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42)

106화

엘코어에서 등장한 엘베른이 만들어 낸 바람이 사라지자, 대신전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벽화의 요정……이라고 하셨습니까?”

황제가 용기 내어 뱉은 질문이 동굴 속의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벽화의 요정이라니!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기에는 다소 낯간지러운 단어였기에 질문을 뱉은 당사자는 물론이요, 듣고 있던 이든과 모리스 대신관, 귀족들의 표정이 얼떨떨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심지어는 노아까지 엘베른의 주장을 믿지 않는 듯했다.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어린아이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서 ‘그냥’ 하던 말이었는데, 그게 진짜라고?” 하는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전개 때문인지 얼음장 같던 분위기는 살짝 누그러졌다.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차라리 마법 쪽이 아닐까요?”

“아까 리아노 공작가의 후계자가 말하길, 마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라고 했으니 다른 계열일 수도 있겠지요. 이를테면…….”

귀족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답을 찾기 위해 술렁였다.

바삐 굴러가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여전히 ‘털 찐 고양이’처럼 거대한 몸집을 갖고 있는 기체 상태의 엘베른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문득.

“어? 잠깐만요.”

한 사람의 입술로 모든 시선이 쏠렸다.

“저 정체불명의 연기, 엘코어랑 이어져 있는 것 아닙니까?”

“뭐? 엘코어랑?”

사람들의 반응은 엘베른이 등장했을 때보다 더욱 크고 다양해졌다.

“저게 엘코어에서 나타난 존재라고?”

“말도 안 됩니다. 엘코어에 관한 비밀의 예언이 진짜였다니요?”

“그럼 그동안 연구에 번번이 실패했던 이유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야, 방법이 틀렸거나 능력 부족이었겠지요.”

“이보게! 연구를 진행했던 곳은 리아노 공작가의 마법사들일세.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흠흠, 라이언하트 영애가 뛰어난 인재인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들의 의견은 하나로 좁혀지고 있었다.

라이언하트 영애가 30년간 지지부진했던 연구를 성공시켰다는 것.

곧 그들의 궁금증은 하나로 귀추가 주목됐다.

이번에도 모두를 대표해서 황제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라이언하트 영애. 저들의 말대로…… 엘코어를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인가? 그렇다면 저것이 그 ‘수인족의 이능’이라는 것이고?”

이걸 어쩐다.

그다지 반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만약 사람들이 저 뭉게구름의 정체가 수인족의 전대 우두머리 ‘엘베른 라이언하트’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 몰랐다.

‘강력한 힘’을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작정하고 덤벼들 게 뻔했다.

본디 인간의 마음은 간사한 법이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다시 엘코어를 수거하려고 들 수도 있겠지.

‘그것만큼은 안 돼. 이게 아빠한테 어떤 의미인데.’

나는 엘코어를 꼭 쥐며 이든을 바라봤다.

답변을 기다리는 수십 개의 눈동자 가운데, 맹수의 황금안은 홀로 흔들리고 있었다.

“…….”

굳어 버린 입술은 쉽사리 움직일 줄 몰랐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지금은 그의 속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왜 진즉 말하지 않았냐고 나를 원망하고 계실까?

아니면, 저 의문의 존재가 제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끼시는 걸까?

어느 쪽이든 간에 아빠의 마음이 아프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절대로 할아버지를 빼앗길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하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이름으로 묻겠다. 라이언하트 영애, 짐의 질문에 대답하거라. 저 존재를 소환한 것이, 영애인가?”

황제가 거듭 대답을 재촉하는 바람에 나를 향한 사람들의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자연스럽게 내 원망의 화살은 엘베른에게 향했다.

상황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일을 더 크게 만들어 버리다니.

‘진짜 사고뭉치 할부지예요.’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대왕 사자 어르신을 노려보니,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신다.

【……크흠.】

헛기침과 함께 엘코어와 연결된 영혼의 끄트머리 부분부터 천천히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뒤늦게 할아버지 사자님께서도 부끄러움을 인지하신 모양이다.

에효. 정말 못 말린다니까.

결국 어른의 부끄러움을 수습하는 것은 아기의 몫이었다.

“우와아! 폐하 말씀이 맞아써요!”

“정말, 영애가 정말 엘코어의 비밀을 푼 것인가!”

황제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이어서 귀족들의 눈빛에서 감격과 흥분, 욕망이 차례로 뒤섞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싹이 더 자라나서 그릇된 탐심으로 뿌리내리기 전에 싹뚝 잘라 내 버릴 생각이었다.

“아니요, 그거 말고.”

“응?”

