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그런 것 아니다.”
아니시긴, 꼬리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다 드러나는데.
긴 꼬리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바닥을 팡팡 내리쳤다. 내가 알기로 저 움직임의 뜻은 ‘심기가 불편하다’는 거였다.
“그렇지만 요즘 계속 저택에 잘 안 들어가셨쟈나요.”
“날이 좋아서 광합성을 즐기려고 한 것뿐이야.”
단순히 햇볕을 쐬기 위한 거라기에는 늦은 저녁까지 뒤뜰에서 있으시면서.
벌써 보름째, 뒤뜰에서 죽치고 있는 이든이 걱정됐다.
‘이대로 할아버지를 피하기만 하실 건가?’
가정의 달 연회에서 돌아온 이후로 엘코어에 이상이 생겼다.
정확한 원인은 아무도 몰랐다.
엘베른은 엘코어 속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나 외의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는 것도 여전했고.
‘언제까지 피해서만 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만약 앞으로도 쭉, 엘코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함께 지내야 할 터였다.
계속 이런 식으로 지낼 순 없어.
“아가님!”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풀숲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리챠드가 보였다.
“식사 준비 다 되었습니다. 오늘 메뉴는 릴리앙 씨가 특별히 더 신경 썼다고 하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혹쉬, 릴리앙표 후식?!”
“제 꼬순내 발바닥을 걸고, 그보다 더 부드러운 바나나 푸딩은 없을 거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져, 릴리앙의 손맛은 제국 최고일걸요?”
잔뜩 들뜬 마음으로 마중 나온 리챠드에게 포르르 달려갔다.
그러나 우리 사자님께서는 여전히 식빵 굽는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으셨다.
정말 안 들어가실 생각인가?
리챠드의 옆구리를 툭 쳐서 눈치를 주니, 그가 대신 나서서 물었다.
“각하께서는 오늘도 여기서 츄르로 식사를 때우실 겁니까?”
“잔소리는 사절하지. 츄르로 충분하니까.”
“물론 영양적인 면에서는 우수하지요. 다만, 각하 때문에 괜히 우리 아가님도 매번 이리 밖에 나와 계시니까 걱정된다는 겁니다.”
리챠드가 챙겨 온 스틱형 츄르를 건네주며 잔소리를 늘어놨다. 어째 잔소리 포인트가 묘하게 빗나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이든은 딱히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얼른 데리고 들어가.”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이러다 우리 작고 소중한 아가님께서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니까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책임을 리챠드 네게 물을 터이니,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몹시 억울합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발생할 경우 어느 정도 각하의 지분이 있다고 봅니다만.”
“그러니까 얼른 데리고 들어가란 거다. 반팔 차림이니 감기 걸릴지도 몰라.”
저기요. 오늘 가만히 있어도 땀나는 날씨인걸요?
이 더운 날에 웬 감기 타령인 건지. 아빠와 리챠드는 내가 툭, 치면 찢어지는 종이 인형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다.
“배고파여, 리챠드.”
두 남자의 과잉보호 대화가 더 깊어지기 전에 슬쩍 끼어들었다.
“오, 이런. 아가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각하,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후다닥 인사를 마친 리챠드가 나를 품에 안고 저택으로 향했다.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츄르를 뜯는 사자님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문득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입 모양을 벙긋거렸다.
‘맛있게 먹어.’
내게 무어라 말하는 건지 이해가 돼서,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츄르를 입에 문 아빠는 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치지 않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정말 이대로는 안 돼.’
엘베른과 이든 사이에서 무슨 감정의 골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해결해 주고 싶었다.
이든이 엘베른을 피해 뒤뜰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엘베른 역시 서재에 앉아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리챠드, 곧 할아버지의 기일이시져?”
잠시 멈칫한 리챠드가 덤덤한 내 질문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어느덧 그렇게 되었습니다.”
엘베른 라이언하트의 기일.
이든에게는 아픔을 감내하는 시간이었다. 이맘때쯤 이든은 부모님의 묘비 근처를 겉돌며 시간을 죽이곤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는 없잖아?
