 다할 가문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어제의 꽃가루 소동도 다 짐의 오해였다는 게 밝혀졌네.”

충격적인 소식에 모리스 대신관은 물론이고 구경 나온 일반 귀족들도 듣고 놀라는 반응이었다.

“꽃가루 소동이 오해였다고?”

“그 말은 라이언하트 백작께서 수인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폐하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그런 것 아니겠소?”

“역시, 저는 크나큰 오해일 줄 알았다니까요.”

어제까지만 해도 아빠를 두려움의 눈으로 보던 이들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참으로 씁쓸한 현실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우리가 무사히 사망 플래그를 벗어났다는 증표이기도 했으니 다행이었다.

“라이언하트는 사실 얼마 전부터 제국의 앞날을 염려해 새로운 백신을 만들고 있었다 하더군.” 

황제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들에게 어젯밤 내가 했던 거짓말을 그대로 전했다.

“―이러한 연유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세.”

황제의 대변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발 없는 말은 천 리를 가기 쉬우니, 이 소문은 점심도 되지 않아 황궁 벽을 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빠에 대한 의심도 어느 정도 거둬질 테고, 감명 받은 이들 중에 우리 가문을 지지하는 자들도 생길 터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의미는 ‘황제와 라이언하트 가문’이 결탁했다는 거였다.

‘현재 제국에서 제일 중심이 되는 가문이 황권을 지지하고 나서면, 반대로 대신전의 힘이 약해진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모리스 대신관의 기선을 제압하고 들어간 셈이다.

나는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모리스 대신관에게 천연한 얼굴로 말했다.

“멀뚱멀뚱 서 있지 말구, 이졔 들어갈까요? 해야 할 일이 많쟈나요.”

오늘 몫의 복수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렇게 분해하시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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