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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111/142)

111화

나는 서운해하는 엘베른에게 조만간 노래를 불러 주기로 약속한 것으로 마음을 풀어줄 수 있었다.

여전히 황제가 내 대부라는 사실을 썩 탐탁지 않아 했지만, 더는 황제를 처리하겠다느니 하는 무시무시한 얘기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내 손녀님께서 이 할애비를 위한 노래를 불러 주다니!】

잔뜩 기대에 부푼 엘베른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서재 방향으로 사라진 걸 보니, 아마도 듣고 싶은 노래를 직접 고르러 간 듯했다.

“으아아. 망해써.”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됐다.

흑역사를 또다시 만들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지만, 어쩌랴.

가문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이 방법밖에 없었는데.

“에효.”

눈물을 머금고 황제에게서 온 편지를 펼쳐 보았다.

날이 부쩍 더워졌는데 잘 지내고 있느냐?

짐은 무탈히 보내고 있다. 문득 라이언하트 영애의 소식이 궁금하여 이리 편지를 쓰게 되었다.

지난번에 본 그 벽화의 요정……도 여전히 함께 지낸다고 들었다.

매년 5월 마지막은 요정의 날로 지정하기로 했다. 내년부터는 작게 행사도 준비할 터이니, 벽화의 요정에게도 부디 이 소식을 잘 전해 주길 부탁한다.

또한 시간이 허락된다면 종종 황실에 들려 짐과 차 한잔하는 것은 어떤가?

고단한 일상 속에서 라이언하트 영애와의 담소가 그리워 편지한다.

-With love. 대부

루덴스 카일 에덴으로부터 >

황제에게서 온 편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우리는 대신전 사건 이후로 두어 번 안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깨달은 건데, 황제에게는 은근히 허당 같은 면모가 있었다. 

아직까지 엘베른이 대신전 벽화 속에서 깨어난 요정이라고 굳게 믿는 걸 보면 틀림없다.

어쨌거나 확실히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어떤 황제가 어린아이의 동심을 지켜 주기 위해 ‘요정의 날’을 기념일로 지정까지 해 줄까?

앞으로 든든한 동료가 되어 줄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할애비는 이 노래로 정했다!】

엘베른이 다시 불쑥 나타났다. 바닥을 통과해서 나타난 그의 손끝에는 돌돌 말린 양피지가 둥둥 떠 있었다.

“그게 모예요?”

【악보다.】

“악보가 왜 이렇게 생겨써요?”

시중에 판매하는 보통 악보와는 재질부터가 달랐다. 심지어 아직 잉크가 덜 마른 흔적도 선연했다.

【정말 고심 끝에 직접 만들어 왔으니 부디 잘 부탁한다.】

“직접 작사, 작곡까지 하신 거예여?”

【내 손녀님을 위해서는 이 정도는 기본이지.】

아니, 뭐가 또 이렇게까지 진심 모드이신 건데!

뿌듯한 표정으로 코끝을 문지르는 엘베른을 보니 어쩐지 불안했다.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 ♩♪♬♪ ♩♬♪♬ ♩♩

‘할부지’라고 해도 돼?

내 거라고 해도 돼? 

우리 둘만 아는 애칭이 필요해.

‘할부지, 할부지.’

그러니까 오늘부터 내 거 해.

♬♪♬♩ ♪♬ ♩♪♬♪ ♩♬>

세상에. 이건 또 새로운 사망 플래그인 걸까.

가사 위에 달린 콩나물 대가리를 몽땅 또각또각 부러트리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아졌다.

무슨 이런 흉측한 노래가 다 있단 말인가!

‘이런 걸 불렀다간…… 이불킥은 물론이고, 부끄러워서 기절해 버릴지도 몰라.’

가사를 마음속으로 곱씹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화끈해졌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엘베른의 눈에는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이 할애비는 마음의 준비가 다 됐으니, 언제든 시작해도 좋다.】

제가 안 됐어요, 할아버지.

* * *

한편, 비스의 중심가.

머나먼 길을 헤쳐 온 티가 역력한 마차가 멈춰 서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익숙한 가문의 인장이었다.

“다, 다페 남작이 돌아왔어.”

검투장 비리 사건 이후, 다페 남작은 ‘고향에서 근신하라’는 황제의 명령으로 인해 잠시 수도를 떠나 있었다. 그간 평화로웠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벌써 자숙 기간이 끝난 거야?”

“이거 아주 나쁜 소식이구만.”

그의 복귀 소식은 순식간에 전역에 퍼졌다.

워낙에 망나니 같은 인간인지라, 그를 반기는 이는 없었다.

“없을 때가 좋았는데 말이야. 이제 또 괜히 횡포 부리고 다니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맞아. 하라는 치안 담당은 안 하고 남의 살림살이 때려 부수는 놈보다야, 이방인 출신이라도 알짜배기인 게 훨 낫다니까.”

“어허 이 사람아, 말조심하게. 아직도 라이언하트 가문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마침 마차에서 내린 다페 남작은 멀지 않은 곳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듣고 표정을 팍 구겼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 진절머리 나는 것들 소식부터 들리고 있네.’

성질 같아서는 확 들이박고 싶지만.

모리스 대신관이 한 번만 더 멋대로 행동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다페 남작가는 대신관의 지지를 빼면 중앙 세력에 발붙일 명분이 없었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고분고분히 지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거지 같은 본 성격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빌어 처먹을!”

그는 괜히 길거리에 놓인 주인 모를 나무 상자들을 발로 걷어차면서 화풀이를 했다.

“감히 이 위대하신 다페 남작님의 밥그릇을 꿀꺽해?”

씩씩, 거친 숨을 내뱉으며 우지끈 부서진 나무판자를 노려봤다.

경우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다페는 고향에서 자숙하는 동안 부하들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비스에 돌아오면 은근슬쩍 밑 작업을 해서 빼앗긴 검투장의 소유권을 다시 찾을 계획이었는데.

라이언하트 가문이 그것을 홀랑 가로채 버렸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어찌나 피가 거꾸로 솟던지.

그날 때려 부순 살림살이만 해도 족히 서른 개는 넘었다.

“절대 용서 못 해. 절대.”

다페는 이를 갈며 거리를 활보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상인들이며 행인들이 놀라 바퀴벌레처럼 숨어 들어가는 꼴들이 아주 흡족했다.

‘그래, 본디 위대하신 다페 남작님 앞에서는 저래야 하는 법이지.’

한데 말이야.

잡화점 앞에 멈춰선 다페 남작이 가판대 위에 얹어진 신문을 집어 들었다.

루나 신문

제국력 1537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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