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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10/142)

110화

내가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이든과 엘베른이 벌떡 일어서서 녹화용 마도구로 몸을 던졌다.

덥석!

두 사자의 앞발이 동시에 닿았다.

“제 것입니다, 아버지!”

【어림없다, 아들!】

두 맹수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제야 아빠와 할아버지가 저 평범한 녹화용 마도구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게…….

‘아무것도 녹화가 안 된 새것이 아니라, 지난번에 내가 아빠에게 선물한 오또케 송이 녹화된 거네?’

배신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리챠드, 이 사악한 똥개!’

키득키득 웃고 있을 리챠드의 얼굴이 눈앞에 훤했다.

그러는 중에도 두 사자의 옥신각신은 끝날 줄을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아버지께 드릴 수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아들에게 받고 싶다.】

없던 두통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그만해요, 이 미친 아범, 할아범아!”

쩌렁쩌렁 울려 퍼진 내 절규가 이 대환장 파티의 막을 내렸다.

* * *

대충 엉망이 된 방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다리를 척, 꼬고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장가는 안 불러 줬다구여?”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란히 앉은 이든과 엘베른을 번갈아 봤다.

“……흠.”

【크흠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두 남자가 헛기침하며 딴청을 부렸다.

이 고약한 사자들 같으니라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미션이었어요? 두 분 다…….”

정말 실망이에요.

뒷말은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입술을 삐쭉 내미는 것으로 대체했다.

그걸 또 두 사자님은 찰떡같이 알아들으셨다.

“그건 아버지께서 억지를 부리셨기 때문이다!”

【아비한테 양보할 줄 모르는 고얀 아들놈 탓이지!】

동시에 외친 두 남자가 서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이놈아. 안 되면 되게 하라 그게 우리 가문의 가훈이다.】

“언제부터 그런 가훈이 있었습니까?”

【오늘부터다!】

……어라라?

이거 어째 투덕거리는 것처럼 보이긴 해도, 전보다 부쩍 가까워지신 거 같은데.

내 착각 아니지?

어제까지만 해도, 엘베른이 있는 방향 쪽으로는 고개를 두지도 못했던 이든이었다. 그런 그가 엘베른과 눈을 똑바로 맞추고 티격태격했다.

심지어 두 남자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호칭을 썼다.

정작 당사자들은 ‘딸아이(혹은 손녀딸)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변명하느라’ 정신이 팔려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내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간 것 같아도, 어쨌든 친해지기 바라 프로젝트는 성공적인 거겠지?’

으흥흥.

두 남자를 보고 있으니 흐뭇했다.

“아빠, 할부지.”

“?”

【?】

어찌나 판박이 유전자인지.

생긴 게 똑같은 걸로도 모자라서 고개를 홱 돌리는 타이밍조차 칼 군무를 맞춘 것처럼 일사불란했다.

“이제 두 분, 서로 마음 푸신 거져?”

“…….”

뒤늦게 이성이 돌아온 이든이 입술을 합 다물었다.

실컷 우당탕탕 해 놓고서.

‘이제 와 갑자기 할아버지랑 내외하는 모습이 조금…….’

이런 말 하기 뭐 했지만, 귀여우셨다.

【누가 보면 이 할애비가 아들 녀석이랑 싸운 줄 알겠구나.】

덩달아 엘베른도 머쓱해했다.

“그렇지만 자꾸 두 분이 피해 다녀서 속상했는걸여.”

“……그런 적 없다.”

“치, 완전 뽕쟁이 아빠야.”

양 볼에 공기를 가득 불어 넣으며 쳐다보니, 이든은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저는 아빠가 할부지랑 잘 지냈으면 좋게써요.”

맹수의 눈동자 속 음영이 짙어졌다. 나는 이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얼굴 볼 면목이 없으신 거겠지.’

하지만 누누이 말해 왔듯이 그것은 아빠의 잘못이 아니다. 그때의 아빠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었다고.’

할아버지 역시 그걸 알고 계실 것이다. 절대로 이해 못 하실 분이 아니었다.

표정을 봤을 때는 오히려 제 아들에게 마음의 짐을 준 것 같아서 미안해하시는 것 같았다.

그저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시는 거였다.

아빠도, 할아버지도 서툴렀다.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바람에 오히려 어떤 말도 쉽게 꺼내지 못하셨다.

‘하여튼 두 분 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사자님들이라니까.’

이 아기 해결 박사님께서 없었더라면 어떡할 뻔했어, 정말.

“아빠.”

“?”

“잘 들어봐여.”

무엇을?

그리 묻는 이든을 뒤로하고, 엘베른을 향해 몸을 틀었다.

“할부지. 만약에 제가 할부지 부탁을 못 들어쥬면, 저 영영 용서 안 할 꼬에요?”

【그럴 리가 있나! 내 손녀님께서는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애초에 자식한테 그런 시시한 이유로 화를 내는 멍청한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이냐?】

즉답이 돌아왔다.

나는 곧장 이든과 눈을 마주치며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들었쬬?”

그러니까 이제 그날 일로 아빠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애초에 할아버지는 아빠에게 화나지도 않았는걸요?

할아버지는 사자님의 아빠잖아요.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됐을까.

낮게 가라앉은 금색 눈동자에 잔잔한 떨림이 일었다.

“가족끼리는 서로 토닥토닥 해 쥬는 거랬어요. 그쵸, 할부지?”

