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노아와 내가 살펴본 쪽은 다양한 종의 동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오래 보다 보니까 ‘월x리를 찾아라’를 보는 기분이었다.
“크게 이상한 점은 없녜.”
반쯤 살펴봤는데도 딱히 티 나는 구간은 없었다.
‘흐음.’
이쪽은 아닌 걸까?
아직 살펴볼 그림이 조금 남아 있긴 하다만.
혹시 반대편에서는 발견된 게 있나 싶어서 이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든이 심각한 얼굴로 한곳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뭔가 발견한 건가?’
그를 부르려던 나는 순간 눈을 의심하고 멈칫했다.
‘어?’
주변을 슬쩍 살피던 이든이 슬그머니 날카로운 발톱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발톱이 아니라 손톱이라 해야 하는 건가……?’
그건 둘째 치고…… 저게 막 부분적으로만 꺼냈다가 넣었다가 할 수 있는 거였어?
울버린이야 뭐야.
사자님의 발톱이 휴대성이 뛰어났다는 사실에 놀란 것도 잠깐.
더 큰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으엉?!”
뭐 하시는 거야 지금?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사자님께서 남의 시선을 피해 날 선 발톱으로 벽화를 벅벅 긁고 계시는 건…….
‘제발 내가 잘못 본 거라 해 줘!’
신성한 고대 벽화를 훼손시킨다는 건 엄청난 범죄였다. 현행범으로 걸려서 그대로 쫄랑쫄랑 법정행 마차를 탈지도 몰랐다.
‘모리스 대신관의 비리를 밝힐 생각이었지, 우리가 잡혀 들어갈 계획은 아니었다고요!’
무언가에 꽂힌 고양이의 집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나로서는 불안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노아, 잠시만.”
나는 노아에게 잠깐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달라 부탁하고, 부랴부랴 아빠에게로 달려갔다.
“아빠 뭐 하고 이써요.”
이런 남의 속도 모르고.
사자님께서는 멈추지 않고 벅벅벅, 삼매경이셨다.
“잠깐만.”
아니, 잠깐이고 나발이고.
우리가 리챠드 똥이 되게 생겼다니까요?
벅벅벅.
날카로운 발톱이 벽화를 긁어내릴 때마다 파스스스,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아아. 저 돌가루가 내 암담한 미래를 보여 주는 걸까.
목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았다.
“손톱이 간지러워요? 집에 가서 제가 스크래쳐 만들어 드릴 테니까 일단 멈쵸 봐요.”
안절부절못하며 이든의 팔을 붙잡고 뜯어말리려 했으나, 내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으잇, 정말! 멈추라니까!”
“조금만 더 파 보면 알 것 같다.”
이미 벽화에 꽂혔구나. 사자님은 대형 고양이답게 고집스러운 구석이 확실히 있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였다.
저 벽화가 파멸을 맞이하든가, 아니면 사자님의 흥미가 떨어지든가.
이든은 나를 단단한 팔뚝에 대롱대롱 매단 채로 벅벅벅벅 열정적으로 긁어 댔다.
벅벅벅.
―파스스스.
벅벅벅벅.
―파스스스스스.
공기 중에 흩날리는 돌가루와 함께 사자님의 팔뚝에 매달린 내 몸이 빨랫줄에 걸린 빨래처럼 흔들렸다.
으아아아. 신이시여. 제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게 하소서!
“거기서 뭐 하고 있는가?”
문득 반대편에 있던 황제가 물음을 던졌다. 나는 온몸으로 다급히 이든이 긁어 놓은 벽을 가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여.”
단둘이만 떨어져 있는 우리를 수상쩍게 여기는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노아. 제발 부탁할게.’
노아에게 도움 요청을 보내니, 그가 능숙하게 귀족들과 황제에게 말을 붙여 그들의 관심을 도로 가져갔다.
