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42)

102화

대신전은 소설 속 묘사대로 아름다웠다. 높은 천장 밑으로 이어진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태양의 움직임을 따라 시시각각 여러 빛을 품었다.

“우와아. 예쁘댜.”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감탄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모리스 대신관은 대열의 선두에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

뒤따라오던 노아가 내게 질문했다. 그는 오늘 참석 허가권을 인정받은 모든 이들이 그렇듯, 가문의 인장이 수놓인 예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응. 상상했던 것보다 더 반짝반짝하고 예쁜 곳이녜.”

이곳이 훗날 노아가 흑마법에 점점 물들게 되는 끔찍한 공간이 될 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찬찬히 대신전의 구조를 살피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노아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엄청 반짝반짝해.”

“그나저나 떨리지는 않아? 오늘 노아가 공쟉밈 대신에 대표로 서야 하쟈나.”

“응. 루나 네가 걱정해 주니까 괜찮은 것 같아.”

리아노 공작은 허리 부상으로 인해 오늘 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 대신 노아가 가문을 대표해서 섰다. 꽤 부담스러운 자리일 텐데도 노아는 긴장한 기색 없었다.

이런 게 주인공이라는 걸까?

새삼스럽게 그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보고 있으면 괜스레 마음이 따뜻했다.

“루나, 네 손 잡고 가도 돼?”

“응! 당연하지.”

제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묻는 노아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꼬맹이. 대신관이 부른다.”

아빠가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

그 덕에 갈 곳을 잃은 손이 덩그러니 허공에 남았다. 노아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툴툴거렸다.

“일부러 방해하시는 거죠.”

“내가 굳이 그런 유치한 짓을 할 리가.”

노아에게 보란 듯이 내 손을 잡은 이든이 턱을 치켜들었다.

‘유치한 거 맞으시면서.’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려다가 말았다. 우리 사자님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여서.

마치 고양이가 꽤 마음에 든 실타래를 남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털을 바짝 세운 모습이랄까.

“의식 끝나고 보쟈, 노아.”

“벽화 보러 갈 땐…… 내 손도 잡아 줘야 해. 알았지?”

아쉬워하는 그를 달래서 보내고 이든과 둘만 남았다.

우리도 각자의 정해진 자리로 가야 했다. 아빠는 ‘가주 전용석’으로, 나는 ‘참관인 지정석’으로.

“우리도 갈까여?”

“알았다.”

대답은 곧잘 해놓고서 정작 손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슬슬 제 자리를 찾아서 앉아 가는데, 우리만 지정석이 아닌 곳에 있었다.

“아빠?”

“그래, 가 봐도 좋아.”

언행 불일치라는 말은 지금을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손을 놔줘야지 가죠.”

“알고 있어.”

오히려 잡은 손에 힘을 실었으면 더 실었지, 풀어 줄 기미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

“…….”

소리만 내지 않았다뿐이지, 이든은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알아써요. 아빠 손도 잡아 줄 톄니까 화내지 마여.”

정말 유치한 사자님이라니까. 

* * *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의식이 시작됐다. 그럴듯한 예복을 차려입고 나온 모리스 대신관이 제단 앞에 섰다.

“제국을 굽어살피시는 유일신께 한 해 동안의 안위와 평강을 간구하나니. 길 잃은 어린양을 인도하소서.”

그는 활활 타오르는 불 앞에 경건한 자세로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척만 했다.

말 그대로 ‘척’만.

‘왜냐하면 모리스 대신관은 신력이 없는 자거든.’

그는 가짜 대신관이다.

젊었을 적에는 신력이 출중한 편에 속해서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덕에 지금의 자리에 오른 거지만…….

‘세월이 갈수록 신의 은총을 잃은 케이스지.’

모리스가 완전히 신력을 잃는 것은 노아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노아의 각성 이후로 그의 힘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엊그제 노아가 마력 폭주를 해 버렸으니.

급격히 불안정할 터.

“라이언하트 영애, 하나 뽑도록.”

때마침 내 앞으로 다가온 모리스가 나무함을 내미는 통에 길게 이어지던 상념은 끝이 났다.

어느덧 포춘 쿠키를 뽑는 시간이 된 모양이다. 둘러보니 다른 이들은 모두 제 몫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가장 끄트머리에 앉은 내가 마지막 차례였다.

“영애의 한 해를 점칠 수 있는 포춘 쿠키이니 경건한 마음으로 임하라.”

“녜.”

나무함 속으로 손을 쑥 넣어 반달 모양으로 접힌 쿠키를 하나 뽑아 들었다.

모두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나는 천천히 포춘 쿠키를 반으로 갈라 안에 적힌 종이를 펼쳐 보았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네게 절하리라.>

이게 무슨 뜻일까.

내가 글귀를 거듭 곱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자, 모리스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종이를 빼앗아갔다.

빠르게 읽어 내린 그의 눈동자가 곧 사납게 변했다.

“……감히 네까짓 게 분수에 넘치는 것을 뽑았구나.”

그는 음성을 한껏 낮춰 나에게만 들리게끔 빈정거렸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그에게는 썩 달가운 내용은 아닌 모양이다.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그저 찰나의 영광일 뿐. 착각하지 마라.”

“뭐를 착각해여?”

“네 그 명성을 믿고 계속 설치고 다니는 것 같은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음험한 협박이 어깨를 짓눌렀다.

