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저랑 아빠 수업했던 거 기억나시져? 서로 자장가도 불러 쥬고, 그동안 못 했던 얘기도 나누셔요! 알았쬬? 꼬옥!”
일방적으로 통보한 아이가 총총총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
이든과 엘베른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로에게 거리를 유지한 채 서 있었다.
[할 수 있을 거다. 넌 내 아들이니까.]
수백 번, 수천 번도 넘게 꿈속에서 들렸던 목소리가 귓가에 아직도 생생했다. 조금만 시선을 올리면 꿈에서 그리던 이가 서 있는데.
이든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못 본 새 많이 수척해졌구나.】
“…….”
움찔. 이든의 주먹에 미약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걸 엘베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역시 가정의 달 연회 이후로 이든이 자신을 피하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몇십 년 만에 본 아들이 자신을 피하는 게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아들이 그리 행동하는 연유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 불편하면 자리를 피해 주마.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아침쯤에 돌아오면 되니까.】
엘베른은 마법 장치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그게 나을 듯싶었다.
물론 그렇게 했다가 거짓말을 들키면 딸아이가 실망하겠지만.
자신이 없었다.
엘베른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의 자장가를 듣는 것도.
당장에 시선도 못 마주치고 있는 이든이었다.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
【한데, 저건 무엇이지?】
엘베른이 어느 한 곳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묻는 바람에 이든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테이블 위에는 익숙한 녹화용 마도구가 놓여 있었다.
‘이런.’
분명히 저것을 가져다 놓은 아이디어는 리챠드 시고르쟈브종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리라.
【오호. 여기 내 손녀님이 남겨 둔 쪽지가 있군.】
손끝에서 바람을 만들어 낸 그가 고이 접힌 쪽지를 열었다.
【아빠 수업, 첫 번째. 자장가를 불러 주는 모습을 녹화해 주세요―라고 적혀 있는데.】
엘베른이 이든을 향해 넌지시 시선을 던졌다.
어찌 생각하지? 그리 묻는 거였다.
이로서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됐다.
내일 아침 딸아이가 텅 빈 녹화용 마도구를 보고 저에게 실망할 게 뻔했다.
그뿐이랴?
만약 와락 울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상상이었다. 이든은 차라리 제 심장을 도려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게 인간들이 만들었다는 마도구인 건가? 별것들을 다 만드는군.】
자신의 속도 모르고.
아비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마도구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일단 내려놓으십…….”
덜커덕, 텅!
말을 꺼내기 무섭게 놓친 녹화용 마도구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이쿠.】
화들짝 놀란 엘베른이 다시 바람을 일으켜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마도구를 들어 올려 이든에게 건네주었다.
혹시 고장 난 건 아닌지 확인해 보라는 의미였다.
【얼른 확인해 봐라. 어? 그러다 내 손녀님께서 이 할애비한테 실망하면 큰일이니까.】
엘베른이 이든의 주변을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며 재촉했다. 그 모습이 이든으로 하여금 잊고 있었던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아끼는 찻잔을 깨 먹으셨을 때도 저런 모습이셨지.’
따뜻했던 기억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이든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미한 소리였지만, 그것을 분명히 들은 엘베른이 우뚝 멈춰서 그를 응시했다.
이든은 아버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마도구를 이리저리 만졌다.
“꽤 값이 나가는 물품이라 그리 쉽게 고장 나진 않을 겁니다.”
달칵, 틱. 달칵, 틱.
제 말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이런저런 버튼을 차례대로 눌러봤다.
이든의 말대로 오작동은 없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재생 버튼이 멀쩡한지 확인해 보는 것만 남았다.
물론 아직 녹화해 둔 것이 없으니 아무 소리도 안 나겠지만…….
달칵.
-아빠가 너무 좋아, 오또케오또케.
……어?
익숙한 음성이 퍼져 나왔다. 딸아이가 이든에게 선물했던 녹화용 마도구였다.
-아빠가 너무 멋져, 오또케오또케. 나랑 산책 갈래 오또케 생각해. 잔말 말고 말해, 좋다구 좋다구.