휴우. 겨우 한숨을 돌린 내 속도 모르고 아빠는 아직까지 벅벅벅 삼매경이셨다.
“여기 뭔가가 있어.”
“대체 뭐가 있다구 그래요.”
“틈.”
“틈?”
그런 게 있다고?
이든이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의 말대로 그림이 그려진 부분에 작은 틈새가 보였다.
‘이거다!’
나는 더 이상 무아지경으로 벅벅벅, 하는 사자님을 말릴 수 없었다.
* * *
한편, 대신전의 지하 공간.
분을 이기지 못한 모리스 대신관은 먼지가 쌓인 바닥 위로 들고 있던 신문을 내팽개쳤다.
“빌어먹을 라이언하트 백작가 놈들!”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가문인지 몰라도 사사건건 거슬리는 존재였다.
‘자료 소각과 대신전 벽화 수정은 비밀리에 진행했거늘.’
대체 어디에서 냄새를 맡은 거란 말인가?
‘첩자라도 심어 둔 걸까?’
그럴 일은 없다. 대신전의 사람들은 제가 오래전부터 직접 선출해서 심어 둔 자들이었다. 그들이 배신할 확률은 현저히 낮았다.
제가 누리게 해 준 것들이 얼마인데. 감히 그런 꿍꿍이를 꾸밀 리가?
가당치도 않았다.
‘차라리 제 수족에게 마법으로 수작을 부려놓은 거라면 모를까.’
모리스는 바닥에 볼품없이 구겨진 신문을 노려보며 고민에 잠겼다.
“라이언하트 가문에 그럴 만한 재능을 가진 자가 있었던가?”
피터 사제가 병상에 눕기 전, 뒷조사를 해 온 바로는 마법의 ‘마’자도 모르는 자들이라 했다.
그나마 마법에 재능을 보이는 자라고는…….
“리아노 공작가의 후계자뿐인데.”
그가 마력을 각성한 지는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력을 ‘일부러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닌 이상 시기상으로 맞지 않았다.
“그럴 리는 없지.”
리아노 공작이 노아를 처음 대신전으로 데려왔을 때를 떠올리며 거듭 부정했다.
[안녕하세요, 대신관님.]
조금 특이한 꼬마 녀석이긴 했다.
보통 또래의 아이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든가, 혹은 모리스의 위세에 주눅 들든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이곤 했는데.
노아는 빤히 제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넸다.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나를 아는가?]
[이 제국에 대신관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맞는 말이기에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으나, 첫 만남 때 느꼈던 묘한 기분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아니다. 되지도 않는 생각이야.
모리스는 괜한 근심을 늘어놓아 봤자 해결되는 건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처리하면 되는 거다. 늘 그래 왔듯이.
리아노 공작에게 연구시킨 흑마법을 사용하는 게 좋으려나?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 원래는 리아노 공작가의 후계자에게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나, 미리 실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금세 여유를 되찾은 그가 음침한 미소를 띠며, 바닥에 나뒹구는 신문을 짓밟았다.
어려울 건 없다. 아직 상대는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태이니.
“백날 저런 기사를 지껄여 봤자지.”
진짜 벽화는 숨겨져 있다는 걸 모를 테니까.
망치라도 가져오지 않는 이상 그 단단한 벽화를 뚫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 대신전 안에는 그 어떤 쇳덩이도 들고 들어오지 못하니, 어떤 수로 제가 숨겨 놓은 진짜 벽화를 찾는단 말인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게다.”
냉정함을 되찾은 모리스가 다시 사람들이 있는 벽화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으로 방향을 튼 때였다.
쿠르르르릉.
“!”
지하 계단의 벽이 가늘게 진동했다.
* * *
이든이 벅벅벅 긁어 댔던 벽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루나!”
굉음 속에 얼핏 노아의 고함이 섞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콜록, 콜록.
뿌연 흙먼지 때문에 절로 기침이 나왔다.
