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라이언하트 영애부터 먼저 포박해!”
아무리 핀트가 나갈 정도로 큰일이라고 하지만, 모리스 대신관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사람이 극한에 몰리면 되지도 않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더니.
딱 지금이 이 꼴이었다.
‘이거 대놓고 뇌절하는 전개 아니야?’
대신관이 고대 벽화를 조작했으며, 실은 벽화가 과거의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을 ‘예언’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그는 엄청난 질책을 받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귀족들과 평민들의 신뢰를 잃게 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의 선택보다는 나았다.
일단 모리스의 멍청함을 크게 세 가지로 지적하자면 이러했다.
먼저, 첫 번째.
‘그는 황제를 욕보였다.’
대신전 내에 날붙이를 금한 것은 황실에서 법제화한 것이다.
그런데 방금 모리스 대신관은 그 법을 무시한 걸로도 모자라, 황제에게 불손한 언행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우리 아빠를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이든 라이언하트는 명색이 수인족 우두머리다. 그런 자를 상대하는데, 고작 열댓 명도 안 되는 군사라니?
정말 제정신인 걸까?
차라리 강력한 마법사라도 데리고 왔으면 몰랐다.
물론 급하게 모아오느라 그런 거겠지만, 상대에 비해서는 너무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저 정도면 아빠가 굳이 수인화 하지 않아도 해치우시겠는데?
마지막으로 세 번째.
노아의 힘을 너무 간과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노아가 지금 참고 있는 것은 나 때문이라는 걸.
그는 지금 고민에 빠져 있었다.
눈앞의 쓰레기를 당장에라도 치워 버릴 것인지, 아니면 내게 잔혹하고 끔찍한 광경들을 보여 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잠시 참을 것인지.
“대신관밈. 후회할 선택 하시는 거 아니에여?”
“그 입 다물어라!”
“제가 드린 신문은 아직 안 읽어 보셨나 봐여.”
“그딴 쓰레기 같은 것이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꿈도 꾸지 마라.”
누가 누구보고 쓰레기라는 건지.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되신 모양이녜.”
“뭣들 하느냐! 저 죄인들을 어서 잡아들이지 않고!”
자, 상황을 어찌 타개한담.
가급적이면 아빠나 노아를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아빠의 힘으로 해결하려면 그간 수인임을 숨기려던 노력이 물거품 되는 셈이고, 노아의 힘을 빌리려면 자칫 그가 나쁜 놈들의 표적이 될 위험이 컸다.
‘그렇다면 황제를 이용하는 것뿐인데.’
힐끗 황제 쪽을 바라봤다. 그는 내가 굳이 불붙이지 않아도 언제라도 터질 것 같았다.
‘이번 위기를 해결해 줄 나만의 치트키는 황제, 당신으로 정했다!’
무사히 이 일이 해결된다면 이용당해 준 황제에게 기꺼이 소소한 선물이라도 할 생각이 있었다.
‘마침 내 대부가 되어 주겠다고도 했고.’
이번 참에 조금 더 황제와 관계가 깊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었다.
으음, 뭐가 좋으려나.
어차피 황제니까 물질적인 것은 필요 없을 테고, 정신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선물을 해 줄까?
‘이를테면 손녀 노릇 같은 것 말이야.’
오래전 황후와 배 속의 아이를 동시에 잃은 그에게 ‘손녀’가 생긴다면 어떨까?
나를 통해서 깊은 상처를 위로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른 것은 몰라도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공감 능력이야말로 하찮은 엑스트라인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비밀 무기였으니까!
‘좋았어. 까짓것, 황제의 완벽한 손녀가 되어 드리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먹고 황제를 향해 돌아서려는데,
후우우웅!
어디선가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쳐 왔다.
“으윽!”
“웬, 바람이!”
내 앞에 무장하고 선 덩치 큰 장정들이 휘청거릴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었다.
한데, 왜 나만은 머리카락 한 가닥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멀쩡한 걸까?
아빠와 노아도 거센 바람에 무사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우리만 의도적으로 피해 가는 것처럼 말이다.
‘뭐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법사로 각성이라도 한 걸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무시무시한 강풍의 근원을 찾았다.
그 근원지는 내 목에 걸린 엘코어였다.
‘설마…… 할부지?’
바람은 내 생각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엄청난 광경을 만들어 냈다.
고깃집 바람 인형처럼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군인들.
“으아악! 살려 줘!”
미친 듯이 흩날리는 흙먼지 부스러기.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어깨며 엉덩이로 침투한 바람이 피에로 의상같이 뽕을 잔뜩 부풀어 놓아 우스꽝스러워진 귀족들.
그중 가장 압권이었던 건,
휘잉, 모리스 대신관의 머리 위에서 맥없이 떠나 버린 머리털……?
‘뭐야 진짜 대머리였어?’
모리스 대신관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허공에 날아다니는 가발을 잡기 위해서 팔을 뻗었다.
“노아! 네 이놈! 당장 마법을 멈춰라, 당장!”
그가 노아에게 삿대질하며 이마의 핏대를 세웠다.
그럼에도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말대로 그건 노아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 이노오오옴! 정녕 하늘이 두렵지 않으냐!】
이어서 대신전 가득 울려 퍼지는 뇌성 같은 음성을 듣자마자, 저 ‘수상쩍은 뭉게구름’의 정체를 확신했다.