맑고 청아하게 울려 퍼지던 노랫소리가 끝나자, 방 안은 다시 적막이 차올랐다.
‘리챠드 녀석. 내 뒤통수만 때린 줄 알았더니, 제법이군.’
이든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마도구에서 시선을 돌리는데,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코앞에 엘베른의 얼굴이 있었다.
‘!’
순간 놀란 이든이 흠칫 몸을 떨었지만, 엘베른은 전혀 괘념치 않았다.
【그…… 그게 대체…… 대체 무엇이냐!】
도리어 그가 더 흥분한 목소리였다.
이게 그렇게까지 놀라실 일인가? 싶다가도, 엘베른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없었던 발명품이니 그 반응이 이해가 갔다.
이든은 차분히 입술을 열었다.
“리챠드가 마도구를 제 것과 바꿔치기해 놓은 모양입니다.”
【네 것이라고?】
“예. 루나에게 선물 받았습니다.”
아비와 마주 보고 대화하는 건 역시 어색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힘겹지는 않았다. 제법 견딜 만했다.
【너.】
새하얀 기체가 뭉치더니, 이내 손가락 모양을 갖추었다. 얼떨결에 삿대질 당한 이든은 고개를 들어 엘베른과 시선을 맞췄다.
어쩐지 조금 화난 표정이었다.
쿵.
심장 위로 커다란 돌덩이가 던져진 기분이었다.
【이든 라이언하트.】
다시 만난 이후로 이렇게 제대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도, 이름을 불리는 것도 처음이었다.
【대답해라, 이든 라이언하트.】
“……네.”
이든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겨우 벌려, 바짝 마른 목구멍 사이로 겨우 목소리를 뱉어 냈다.
[가서 네 엄마와 백성들을 지켜라! 할 수 있겠지?]
아비가 한 부탁이 떠올랐다.
자신이 지키지 못한 그 약속.
죄책감으로 인해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볼 면목이 없어 다시금 고개를 숙이자 아래로 불쑥, 허연 연기로 이뤄진 손이 튀어나왔다.
【너 이 녀석…… 이 좋은 걸 혼자 봤다고?】
이든의 손에서 녹화용 마도구를 가로채 간 엘베른이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네 손을 떠났으니 이제부터 이건 내 것이다, 아들.】
허공 위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수영하는 엘베른이 이든을 향해 마도구를 흔들어 보이며 약 올렸다.
……아버지?
* * *
상쾌한 아침이었다.
간밤에 이든과 엘베른, 두 부자를 위해 내 방을 내준 대신에 나는 아빠의 방에서 잤다.
“역시 아빠밈 방이 최고라니까.”
포근한 아빠 냄새 덕분인지 푹 잠들어서 컨디션이 최고였다.
그럼, 아빠님이랑 할아버지도 많이 친해지셨는지 보러 가 볼까나?
폴짝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오도도도 내 방으로 향했다.
마침 계단을 올라오는 리챠드와 딱 마주쳤다.
“리챠드 안뇽하세요!”
“아가님, 잘 주무셨습니까?”
“그건 모에요?”
나는 리챠드가 들고 있는 의문의 짐을 가리키며 물었다. 가죽으로 꽁꽁 둘러싸매 있는 게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딱 좋았다.
“아가님 앞으로 온 물건입니다. 발신인은 벤 쟝 씨로군요.”
“엇, 맞다! 완전 까먹고 있었는뎨.”
그걸 벌써 만들었다니!
일전에 스텔라 대신에 위장하고 있었던 벤 쟝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몰래 부탁해 두었던 거다.
아빠에게 받은 가정의 달 선물에 답례하고 싶어서, 직접 그린 도안으로 주문 제작을 맡겼다.
‘새카맣게 까먹고 있었지 뭐야.’
잊고 있던 해외 배송 택배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었다.
잔뜩 들뜬 나는 쪼르르 달려가 냉큼 물건을 건네받았다.