다행히 우리가 서 있던 쪽의 일부분만 부서졌고, 사자님께서 순발력 있게 나를 감싸 주신 덕분에 다친 사람은 없었다.
이든이 품속의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봤다.
“다친 곳은?”
“괜챠나요. 아빠는요?”
“이 정도쯤은, 뭐.”
그가 나를 깨끗한 바닥 위에 살포시 내려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흙먼지가 가라앉자, 황제와 귀족들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저희는 안 다쳐써요!”
그들을 안심시킨 뒤, 무너진 벽화 쪽으로 다가갔다.
이거 지금 보니까…….
“벽화를 단순히 고친 게 아니라, 겉에 새로운 걸 만들어서 덧대 놓은 거네여?”
“부분적으로 고쳤더라면 어설픈 티가 났을 테니,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이든의 말이 순전히 옳았다.
사자님께 인간보다 뛰어난 시력이 없었다든가, 맨손으로 딱딱한 벽을 허물 힘이 없었더라면…….
절대 발견 못 했을 거야.
벽화의 달라진 점은 한눈에 들어왔다.
“인물이 바뀌어써요.”
모리스가 만들어 놓은 가짜 벽화는 키가 큰 성인 여성이 동물들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가짜 뒤에 숨어져 있던 ‘진짜’ 벽화 속에는 나와 엇비슷한 키를 가진 여자아이가 동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여자아이, 로 바뀌었군.”
“이 애는 스텔라일까여?”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야 스텔라가 원래 이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이니까요.
뒷말은 조용히 삼키며 다시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초승달 아래에 있는 여자아이에게 별을 물어다 주는 한 마리의 거대한 사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문득 스쳐 가듯 노아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전에 말했던 벽화 속 성녀님 얘기 말이야……. 그거 외부에는 고대 기록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예언이래.]
그때 분명 예언이라고 했어.
노아가 어디서 듣고 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거짓을 꾸며서 말할 애는 아니었다.
‘만약 이게 정말 예언이라면…… 이 사자는 우리 아빠일까?’
왠지 모르게 그런 것 같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이건 나인 것 같군.”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이든이 벽화에 그려진 사자를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덧붙였다.
“당연히 이 아이는 내 따님이겠고.”
“그게 왜 당연해여?”
“그럼 이 세상에 나를 무릎 꿇릴 인간이 내 따님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이지?”
이든이 내 양 갈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매만지며 대답했다.
‘정말 나일까?’
콩닥콩닥. 가슴 깊은 곳에서 잔잔한 떨림이 느껴졌다.
나도 그를 따라 진짜 벽화로 손을 뻗으려는데,
벌컥!
모리스 대신관이 완전 무장한 군사들과 함께 벽화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신성한 대신전의 기물을 파손한 라이언하트 일가를 잡아들여라!”
“예!”
창과 방패를 든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아빠와 내 주변을 포위했다.
“루나!”
반사적으로 내게 다가오려는 노아는 군인들에 의해서 저지당했다.
“저, 저기 라이언하트 백작이 벽화를 훼손시켜 놓았습니다!”
누군가 일러바치듯이 냅다 외쳤고, 놀란 황제가 우리 쪽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군인들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대신전에서 이 무슨 불경한 일인가! 어찌 법을 어기고 무장한 군인들을 들일 수 있냐는 말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황제가 노여움을 터트렸다.
“폐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요. 폐하의 말대로 이 성스러운 대신전의 질서를 망가트리려는 저 괘씸한 부녀를 처단하려는 것이니.”
“모리스 대신관!”
자신의 허물을 들킬 위기에 처한 모리스는 이미 반쯤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그런 자에게 황제의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대신관으로서 어찌 신전의 기물을 파손한 자들을 가만히 둘 수 있단 말입니까? 심판의 칼날로 반드시 죄를 물어야겠지요.”
모리스가 눈짓하자 군사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저 미X친놈이 정말 막 나가자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