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노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근육 덩어리를 어쩔까.’
사랑스러운 루나에게는 비밀이었지만, 사실 노아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무용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늘 그래 왔다.
굳이 재미없는 소꿉놀이를 했던 것도.
산책을 하다가 하얀색 들꽃을 만나면 살짝 비켜 가는 것도.
매일 밤 혹시 토리 무크가 편지를 전하러 오지 않을까, 창문을 살짝 열어 놓고 잠드는 습관도.
모든 이유는 하나였다.
그의 전부나 다름없는 루나 라이언하트 때문에.
그런데 웬 씹다 뱉은 돼지 껍데기 같은 녀석이 그의 세상을 감히 들먹인다.
“누구를 보러 가자고?”
다페는 노아의 말끝이 묘하게 짧은 게 신경 쓰였지만, 일단 회유하는 게 먼저였다.
“네 친구 루나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 말이다.”
한순간 뽀얀 얼굴 위의 표정이 사라졌다. 하지만 둔한 다페 남작은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친구?”
“그래. 보러 가고 싶지 않아? 우리 집에 있거든, 흐흐.”
루나가 당신 집에 왜 있어?
노아의 안면은 더 확연하게 불쾌한 티를 내며 굳어졌다.
‘……거슬리게 하네.’
그 말이 사실일 리가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상대가 소문이 구린 자이다 보니까, 상상만으로도 왠지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몰려 왔다.
노아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나 친구 없는데.”
“네 녀석, 그 애송이랑 니드 보육원에서 같이 지낸 사이 아니었어?”
“보육원에서 같이 지내긴 했지.”
“그런데 왜 모르는 척하는 거냐?”
설마 겁이라도 먹은 건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보니 얼핏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역시 이 위대하신 다페 남작님의 위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구만.’
자아도취에 잔뜩 취한 다페는 어깨를 괜히 우쭐거렸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노아가 입술을 열었다.
“같이 지낸 건 맞는데, 걔랑 친구 아냐.”
“뭐?”
이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나는 루나랑 한 번도 친구인 적 없었어.”
친구는 안 할 거야, 절대로.
낮게 혼잣말을 읊조리는 노아의 시야 안에 저 멀리 작은 생물체가 들어왔다.
누구 덕분에 관찰력이 좋은 편에 속하는 노아는 그 작은 생물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봤다.
토리 무크였다.
‘루나가 편지를 보냈나 보네.’
금방 표정이 밝아지는 것도 잠시, 노아의 머릿속에 어떤 계략이 스쳤다.
“아야!”
별안간 노아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아이고! 도련님!”
하인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멀리서 얼핏 보면 다페가 노아에게 손을 댄 것처럼 보일 법했다.
노아는 토리가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뻔뻔하게 연기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다페 남작님.”
노아가 뺨을 부여잡고 눈을 글썽이자, 하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헉! 도련님 맞으셨습니까!? 아이고, 아무리 그러셔도 그렇지. 도련님께 손찌검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남작님! 공작님께서 아시면 난리 나겠네.”
“뭐, 뭐야? 난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예기치 못한 전개에 다페 남작이 당황하는 사이, 노아가 멀리 떨어진 토리에게도 들으라는 식으로 큰 소리를 냈다.
“뭐라고요? 남작님네 집에 같이 가자고요? 순순히 가지 않으면 저를 (삐-) 하고 (삐-) 해서 (삐-) 해 버리실 거라고요?”
툭, 도토리를 떨어트린 토리가 후다다닥 멀어지는 게 보였다.
‘곧 나를 보러 오겠지?’
뺨을 감싸 쥔 손 아래로 말려 올라간 노아의 사악한 미소를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얼른 보고 싶네, 내 루나.
* * *
노아에게 안부 편지를 전하러 갔던 토리가 답장 대신 뒷목을 잡을 소식과 함께 저택에 돌아왔다.
“뭐? 다페 남쟉이 노아한테 해코지하려고 했다고?!”
“네, 소인이 똑똑히 보았습니다!”
때마침 내가 준 임무를 수행하고 저택으로 귀가하던 피헨느와 프로스트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광장에서 봤을 때, 수상한 작당을 꾸미는 것 같은 낌새였습니다.”
피헨느가 침착하게 상황을 추가 보고했다. 역시 다페 남작의 복귀 소식을 듣자마자 그쪽에 감시를 붙여 놓았던 건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제 부인의 말이 맞아요, 아가님.”
“아까부터 누, 누가 프로스트 씨의 부인이라는 거예요!”
피헨느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벌게졌고, 프로스트는 뭐가 좋은지 연신 헤실헤실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두 분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걸까?
뭐, 보기는 좋았다.
“아이고 이런. 아가님께서 정해 주신 위장 잠입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는 게 그만…….”
“아가님께서 그런 역할을 정해 주신 적은 없거든요?”
투덕거리면서도 붙어 있는 한 쌍의 커플을 뒤로하고, 노아에게 가기 위해 저택을 나섰다.
아빠와 할아버지가 나 혼자만 보내 줄 리 없었기에 두 남자를 대동하며 나는 리아노 공작가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내내 걱정이 들었다.
‘다페 남작이 노아에게 해코지했으면 어떡하지?’
힘도 무식하게 센 놈이라서 우리 연약한 노아가 견딜 수 없을 테다.
그 못돼 처먹은 악당이 기어이 노아에게까지 손을 댄다면 정말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나 다름없어진다.
진짜 가만 안 둬.
악당 뚝배기 브레이커로서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손을 댈 데가 없어서 어린아이에게 손을 대다니!