엘베른이 코앞에 있음에도 선뜻 만나러 가지 못하는 이든의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설마 아빠가 계속 저렇게 온종일 밖에서 업무랑 식사를 해결하는 모습을 두고 볼 생각은 아니져?”
“저 역시 각하를 저택 안으로 모셔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혹, 좋은 생각이라도 있습니까?”
역시 눈치가 빠른 댕댕이라니까.
나는 시큰한 코끝을 문지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아빠랑 할부지랑 관계를 회복시킬 생각이에여. 이름하여, 친해지길 바라 프로젝트!”
“오, 그거 재미있는 작전명이로군요!”
장난꾸러기 리챠드의 까만 눈동자가 기대와 흥분으로 뒤섞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준비하면 되냐면…….”
우리는 은밀하게 두 남자를 위한 ‘친해지길 바라’ 프로젝트를 작당했다.
으흥흥. 기대하시라.
상상도 못 한 작전으로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 드릴 테니!
* * *
해가 뉘엿뉘엿 저물 즈음이었다.
여전히 뒤뜰의 나무 아래서 서류를 보고 있던 이든은 츄르로 저녁을 대충 때우고 있었다.
그는 오늘도 요 며칠 그랬던 것처럼 밤이 깊어서야 침실로 갈 생각이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토리 무크가 전한 긴급한 쪽지만 아니었더라면.
<각하 아가님께서 감기에 걸리신 듯합니다.
열이 심하게 끓고 있으니 얼른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리챠드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덥다고 해도 담요로 돌돌 말아 놓을 것을.’
인간 아이의 몸은 제 생각보다 약하다는 것을 까먹을 때마다 이렇게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이든은 읽던 서류들을 다 내팽개친 채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1층 홀을 지나던 프로스트 남작과 마주쳤다.
“루나는?”
“아가님은…… 바, 방. 아가님은 방에 계십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처럼 프로스트의 시선은 미친 듯이 불안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이든에게는 그런 것을 눈치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루나의 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두세 칸씩 오르는 것으로도 성에 안 차, 아예 반쯤 뛰다시피 됐다.
문 앞에 있는 리챠드가 보였다.
“의사는 불렀나?”
“안 그래도 지금 제가 직접 가 보려고 합니다.”
“그건 내가 들고 들어갈 테니까. 리챠드, 넌 얼른 의사를 데리고 와.”
이든이 리챠드가 들고 있던 대야와 물수건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즐거운 시간?
거슬리는 단어 선택이었지만, 그걸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루나가 아프다.’
오로지 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이든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익, 쿵. 철컥.
문이 닫히며 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역시 신경 쓰이는 효과음이 추가된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일단 루나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루나.”
“…….”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많이 아픈가?’
걱정이 점점 더 부풀었다. 그는 찬물이 든 대야를 들고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추운 건가?’
머리끝까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어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빠 왔어.”
“…….”
이번에도 아이는 대꾸가 없었다.
어지간하면 제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라도 어떻게든 대답할 아이인데.
방 안이 조용한 만큼 그의 심장은 불안으로 뛰었다.
여기서 병원까지 얼마나 걸리지?
여차하면 자신이 들고 뛰어가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일단 열이 얼마나 나는지부터 확인해야겠어.’
침대 옆 작은 협탁에 대야를 내려놓고, 이불을 걷어 낸 이든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누워 있는 이는 루나가 아니었다.
“…….”
【…….】
“…….”
【…….】
아버지께서 여기는 왜?
이든은 루나의 침대에 누워 있는 엘베른을 보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엘베른이 슬쩍 손을 들었다.
【오랜만이다 아들.】
“……루나는 어디 있습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기도 하다만.】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이든이 홱 돌아서서 문으로 향했다.
덜컥.
문고리를 돌렸으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덜컥, 덜컥, 덜컥!
아무리 힘을 주어 흔들어 봤자 소용없었다.
이든은 뒤늦게 문 옆에 익숙한 필체의 쪽지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잠가 둬써요.
내일 아침에 열어 드릴 테니, 밤새 꼭 함께 계셔야 해요.
―ps. 마법 쟝치로 잠갔으니 혹여나 힘으로 열 생각은 마세요,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