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눈앞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고 덤덤할 고양이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뭐. 특이 케이스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확실한 건 그게 우리 사자님은 아니라는 거다.
쇽쇽.
엘코어에서 반사되는 동그란 빛을 쫓는 동공의 움직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사자님은 도저히 본능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쇽쇽.
집요하게 레이저 포인터를 쫓는 대형 고양이의 동공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이봐, 라이언하트 백작.”
모리스가 정신이 딴 곳에 팔린 이든을 보며 인상을 썼다.
그러나 아빠는 답을 하지 않았다.
관심이 온통 모리스의 넓적한 이마 위에 가 있었다.
‘아빠. 오늘 하루만 악당 딸내미 할게요.’
속으로 조용히 사과를 속삭인 나는 엘코어를 쥐고서 미친 듯이 흔들기 시작했다.
좌로 쇽쇽!
우로 쇽쇽!
모리스는 제 이마 위에서 엘코어 보석에 반사된 빛이 광란의 사이키 조명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아빠의 손에 드릉드릉 시동이 걸리는 게 보였다.
‘슬슬 반응이 오겠는데?’
으흥흥. 벌써부터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느라 혼났다.
“건방진 것들. 주제 파악 못 하고 날뛰는 너희 가문을 내 발치에 꿀려 주겠다. 특히 너.”
거칠게 뱉어진 음성이 모리스 내면의 분노를 대변해 줬다. 나를 노려보는 늙은 족제비 같은 눈은 몹시 불쾌했다.
분개한 모리스 대신관이 속의 것을 터트려 내며 나에게 저주를 퍼부으려는데,
“애송이 주제에 감히!”
챱!
사자님의 커다란 손바닥이 찰진 소리를 내며 모리스의 이마를 내리쳐 버렸다.
어찌나 세게 때린 건지.
손바닥 자국이 고스란히 빨갛게 생겼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얼이 나가 있던 모리스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모리스가 역정을 토해 내며 고함을 쳤다.
“아이코. 하도 앵앵거려서 모기인 줄 아셨나 보다.”
나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과 목소리로 응답했다.
주변인들의 입술이 웃음을 참아 내기 위해서 급격히 오므려지는 게 보였다.
“이것들을 진짜!”
와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날뛰는 모리스의 이마 위로 다시 슬그머니 엘코어에 반사된 빛을 기울였다.
찰싹!
이번에는 얼굴 정면에 손바닥 자국이 남아 버렸다.
“아이코. 이놈의 모기가 벌써부터 기승이라 시끄러워 죽게써, 아주.”
마지막까지 약 올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무릇 그것이야말로 악당 딸내미로서의 기본적인 소양 아니겠는가?
* * *
황제와 노아가 함께 나서서 우리를 지지해 준 덕분에 모리스 대신관의 화풀이는 막을 수 있었다.
솔직히 조금 통쾌했다.
그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그간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겠지만, 사사건건 간섭하고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던 대신관이 내심 못마땅했겠지?’
황제는 확실히 라이언하트 가문이 자신을 지지한다는 걸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다들 먼저 이동하도록 하지.”
체면이 상한 대신관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황제가 대신해서 남은 행사를 주도했다.
나는 황제의 뒤를 쫄쫄쫄 쫓아가며 질문했다.
“폐하. 다음 차례는 모에요?”
“다음은 에덴 제국의 고대 기록이 담긴 벽화에 소원을 빌러 간단다.”
“소원을 빌면 이뤄져여?”
“벽화 속에 잠들어 있는 요정들이 영애의 소원을 듣고, 모두가 잠든 밤 소원을 들어주러 올 것이다.”
에이, 거짓말. 나는 그게 어린아이의 동심을 지켜 주기 위한 어른의 배려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짐짓 속는 척을 해 주었다.
나름 어린아이에게도 어른의 배려를 지켜 줘야 할 막강한 책임감이 있으니까.
“폐하께서는 매년 무슨 소원을 비시는뎨요?”
“보통 제국의 안녕과 가족의 건강을 빌곤 하지.”
“폐하께 딱 맞는 소원이녜요.”
“라이언하트 영애는 무슨 소원을 빌 생각인가?”
“으음, 저는…….”
솔직히 미신 같은 건 믿지 않지만,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언제나 든든한 내 편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권태로움을 느끼던 황금 눈동자와 보랏빛 눈동자에 일순 초롱초롱 생기가 돌았다.
‘아빠랑 노아가 이번 일로 고생이 많았지.’
이든은 백합 중독증 때문에 고생했고, 노아는 본의 아니게 마력 폭주를 경험했다.
모두 4일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저는 졔가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써요.”
“하하하! 참으로 라이언하트 영애다운 소원이구나.”
나름 진지한 소원이었는데, 뭐가 그를 재미있게 한 걸까?
“비웃은 건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그저 기특해서 그럴 뿐이야, 기특해서.”
“뭐가 기특해여?”
“보통은 영애 나이 때 갖고 싶은 장난감을 사 달라고 하거나 예쁜 드레스를 사 달라고 비는데, 영애는 참으로 한결같군.”
앗. 그러고 보니 너무 세상 다 산 늙은이 같은 소원이었나.
괜히 머쓱해져서 볼을 긁적이는 나를 보며 황제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영애의 가족들은 좋겠군그래.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께서 행복을 빌어주니 말이야.”
“폐하께서도 포함인뎨요?”