“아빠 오늘 다시 뚝배기 브레이커 출둉이에요.”
“빈틈없이 보좌하도록 하지.”
【내 손녀님이 원하신다면 이 할애비도 거들마.】
두 사자님들과 함께 주먹을 말아 쥐고 굳은 다짐을 하다 보니, 어느덧 마차가 멈추었다.
비장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여차하면 사자님들의 힘을 빌려서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루나!”
해맑은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어라?’
토리의 말대로 다페 남작이 노아를 괴롭히고 있는 어마어마한 광경은 펼쳐지지 않았다.
상태가 몹시 멀쩡한 노아가 내가 달려와 내 상태를 살피느라 바빴다.
“왔어? 오는 길에 누가 해코지하지는 않았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는데. 괜챠나? 토리 씨한테 얘기 듣고 오는 길이야.”
토리 씨가 거짓말을 한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의견을 구하기 위해 아빠와 할아버지를 돌아봤는데, 이미 두 남자는 자기들끼리 구시렁대고 있었다.
“수작을 부렸군.”
【네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다.】
둘은 아주 괘씸하다는 얼굴로 노아를 쳐다봤다.
그러든, 말든.
정작 노아는 관심 없어 보였다.
“다페 남쟉……이 너를 괴롭힌 거 아니여써?”
“아아. 그거.”
“응?”
“그분은 잘 모셔 뒀지.”
잠시 노아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표정이 스쳤다.
내가 입을 다시 열려고 할 찰나, 리아노 공작가의 헛간에서 나온 시종이 이리로 다가왔다.
“도련님, 말씀하신 대로 각서는 확실히 받아두었습니다.”
웬 각서?
누군가의 지장이 찍힌 종이를 들고 오던 시종은 우리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라이언하트 가문에서도 도련님을 겁박하러 오신 겁니까……?”
응? 이건 또 무슨 소릴까.
“그런 거 아니니까, 입단속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도련님.”
노아가 나서서 시종의 입에 단추를 채웠지만, 이미 내 귀에 들어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노아, 자세히 말해 죠.”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긴. 시종은 입이 근질근질해서 못 참겠다는 표정인걸.
나는 시종이 들고 있는 종이를 힐끗 곁눈질했다. 엉성하게 쥐고 있는 종이 사이로 다페 남작의 이름이 적힌 게 보였다.
‘각서라는 게, 다페 남작의 각서였어?’
설마 내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그림은 아니겠지.
“했네, 했군.”
【분명하다. 300 퍼센트 확신하마.】
괜스레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 사자님들 덕분에 심경만 더 어지러워졌다.
“노아, 우리 사이에 비밀 만드는 고야?”
“……우리 사이?”
어째서인지 노아는 뺨을 붉히며 내 손을 슬쩍 잡아 왔고, 두 사자님들은 길길이 날뛰었다.
“사위는 무슨 사위! 아직 허락한 적 없다!”
【뭐? 손녀 사위라니? 그럼 이 할애비는?】
……내가 무슨 말이라도 잘못한 걸까.
반쯤 포기한 채로 이마를 부여잡고 대환장 파티가 벌어질 상황을 기다렸는데, 의외로 내 우려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그 대신 노아가 두 사자님들께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제 방에 루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글자 연습했던 종이가 있는데 보고 싶지 않으세요?”
“……뭐?”
【그, 그게 정말이냐?】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였던 사자님들이 한순간 온순해졌다.
“덤으로 루나 두 살 때 찍은 첫 초상화 사진 보여 드릴게요.”
덧붙인 말에 사자님들은 온순한 양이 되었다.
“너, 좋은 녀석이었군.”
【내 손녀의 사위 후보의 후보 정도로는 인정해 주마.】
누가 보면 아주 절친한 친구들인 줄 알 것 같았다. 순식간에 돈독해진 세 남자는 리아노 저택에서 차 한잔하고 가기로 뚝딱 약속 도장을 찍었다.
물론 그 멤버에는 나도 포함이었다.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님. 이건 도련님의 선물입니다.”
아까부터 배경처럼 서 있던 시종이 내게 슬그머니, 종이를 건넸다.
문제의 ‘그’ 각서였다.
별 의심 없이 각서를 열어본 나는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보고 경악을 했다.
<나 몬조거 다페 남작은 라이언하트 영애를 감히 해할 생각조차 하지 않겠습니다. …… (중략) …… 특히나 사냥의 밤 전까지는 라이언하트 백작가 쪽은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자필로 적힌 각서였다.
거기다가 이 군데군데 보이는 얼룩은…….
해맑은 노아를 향해 눈을 찌푸렸다.
“설마…… 때려써?”
“포도주가 맛있었나 봐.”
“이게 어떻게 포도주색이야?”
“오래 발효시키면 색이 달라진대.”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 좀 봐.
“이거 누가 봐도 피인 것 같은,”
“아. 공작가의 딸기잼 파이가 맛있긴 하지. 루나, 너도 딸기잼 파이 먹을래?”
노아가 활짝 웃었다.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씻어 낼 단비처럼 엄청 예쁜 미소였다.
아차차, 하마터면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넘어갈 뻔했다.
“내가 마법 막 사용하지 말랬지!”
“해치지는 않았어. 그냥 대화를 했을 뿐인걸?”
하지만 그 말을 믿기엔…….
그 망나니 같은 다페 남작이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자필 각서를 쓸 리가 없잖아!
“루나 말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 줄 거라고.”
노아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덧붙였다.
“이번에 느낀 건데, 그게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어졌어.”
……내 햇살이 언제 이렇게 먹구름 그득그득하게 낀 흑막이 되어 버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