“대체 뭐길래 그렇게 반기시는 겁니까?”
“으흥흥. 깜짝 선물이여!”
한층 더 깊어진 호기심의 눈빛이 내게 향했다. 나는 주섬주섬 가죽 포장지를 풀어내고, 그 안의 물건을 꺼내 보였다.
“짜잔!”
“오오, 이것은……!”
“아빠가 좋아하시겠쬬?”
“각하뿐만 아니라 엘베른 님 역시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만.”
“헛, 정말요?”
“두 분은 누가 뭐래도 부자지간이니까요.”
리챠드가 싱긋 웃었다.
‘어라라라. 잠깐만. 그럼 이거 어쩌면…….’
아빠와 할아버지의 친해지기 바라 프로젝트에 비장의 무기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손에 든 물건을 내려다봤다.
매끈한 보디를 자랑하는 낚싯대!
맞춤형으로 제작한 것이라서 손잡이는 내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파란 가죽으로 둘러싸인 손잡이로부터 이어진 긴 줄 끝에는 오묘한 빛깔의 깃털이 달려 있었다.
쇽!
힘차게 흔들자, 탄력을 받은 깃털이 포물선을 그리며 줄의 움직임에 따라 딸려왔다.
다시 한번 쇽!
빛을 받는 각도마다 여러 색으로 변하는 깃털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완벽한 발명품입니다.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사쟈밈 낚시대요!”
“최고의 이름이군요. 그럼 어서 각하를 조련……, 아니. 각하께 자랑하러 다녀오십시오.”
“녜. 다녀올께요!”
두 사자님께서 좋아하실 것을 생각하니 어쩐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원래는 이럴 용도로 주문 제작한 것은 아니지만.’
이걸로 아빠와 할아버지가 가까워지며 좋은 거잖아?
으흥흥. 낚싯대를 들고서 신나게 내 방 앞으로 도착했다.
똑똑똑똑.
예의 있는 아가답게 정중히 노크한 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아빠, 할부지 죠은 아침이에요!”
……응?
밤사이 내 방에 태풍이라도 왔다 간 걸까.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그 난장판의 중심에는 사자로 변신한 이든과 사자 모양의 뭉게구름이 된 엘베른이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이만 포기하고 돌려주십시오.”
【이든, 너야말로 포기해라. 허억, 허억, 허억.】
“절대 그럴 순 없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방의 끝과 끝에 선 두 사자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자세를 잔뜩 낮추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뛰어들 듯이 높게 들린 엉덩이는 각이 완벽했다.
‘지금 저 마도구가 갖고 싶어서 싸우시는 거야?’
사자님들이 저렇게까지 마도구를 좋아할 줄이야.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마도구에 혈안이 된 두 사자님을 보니, 특별 주문 제작한 낚싯대가 민망해졌다.
……이건 괜히 준비했나.
등 뒤로 숨긴 낚싯대를 만지작거리며 시무룩해할 찰나,
두 수사자가 검은 갈기를 휘날리며 용수철처럼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제 딸이 저를 위해서 부른 노래입니다!”
【내 손녀님이기도 해!】
이게 무슨 미치고 팔짝 뛸 소리란 말인가?
이내 거대 고양이들의 ‘우다다다’가 펼쳐졌다.
침대 시트가 날아다니고, 베개 속 깃털과 솜이 눈처럼 흩날렸다.
“……이게 대체 모 하시는…….”
기가 차서 말이 이어지지도 않았다.
우다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엘베른이 스쳐 가면, 그 뒤를 이든이 맹추격했다.
아수라장인 와중에, 이든에게 쫓기던 엘베른이 들고 있던 녹화용 마도구를 놓치고 말았다.
【!】
“!”
우다다다 달리던 두 맹수가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한데 뒤엉켜 우당탕탕 벽에 부딪혔다.
달칵!
공교롭게도 땅에 떨어진 녹화용 마도구의 재생 버튼이 눌렸다.
-아빠가 너무 좋아, 오또케오또케.
……왜 저 노래가 여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