스스로에게 ‘나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어린아이야.’ 하고서 최면을 걸었다.

실제로 그걸 연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두 눈은 초롱초롱!

양 주먹은 야물딱지게 꼬옥 말아 쥐고, 양발은 동동동!

중간중간 엉덩이까지 한 번씩 흔들어 주면 더없이 완벽했다.

“폐하께서 아까 저한테 벽화 요정밈께 소원을 빌면 이뤄 주신다고 그랬쟈나요.”

“짐이 그랬었지……. 어어. 그런 말을 했지, 했어.”

순간 동상이몽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황제의 얼굴에 번민이 스쳤다.

각자의 꿍꿍이를 품었던 귀족들과 모리스 대신관도 짜게 식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대책 없는 해맑음을 계속해서 이어 갔다.

“제 소원을 이뤄 쥬시려고 벽화 요정밈께서 오셨나 봐여! 요정밈 최고!”

양손으로 엄지를 척!

엘베른을 향해 내미니, 뿌연 연기가 형체를 잃고서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최…… 최고라는 소리를 들었다…….】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엘베른을 꿋꿋이 무시하며 황제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일명 ‘설마 어린아이의 동심을 무참히 깨 버릴 생각은 아니시죠?’ 작전이었다.

“역쉬, 폐하께서는 진실만 말씀하시는 멋진 어른이시네여!”

그쵸? 설마 저에게 거짓말을 하신 건 아니겠지요?

순진무구한 눈빛을 이기지 못한 황제가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입술을 열었다.

“당……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럴 줄 알았써요!”

그 이후로 내 앞에서 엘코어의 ‘엘’자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 * *

어린아이의 동심을 방패 삼은 나는 엘베른을 빼앗기지 않고 무사히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대신전에 있었던 일을 모두 전해 들은 리챠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래서 어떻게 되셨어요?”

“폐하께서 오늘을 ‘요정의 날’로 지정해 주신댔어요.”

“이거 엄청난 선물을 받으셨군요, 아가님.”

뭐, 결과적으로는 그런 셈이죠.

보통 황실에서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특정 기념일을 지정해 주는 것은 엄청나게 의미 있는 일이며 명예로운 일이라고 들었다.

‘딱히 그런 것까지 노린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엘베른을 지켜야만 했을 뿐이고, 황제는 어린아이의 동심을 지켜야만 했을 뿐이다.

예기치 못한 소득이었지만 딱히 가문에 나쁠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득이라고 해야 하나? 

황제가 나를 특별히 여긴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리챠드, 제가 부탁드렸던 건요?”

“당연히 아가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모두 처리해 두었지요.”

“고생 많으셨써요.”

“그저 귀족들에게 단순히 신문을 나눠 주는 단순한 일이었는걸요? 피헨느 씨와 프로스트 남작이 도와줘서 더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리챠드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듯 굴었다.

하지만 나는 연회가 진행되는 4일의 시간 동안, 여러 가문의 귀족을 직접 만나고 신문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고 있다.

“그래도 일주일은 더 넘게 걸릴 줄 알았는데, 나흘 만에 다 한 것은 대단한 거쟈나요.”

“최고의 집사답습니까?”

“응, 리챠드 최고!”

아낌없이 양쪽 엄지를 내밀어 주니, 리챠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한데 말입니다. 모리스 대신관은 어찌 겁박하신 겁니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자는 아니었는데.”

“아빠가 저런 표정으로 있는데 감히 함부로 어떻게 건드리겠써요.”

나는 서궁의 내빈실로 돌아온 후부터 줄곧 저기압인 이든을 곁눈질로 훔쳐봤다.

마침 낮게 가라앉은 황금안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코어에 관한 일을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서 나한테 화난 걸까?’

가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너무 어마어마한 표정을 짓고 계신지라 선뜻 질문을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내가 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서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리챠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으음…….”

낮게 침음을 흘린 리챠드는 한껏 목소리를 낮춰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간 각하를 오랫동안 옆에서 보필해 온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리는 건데, 저건 별개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별개의 문제여?”

리챠드는 대답 대신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나도 그를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리챠드의 까만 콩을 닮은 동그란 눈동자가 닿아 있는 곳은 야무지게 주먹을 말아 쥐고서 엄지만 척! 내민 나의 쌍 따봉이었다.

“아가님 저는 아직 관작을 맞추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나를 보며 리챠드는 구슬픈 눈빛으로 덧붙였다.

“부디 저를 만수무강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가님.”

내 양 엄지를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필사적으로 감싸 쥔 리챠드의 커다란 손이 파르르 떨리는 건, 내 착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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