오, 맙소사.
왜 이 타이밍에 등장하시는 걸까.
이 상황에서 탄식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이든과 노아도 긴장한 얼굴로 기체 덩어리를 경계했다.
‘노아는 그렇다치고 왜 아빠가 못 알아보시는 거예요.’
아아. 환장할 노릇이었다.
【당장 그 흉측한 것들을 거두지 않는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허억!”
엘코어 안에서 쏟아져 나온 거대한 연기를 본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차츰 뭉치기 시작한 연기는 짧은 시간 내에 거대한 덩어리가 됐다.
그 모양은 그저 어렴풋이 사람의 형상만 갖출 뿐이었다. 비유하자면 램프의 요정 지니 같은 생김새였다.
“저, 저게 대체 뭐란 말입니까.”
대신전 천장을 가득 메울 정도의 크기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렇게 거대한 존재를 마주한 적이 없었을 테니,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것은 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나라의 지존일지언정, 그 역시도 한 명의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누구…… 당신은 누구시오!”
의외였다. 그는 줄행랑을 치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모두를 대표해서 강단 있는 질문을 던졌다. 괜히 황제가 된 건 아닌 모양이다.
‘사람은 참 좋은 분인 것 같은데, 하필 수인들과 척을 지어 가지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작에서 그가 수인 토벌을 명령한 이유에 대해 짧게 언급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 * *
황후와 배 속의 아이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황제는 수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다만 두 사람을 떠나보냈을 적.
황제는 황후가 살아생전 좋아했던 남쪽 땅에 그녀를 묻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의 무덤이 엉망으로 파헤쳐지다 못해 그 안에 묻힌 것들이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황후의 무덤이 훼손되었다니?]
대신전에서 나온 조사관들의 말에 의하면 수인의 짓이라 했다.
대신관이 황제에게 속삭였다.
[폐하. 반드시 그들에게 이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하셔야 합니다.]
[……아직……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괴로움에 찬 사람을 휘두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을 쥐고 흔들면 되는 것이기에.
대신관은 그것을 너무 잘 아는 자였다.
[하면 이대로 둔단 말입니까? 황후 폐하와 아기 마마께서 편히 눈을 감지 못하실 겁니다, 폐하.]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일 있겠습니까? 폐하. 어서 그들을 치십시오. 감히 주제도 모르는 천한 짐승들에게 톡톡히 보여 주셔야 합니다.]
‘승하하신 황후 폐하와 아기 마마님이 바라시는 일일 겁니다!’
* * *
그래, 이 모든 비극은 한 명의 악한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거였지.
원작을 통해서 알고 있는 황제의 사연이라든가, 여태까지 직접 겪어 본 바를 조합해 봤을 때 황제는 천성이 악한 자는 아니었다.
다만 마음이 심약하여 악인에게 이용당했을 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만약 황제와 수인족 사이에 오해가 쌓이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황제와 우리 아빠는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강물을 흐린다더니. 그건 모리스 대신관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닐까.
‘언젠가 잘못된 것들을 다 바로잡겠어.’
나는 긴 상념을 잘라내고 다시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내가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신은 인간을 만든 창조신이십니까?”
【아니다.】
“하면 이 제국을 세웠던 고대 영웅의 혼이십니까?”
【그 역시 틀렸다.】
“혹은 우리를 심판하러 온 악마입니까?”
【그럴 리가. 물론 그런 이름으로 굳이 불리지 않더라도 그럴 의향은 있다만.】
긴장한 사람들의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그들은 어렴풋이 제 앞의 ‘존재’가 마법이나 허깨비 따위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황제가 용기 내어 질문했다.
이든과 노아, 모리스 대신관을 포함한 여러 귀족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공포의 존재는 그들의 시선을 음미하듯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루나의…….】
이상함을 감지하자마자 싹뚝, 말허리를 잘라 냈다.
‘할부지라고 하기만 해 봐요.’
내 생각을 읽은 뭉게구름 덩어리…… 아니, 엘베른 라이언하트가 입을 합! 다물었다.
【…….】
그게 사람들을 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부디 정체를 밝혀 주소서!”
“바, 밝혀 주소서!”
황제가 먼저 고개를 조아리자, 두려움에 찬 귀족들과 군인들도 줄줄이 땅바닥에 엎드렸다.
모리스도 이 초월적인 현상에 공포를 느낀 건 마찬가지였나 보다. 어정쩡하지만 허리가 아래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 많은 인영 중, 엘베른에게 경배하지 않은 이는 아빠와 나, 그리고 노아뿐이었다.
아빠는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 같았고, 노아는 어느 틈에 다가와 내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온 거지.’
여태까지 나에게만 보였던 엘베른이 어떤 연유로 다른 이들에게까지 보이게 된 건지 알 방법이 없었다.
이 대환장 파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냥 빨리 상황이 정리되고, 쉬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리챠드가 사다 주는 슈크림 빵이 그리웠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뭐든 좋으니까, 이 상황 좀 정리해 주세요.
가급적이면 큰 탈이 없게끔, 빨리.
내 생각을 읽은 엘베른이 다시 근엄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루나 라이언하트 영애의 소원을 들어주러 온 벽화 요정이다.】
나는 조용히 탄식을 삼키며 이마를 탁, 붙잡았다.
……그게 정말 최선이었어요,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