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42)

107화

“리챠드 시고르쟈브죵.”

나지막이 떨어진 호명에 리챠드는 바짝 긴장했다.

“사랑합니다, 각하.”

양손으로 다급하게 하트를 만들어 보인 것은 오랜 기간 학습된 자기 보호 본능처럼 보였다.

“사랑을 증명할 기회를 주지.”

“기회를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상관의 권유를 고사하는 건, 미덕이 아니지 않나?”

“제 목숨으로 각하를 향한 제 사랑을 증명할 계획은 없었던지라.”

“원래 인생이란 무수한 변칙들 속에서 흐르는 법이니까.”

이든이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게 리챠드를 더욱 공포에 떨게 했다.

“각하, 일단 진정. 제발 진정하십시오. 부디 이성적인 판단과 근거하에 결론을 내리심이 어떠실지?”

살기를 느낀 리챠드가 한 발자국 뒷걸음질 치자, 노련한 사냥꾼이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철저한 이성적인 판단과 객관적인 근거로 결론을 내린바,”

이든이 말을 하다 말고, 나를 힐끔 바라봤다.

듣는 귀가 신경 쓰였던 걸까?

짧게 고민하는가 싶었던 그는 리챠드의 멱살을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이내 삼켰던 뒷말을 이어 뱉었다.

“―은 용납할 수 없다.”

뇌까리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무어라 하는지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억울함과 다급함이 뒤범벅된 리챠드의 표정이 너무 박진감 넘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절대로 제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미필적 고의가 아니었다는 그 변명을 믿어 달라는 건가?”

“예. 아가님을 증인으로 소환하겠습니다.”

이 잔머리 대마왕 같으니라고.

리챠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위기를 넘어갈 수 있는지 잘 알았다.

마치 방패를 들 듯 나를 번쩍 들어 올려서, 이든 앞을 막아 세웠다.

놀랍게도 이 허술한 작전은 이든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공격적인 언사는 멈췄고, 잠시 휴전이 찾아오는가 싶었다.

“…….”

“그렇죠, 아가님?”

얼른 그렇다고 해 주십시오. 

리챠드가 나를 둥개둥개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허공에 시계추처럼 달랑달랑 흔들리는 내 다리를 따라 맹수의 시선이 움직였다.

금색 눈동자에 스멀스멀 불만이 피어올랐다.

‘리챠드가 아니라 나한테 마음이 상하신 건가?’

그런 거라면 역시 이유는 하나였다.

‘엘코어와 엘베른 라이언하트에 관해서 내가 말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역시 사과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눈치를 살피며 타이밍을 보고 있는데, 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죄송해여.”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제가 아빠한테 상처를 줘써요.”

“몹시, 이루 말할 수 없도록, 크나큰 상처였다.”

세 번이나 강조하는 걸 보면 진짜다.

애꿎은 입술 위로 손이 갔다. 단호한 표정을 보아하니 어지간해서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좋아.

이든은 울상이 번지는 내 얼굴로 손을 뻗어, 죄 없는 입술을 괴롭히는 내 엄지손가락을 훔쳐 갔다.

그러고서는 서운한 얼굴로,

“어떻게 나한테는 쌍 따봉을 한 번도 해 준 적이 없을 수 있지?”

……어? 화난 포인트가 그쪽이었어요?

* * *

가정의 달 연회가 있던 후로 보름의 시간이 지났다.

그간 계절은 늦봄 티를 벗고 물씬 초여름의 옷을 입었다.

푸릇푸릇하고 싱그러운 풀잎으로 덧칠된 뒤뜰 온실이 평화로운 일상의 주 무대였다.

“무슨 놈의 편지를 그렇게들 많이 보내는 건지 모르겠군.”

벌써 10분째. 내가 전국 각지에서 온 편지만 읽고 있자, 나란히 함께 나무 그늘 아래 앉은 이든이 툴툴거렸다.

“셀리한테 연락이 와써요. 여전히 말하는 건 고약하지만, 그래도 검투장 리모델링 공사는 잘 진행되어 가고 있나 봐여.”

“내용이 궁금하다고 한 적 없다.”

셀리에게서 온 소식은 재미가 없으신가?

내 예상과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나는 대부가 되어 준 황제가 내게 선물한 ‘검투장’을 개조했다. 목적은 모리스 대신관에 의해 폐사될 뻔한 말들을 모아 ‘재활 치료’를 할 센터를 만들 생각이었다.

‘동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건, 수인에 대한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건데.’

의외라고 생각하며, 아직 열어보지 않은 편지를 뒤적거렸다. 그중에 아빠가 궁금해할 소식이 있나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어디 보자…….

아, 이 소식은 궁금해하셨을 것 같기도 한데.

“그레이고르 씨도 바쁘게 지내고 있대요.”

“누구?”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듯, 가지런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얼마 전에 마스터피스 프리마켓에서 만났던 가죽 장인 있쟈나요. 벤 쟝 씨의 옆 부스에서 만난, 우리가 후원해 주기로 했던 분.”

“아아. 그 수도꼭지 녀석.”

“수도꼭지?”

그레이고르 씨는 어쩌다 저런 요상한 별칭을 얻게 된 걸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니, 이든이 슬쩍 능숙하게 시선을 빗기며 말문을 돌렸다.

“어쨌든, 그 녀석이 왜.”

“이번에 벤 쟝 씨랑 같이 힘을 합쳐서 승마용품 브랜드를 런칭하기로 했꼬든요. 멋있쬬?”

“멋있기는. 쓸데없는 취미 용품이다.”

그는 아직 반도 확인하지 못한 편지를 괜히 째려보았다.

으음, 이 소식도 별로였나 보네.