나를 겁줘서 울릴 작정이라도 한 건지 결코 어린아이를 볼 때의 눈빛은 아니었다.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우리가 방해되었으니 그럴 만도 한가?’

다페 남작은 검투장 사건으로 인해 근신 중인 상태고, 리아노 공작은 허리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상태이니 어지간히 답답할 것이다.

게다가 제일 최측근으로 부리던 피터 사제는 노아의 각성 이후로 병상에 누워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직접 움직인 거겠지?’

늘 남을 앞세워 분탕질하기 바빴던 흑막이 이렇게까지 직접 나서는 걸 보니, 판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충고 하나 드릴께여.”

“뭐? 이 건방진…….”

“대신관밈이야 말로 죠심하시는 게 좋을 거에여.”

“하? 이제 정말 라이언하트 영애는 뵈는 것이 하나도 없어졌나!”

내 도발에 흥분을 참지 못했는지,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목이 더욱 집중됐고, 반대편의 가주 전용석에서 이든이 벌떡 일어선 게 보였다.

“무슨 일이래요?”

“글쎄요. 영애께서 뽑으신 게 심상치 않은 내용인가 봐요.”

귀족들의 쑥덕거림은 아치형 천장에 부딪혀 홀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무언가 찜찜한 분위기를 느낀 이든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중앙 제단을 성큼성큼 건너왔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아빠를 보면서 도토리 가방에서 신문을 꺼냈다.

“거짓말은 작작 하시는 게 좋을걸여?”

“지금 누구 안전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재능이 아깝네요. 대신관밈은 오페라 배우를 하셨어도 성공했을 거 같은뎨.”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모리스의 미간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나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루나 신문사에서 처음으로 발행한 신문을 그에게 쥐여 주었다.

“그동안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인 것또 다 그 재능이 아닐까 싶어서.”

“또 무슨 교활한 짓거리를 꾸미는지 모르겠으나, 후회하게 해 주마.”

“아이 챰, 후회는 그쪽 몫이라니까여. 안 읽어 보시면 두고두고 후회하실 텐데.”

덧붙이는 말이 찝찝하게 들렸는지 모리스는 급히 신문을 열어젖혔다.

“……!”

빠르게 지면 위를 굴러 내려가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차츰 느려졌다.

“대신전 자료들을 갑자기 소각한 이유와 몰래 출입한 조각가의 정체는 뭘까여?”

나는 모리스의 낯빛이 변하는 과정을 눈에 담으며 말을 이어갔다.

“또 누가 배후에 있는지 대신관밈도 궁금하지 않아요?”

“……지금 나를 겁박하려는 것이냐?”

천연덕스러운 나와 달리, 분개한 모리스의 낯빛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익었다.

“글쎄요.”

어느덧 다가온 이든을 향해 팔을 뻗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나를 품에 안은 이든이 모리스를 사납게 내려다봤다.

“내 따님께 무슨 볼일이지.”

아빠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지자, 아까부터 힐끗힐끗 이쪽을 곁눈질하던 귀족들의 입술이 분주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봐요.”

“모르긴 몰라도 라이언하트 쪽의 잘못은 아니겠지요.”

빈주먹이 잘게 떨리는 걸 보면, 모리스도 두 귀로 똑똑히 들은 게 틀림없다.

“라이언하트 백작.”

그는 당장에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래 봤자 우리 아빠한테는 한 주먹 거리도 안 되겠지만.

“너희 두 부녀를 내 똑똑히 기억하마.”

한 발짝 거리를 좁힌 모리스는 아빠와 나를 차례대로 노려보며, 작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애송이 주제에 황제를 어떻게 구워삶아 놓은 건지, 잘도 빠져나갔더구나.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가 모를 것 같으냐? 다른 멍청한 인간들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나는 속일 수 없어.”

“내 딸을 그딴 식으로 부른 놈들의 최후가 어찌 됐는지 아직 소문을 못 들었나 보군.”

아빠는 역시 그런 소리를 순순히 듣고만 있을 분이 아니었다. 곧잘 맞받아친 덕분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모리스는 이든이 ‘수인’일 거라는 의심을 아직 거두지 않은 모양이다.

비록 당장은 내 순발력으로 대처를 해 놨지만, 앞으로도 계속 의심을 할 듯싶었다.

‘질기게 물고 늘어지겠지. 그에 대한 대책이 필요할 거야.’

나는 보석이 박힌 엘코어를 만지작거리며 추악한 낯짝을 바라봤다.

‘내가 조금만 더 컸어도 저 얄미운 정수리에다가 확 주먹 감자를 먹여 주는 건데.’

그러다 문득 엘코어의 보석 끝자락에 빛이 반사된다는 걸 깨달았다.

‘어라?’

엘코어를 요리조리 움직일 때마다, 보석의 각도에 따라 모리스의 평평한 이마에 동그랗게 맺힌 빛이 따라 움직였다.

이를테면 레이저 포인터 같았다.

목걸이를 오른쪽으로 슬쩍 기울이면 동그란 빛이 오른쪽 이마로 옮겨졌다.

왼쪽으로 기울이니, 이번에는 빛이 왼쪽 이마로 옮겨졌다.

‘어라라라? 이거 어쩌면.’

슬쩍 고개를 올려 이든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수가 생각났다.

아아. 난 영락없는 악당의 딸내미가 맞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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