이든의 다리를 꼬옥 안아 주며, 엘베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금이에요, 할아버지!’

내 의중을 알아차린 엘베른이 휘리릭 바람처럼 불어와 이든의 곁에 섰다.

【그럼. 내 손녀님의 말이 백번 옳지.】

비록 영혼 상태라서 이든을 직접 안아 줄 수는 없었지만, 그는 조용히 이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른 말은 더 필요 없었다.

사뿐히 어깨 위로 내려앉은 새하얀 연기 덩어리의 손길 한 번으로, 지옥불 속에 있던 아빠의 마음은 충분히 구원받았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아버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된 거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이든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눈물을 보인 건 아니었지만, 그간 참고 있던 마음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전해졌다.

【됐다.】

엘베른 역시 나와 같은 걸 느꼈는지, 온몸이 창백한 와중에 코끝만 빨갛게 변했다.

【그리 미안하면 그 손녀님의 노래가 녹화된 마도구를 아비한테 선물하든가.】

그가 코를 훌쩍이며 씨익 웃었다.

그러자 이든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 차린 모습으로 대꾸했다.

“……그건 안 됩니다.”

【고얀 놈.】

“별개의 문제잖습니까.”

다행히 축 처진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했던 엘베른의 노력은 먹혀들었다.

【오랜만에 본 아비한테 선물 하나 주는 게 아까우냐?】

“차라리 작위를 떼어다 드리겠습니다.”

【그 필요 없는 걸 뭐에다 써 먹으라고.】

두 남자는 다시금 마도구의 소유권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보기 좋았다. 그간 둘 사이를 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진 것 같아서.

‘다행이야.’

흐뭇하게 두 사자님들을 보고 있는데, 처음부터 내 옆에서 팔 들고 벌서던 리챠드가 슬쩍 귀엣말을 속삭였다.

“저 잘했습니까, 아가님?”

“은근 슬쩍 팔 내릴 생각하지 마여, 리챠드.”

스르륵 내려오던 리챠드의 두 팔이 다시 귀 옆으로 바짝 붙었다.

“냉정하십니다, 아가님.”

그렇게 불쌍한 표정을 지어 봤자 소용없거든요?

‘흥.’

괘씸한 똥개는 뒤로하고 비장의 무기를 꺼낼 시간이었다.

자, 이제 아빠와 할아버지의 관계를 굳혀 볼까?

“아빠, 할부지!”

주문 제작한 대형 고양이용 낚싯대를 휘익 휘두르니, 반짝반짝 빛나는 깃털이 곡선을 그리며 두 맹수의 시선을 훔쳤다.

“한바탕 뛰어놀아 볼까여?”

자고로 땀 한 바가지 쫙 빼면서 친해지는 게 국룰이지!

* * *

벤 쟝이 만들어 준 대형 낚싯대의 힘은 위대했다. 원 없이 꿍싯꿍싯 엉덩이를 흔들며 사냥놀이를 펼친 두 사자님은 그날 이후로 부쩍 사이가 좋아졌다.

“오늘 루나와 산책하는 건 제 차례입니다, 아버지.”

【넌 뭔 놈의 가주씩이나 되는 녀석이 바쁘지도 않냐?】

“잠시 시간 낼 정도는 되니까 엄한 생각은 마십시오.”

이든은 엘베른에게 나를 뺏길까 싶어 얼른 목말을 태우고 식당으로 향했다. 아쉬움을 이기지 못한 혼백이 뒤를 따랐다.

아래로는 아빠 사자에게, 위로는 할아버지 사자에게 호위를 받는 모양새로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 은쟁반을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던 리챠드와 마주쳤다.

“아가님, 황실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황실에서?

리챠드가 내민 은쟁반 위에는 황가의 인장이 찍힌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누구로부터 온 편지인지 한눈에 알아본 이든이 눈썹을 구겼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편지를 한 거지?”

【또라니?】

허공에 한 바퀴 원을 그린 후 착지한 엘베른이 내가 쥐고 있는 편지를 유심히 살폈다. 찬찬히 봉투 겉면을 훑던 시선이 딱 멈추었다.

【아들. 지금 내 눈이 잘못된 거라고 해다오.】

“정확히 보신 겁니다.”

‘보낸 이’란에 적힌 이름 일곱 글자에 맹수들의 시선이 머물렀다.

루덴스 카일 에덴.

그것이 에덴 제국 황제의 이름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밑에 붙어 있는 카네이션 압화가 ‘대부’를 의미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을 터였다.

【대부라니? 대부라고? 이 할애비가 버젓이 있는데?】

엘베른이 나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번 연회에서 폐하께서 제 대부가 되어 주신다고 하셨써요.”

【그럼 이 할애비는?】

“할부지는 할부지고, 폐하는 폐하져.”

뭐가 문제예요?

내 순진무구한 눈빛에 엘베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쉬쉬, 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져 버렸다.

아니, 그게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얘기였을까?

덩달아 쪼그려 앉은 이든이 슬라임처럼 눌어붙은 엘베른을 콕콕 찔렀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엘베른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간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야.】

저기요, 사자님들 다 들리거든요?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사자님용 낚싯대를 슬쩍 꺼내 들었다.

어쩔 수 없다. 그냥 내버려 뒀다가는 천방지축 사자님들께서 사망 플래그를 밟아 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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