또 다른 것 중 보여 줄 것이 없나 살폈다. 그 밖의 편지는 스텔라와 피헨느, 에이코 백작 부인에게서 온 것들이다.

차례대로 봉투를 뜯어 이든과 함께 살펴보았다.

아카데미 기숙사 완전 최고야!

2학기 때는 축제도 열린대.

다들 벌써부터 함께 갈 파트너를 구하고 난리도 아니야.

축제 때는 아카데미에 외부인 출입도 가능하다니까, 너도 나중에 그 보라색 눈 남자애랑 같이 놀러 와.

(ps. 이건 너한테만 처음 말하는 비밀인데. 내 파트너는 왠지 몬크 오라버니가 될 것 같아.)

- From. 루나의 친구 스텔라 리리카이.>

꾹꾹 눌러쓴 글씨를 빠르게 정독한 이든이 특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언급했다.

“아카데미 축제?”

“지난주부터 라이언하트 가문의 첫 후원으로 스텔라가 아카데미에 중도 입학했꼬든요.”

“그 어린 여자아이가 어디에 가서 잘 적응했는지, 안 했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다. 다만.”

마디 굵은 손가락이 종이 위를 횡단하더니, 특정 대목을 가리켰다.

보라색 눈 남자애.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일곱 글자를 읽고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였다.

‘우리 노아한테 또 하악질 시작하시겠다.’

아빠의 질투 버튼이 제대로 눌리기 전에 다음 편지로 후다닥 넘겨 버렸다.

“아이코 읽어야 할 편지가 왜 이렇게 많담. 으음, 어디 보쟈. 다음 편지는…….”

이번 발신인은 ‘피헨느’였다.

<모리스 대신관이 재판에서 승소했습니다.

당분간 대신전 출입을 금지당했지만, 대신관 자리를 박탈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전 기물이 파손된 것은 사실이고, 모리스가 대신관으로서의 의무 때문에 나섰던 것을 감안하여 감형된 모양입니다.>

내용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에효. 이번에도 재판장을 매수했나 봐여.”

“던버르레 공작이 뒤를 봐주는 한 당연한 선택이겠지.”

하긴. 여태까지 해 온 걸 봤을 때, 던버르레 공작가가 주로 매수와 조작을 맡아서 한 것 같았다.

‘흐음. 이대로라면 다음 에피소드에서 성가실 것 같은데.’

가정의 달 연회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사냥의 밤> 에피소드였다.

이 역시 에덴 제국의 큰 행사 중 하나로, 지금까지 해 왔던 것보다 더 치밀하게 준비를 해야만 했다.

<사냥의 밤>에서는 온갖 주작과 매수가 판을 치는 것은 물론, 아기의 몸으로 따라가기 버거운 액션들이 난무한다.

‘미리 대비해 둘 필요가 있겠어.’

다음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있지만, 치트키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엑스트라는 부지런해야만 했다.

금세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래도 이번엔 그걸 준비해야겠지?’

심각하게 이런저런 가능성을 고려해 가며 고민하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잔잔하게 깔린 기묘한 소리가 내 관심을 끌었다.

고롱, 고롱. 고로롱, 고롱.

신비하고도 중독성 있는 울림이었다. 이윽고 나는 그 소리의 근원지가 이든이라는 것을 알았다.

‘언제 수인화 하신 거지?’

사자 모습으로 변한 이든이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흘러든 잔 햇살을 받으며 골골송을 불렀다. 나른하게 풀린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동안 불면증은 많이 괜찮아지셨나 보네.’

언제부터였지?

늦은 밤까지 잠 못 들던 아빠가 이렇게 편히 잠드실 수 있게 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몰랐으나, 마음이 놓였다.

‘정말 다행이야.’

고롱고롱, 고롱롱.

이제는 아예 눈을 감고 계셨다.

‘잠들었나?’

커다란 발을 배 아래로 깐 사자님은 크고 거대한 하나의 식빵 같았다.

햇살에 노릇노릇 구워진 대형 고양이 빵.

워낙 덩치가 거대해서 그런지 몸통은 반쯤 담요 밖으로 삐죽 나가 있었다.

‘맨바닥인데 안 불편하신가?’

고개를 꾸벅거리는 모습이 영 불편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수인족의 우두머리고 백작가의 가주씩이나 되시는데, 이렇게 재울 수는 없지!’

나는 베개도 없이 잔디밭 위에서 졸고 있는 아빠를 보고 책임감 비스한 것을 느꼈다.

일단 아직 열어 보지 않은 에이코 백작 부인의 편지를 챙겨 들고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고롱고롱.

다행히 골골송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깔고 앉았던 담요를 슬쩍 빼내서, 돌돌돌 둥글게 말았다. 모양은 조금 엉성하지만 제법 폭신폭신해서 베개 구실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베개 완성!’

이제 완성한 임시 베개를 허공에서 꾸벅거리는 사자님의 턱 아래로 스윽, 끼워 넣으려는데.

“아빠 아직 안 잔다.”

황금안이 번쩍 뜨였다.

앗, 깜짝이야.

“잠드신 줄 알아써요.”

“잠시 사색하던 중이었다, 사색.”

에이, 거짓말. 누가 봐도 꿈나라의 문지기 요정님과 하이파이브 하고 오신 얼굴인데.

물론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서 지적하지는 않았다.

우리 사자님은 부끄럼쟁이시니까.

“그럼 들어가서 같이 낮잠 잘까여?”

“싫다.”

어라.

즉시 돌아온 대답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말해 조금 상처받을 뻔하기도 했다.

‘아빠가 거절할 리가 없는데.’

그러나 나는 곧 이든이 나와의 낮잠 타임을 거절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설마…… 할부지 때문이에여?”

곧장 골골송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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