“……짐도 말인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황제는 멍해졌다.
“녜. 제가 사랑하는 분들에 폐하도 속하셔요.”
남을 괴롭히고 짓밟는 것을 행복의 거름 삼는 못된 빌런들 없이, 모두가 각자의 행복을 좇았으면 좋겠어요.
덤덤히 속마음을 토해 내고 있는데, 불쑥 두 남자가 난입했다.
어쩐지 황제를 향한 눈빛이 상당히 불손해진 이든과 노아였다.
“루나, 네 취향이…… 황제였어?”
“내 따님께서는 황제를 사랑한다…… 메모.”
아니 뭐라는 거야, 이 남자들?
뭔가 말리지 않으면 커다란 일을 벌일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러고도 남을 자들이었다.
“멈쵸! 이상한 생각 멈쵸!”
깡충깡충 뛰며 불공한 두 남자의 눈빛을 가리려 애썼다.
“허허허! 화목하군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황제는 뭐가 재미있는지 웃느라 바빴다. 방금 자기의 목숨이 엄청나게 위험할 뻔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얼른 벽화에 소원 빌러 가여, 얼른!”
한 손에는 노아 손을, 반대 손으로는 아빠의 손을 잡고 겨우겨우 벽화가 있는 방에 도착했다.
* * *
예언의 벽화가 있는 방은 대신전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출입이 통제된 공간이었다.
“편히 둘러보도록.”
황제는 엄선된 인원에게만 벽화가 있는 방에 들어가기를 허락했다.
이든과 나, 노아. 세 사람은 황제가 택한 인원에 속해 있었다.
“엄청 크댜.”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벽화를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거대한 예술 작품을 마주하니 발끝에서 어떤 이름 모를 전율 같은 게 흘렀다.
“루나 네가 이런 반응일 줄 알았어.”
노아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이 큭큭 웃었다. 평소 같으면 그를 따라 웃거나 했을 텐데, 나는 홀린 듯이 벽화만 바라보고 있었다.
벽화의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껴진 이상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뎨…….”
“처음 와 보는 거 아니야?”
“응, 처음이지.”
진즉 죽었어야 할 엑스트라인 내가 여기 와 볼 일이 뭐가 있겠어.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소설로 읽은 기억이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차피 머리를 싸매 봤자 답이 나올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았으니까.
“뭐, 내 착각이겠지.”
“그럴 수도 있겠다.”
나를 빤히 응시하던 노아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그럼 일단 벽화부터 볼까? 루나 너 엄청 궁금해했잖아.”
“응. 그럴래.”
눈을 부릅뜨고서 관심을 돌렸다.
‘그러니까 여기 중 어딘가를 모리스 대신관이 조작했다는 거지?’
비교적 최근에 손을 댔으니 흔적이 남아 있을 터였다.
‘다소 급하게 일을 처리한 걸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던 건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차츰 신력을 잃어가는 모리스 대신관이 가짜 신의 예언을 만들어 냈던 건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직 신력이 건재하다는 걸 증명해서 대신관의 능력을 입증하려는 계책.’
보통 그런 경우는 신년제나 기우제 같이 ‘신의 예언’을 받는 모습을 보여 주기식으로 증명해야 하는 행사에서나 그랬다.
그런데 이번 벽화 주작은 아무도 몰래 행한 것이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이!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 거지?’
무엇이 두려워서?
‘대신관의 자리를 위협할 만한 존재가 등장하기라도 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추측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니 제외하지는 않았다.
“아빠, 노아랑 같이 이쪽을 살필게여.”
“나는 반대편을 보고 오겠다.”
벽화가 워낙 클뿐더러, 너무 다양한 그림이 빼곡히 차 있어서 주어진 시간 안에 다 보려면 찢어져서 각각 봐야만 했다.
이든과는 이미 상의된 것이기 때문에 그가 반대쪽에서 예리한 눈을 빛내며 벽화를 둘러보았다.
“그럼 우리듀 이쪽을 봐 볼까?”
“그래. 손잡고 보자, 루나.”
“으음, 그건 죠금 효율이 떨어지지 않을까?”
“아니야. 손을 잡아야지만 집중력이 높아진 댔어. 연구 결과도 나왔는걸.”
“무슨 그런 이상한 연구가 다 있뎨?”
노아는 질문을 못 들은 척 내 손을 잡았다. 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노아가 슬쩍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혹시…… 내가 손잡는 게 싫으면 말하고.”
대관절 관찰력과 손을 잡는 것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딱히 기분 나쁜 일은 아니기에 그냥 그러고 있기로 했다.
“안 싫어, 노아쟈나.”
“나도 루나 너라서 좋아해.”
……얘는 진짜 가끔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니까.
정말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돌직구였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 보라색 눈동자가 너무 지나치게 투명해서 그런가.
심장에 뭐라도 낀 것처럼 간질간질했다.
사자님의 꼬리털이 끼기라도 한 걸까?
더 있다가는 괜스레 몸을 배배 꼬고 싶은 기분이 될 것 같아서 걸음을 옮겼다.
“얼른 보쟈. 시간 없어.”
잔잔히 울려 퍼지는 노아의 웃음소리가 더 간지러움을 증가시켰다.
‘으음……, 웃음 알레르기라도 생긴 건가?’
어쩐지 신경 쓰이는 왼쪽 가슴을 긁으며 벽화에만 관심을 두려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