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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113/142)

113화

정의감 같은 게 불탔다.

원작에서 노아가 극 후반부에 어떤 식으로, 어디까지 밑바닥으로 추락하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내 햇살캐는 내가 지킬 거야.’

무릇 비슷한 성질은 비슷한 것끼리 모이는 법이다.

어둠은 어둠을 불러들인다.

나쁜 생각은 나쁜 생각을 낳고, 못된 짓을 저지르면 더 큰 못된 짓이 돌아오는 게 인생의 순리다.

이 이치는 고스란히 노아가 가진 마력의 ‘특성’에도 적용된다.

원작에서 언급되길.

<노아가 가진 마력은 ‘치유’에 특화된 마법이다. 해서 남들을 치료해 주는 목적이 아닌, 해하려는 목적으로 마력이 사용되면 스스로의 몸에 독이 된다.>

―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 성질과 모리스 대신관을 향한 노아의 복수심.

그리고 리아노 공작이 노아에게 가르친 흑마법.

노아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세 가지의 악재는 원작 속 성인이 된 노아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그런 전개만큼은 막고 싶었다.

‘나쁜 놈들 때문에 내 노아가 불행의 길을 걸을 필요는 없잖아?’

일단 헛간에 갇힌 다페 남작을 보러 가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시는 우리 노아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매듭을 지어야겠어.

나는 리아노 공작가의 시종이 튀어나왔던 의뭉스러운 헛간 방향으로 향했다.

“루나, 저택은 이쪽인데.”

노아는 자신을 따라오다 말고 샛길로 샌 내게 질문했다.

“다페 남쟉 확인하러.”

“그 근육 덩어ㄹ, 아니 그분은 왜.”

“할 얘기가 이써.”

“무슨 얘기? 내가 대신 전해 줄게.”

표정이 꽤 심각했다.

이로써 노아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을 다페 남작을 헛간에 처박아두려고 마법을 썼다는 짐작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나저나 노아는 대체 얼마큼 강한 마법사인 걸까?’

지난번부터 생각한 거지만, 새삼스레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걱정이 됐다.

“노아가 앞으로 마법을 사람을 해치는 데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알려 쥬께.”

새끼손가락을 노아에게 내밀었다.

평소였으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덥석 내 손부터 잡고 봤을 노아인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반응이 늦었다.

“…….”

“약속 안 할 꼬야?”

“노력은 해 볼게. 근데 확신은 못 하겠어.”

노아는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고 약속을 맹세하는 것 대신, 내 손가락 끝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저 자식이!”

【오, 신이시여. 당신 곁으로 한 명 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남자의 발끈하는 소리가 얼핏 들려왔지만, 지금 내 신경은 온통 노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시선을 옭아맸다.

나의 착한 노아. 와중에도 내게 거짓말은 하지 않으려고 솔직히 대답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노아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행동했댜는 건 알아.”

“다른 건 다 참아도 루나 너를 위협하는 것만큼은 못 참겠어.”

그걸 어떻게 참아.

깊은 생각에 잠겨 낮게 중얼거리는 모습은 고작 여섯 살짜리라기에는 믿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공기 중을 타고 미미하게 느껴지는 불안정하고 음침한 기운.

그것은 마치 지난번 황실에서 폭주했을 때의 전조 증상과 비슷했다.

얘가, 얘가. 나 없었으면 어쩌려고 이래.

나는 노아가 또 황실에서처럼 폭주하게 될까 봐서 냉큼 손을 잡았다.

“노아, 쓰읍. 혼나.”

미간을 찌푸리며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내 으름장이 효과적이었나 보다. 

심각했던 표정이 금세 풀렸다. 노아는 배시시 웃었다.

“루나가 싫다면 그러도록 할게.”

“노아가 나를 걱정하듯, 나도 노아를 걱졍해서 그러는 거야.”

“응. 부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빵이 떨어진댔어.”

……이런 말은 또 어디에서 배워 온 거람.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열기에 얼굴이 더워졌다.

‘벌써 갱년기라도 온 거야, 뭐야.’

당황스러운 나머지 아무 생각 대잔치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정말이지 노아는 반칙쟁이야.’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데, 괜히 내가 시선을 똑바로 마주칠 수 없었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만 있는데, 등 뒤에서 사자님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버지, 저 말리지 마십시오.”

【안 잡았다, 아들아. 가라. 본때를 보여 줘.】

돌아보니 두 남자가 이글이글 용암이 들끓는 눈으로 노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말 노아에게 해코지했다가는 내게 미움받을까 봐서 차마 직접 달려들지는 못하고, 나란히 허공에 냥냥펀치만 날렸다.

이럴 때 보면, 우리 집 악당 양반들은 은근 순수하다니까.

“일단 그럼 다 같이 가요. 저 혼쟈 가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세 남자를 어르고 달래서 헛간으로 향했다.

‘이참에 다페 남작도 기르신 남작처럼 체스판 위에서 치워 버릴 만한 방법이 없을까?’

만약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사냥의 밤> 때 훨씬 편해질 터였다.

에덴 제국을 대표하는 사계절 행사 중,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축제인 사냥의 밤.

주최는 대신전과 다페 남작가가 합동으로 맡고 있다.

귀족들은 <사냥꾼>이 되어 정해진 공간에서 ‘사냥놀이’를 즐긴다.

<사냥감>은 다페 남작가가 국경 지역을 토벌할 때 잡아들인 힘없는 초식 수인들이 주를 이룬다.

사실상 말이 ‘놀이’였지, 그것은 집단 괴롭힘이나 다름없다.

‘최악 중의 최악인 행사야.’

사냥의 밤은 제국에서 특히 없애고 싶은 문화 중 하나였다.

‘이번에 반드시 뿌리를 뽑겠어.’

내 계획에 가장 골치 아픈 걸림돌이 바로 다페 남작이었다.

그의 가문은 사냥감으로 쓰일 수인들을 관리하고 있을뿐더러, 남작은 꽤 까다로운 상대에 속했다.

명예나 체면을 중시하는 리아노 공작이나, 이해득실을 따지는 던버르레 공작은 차라리 쉬웠다.

하지만 머리 쓰는 것보다 몸 쓰는 일에 능한, 게다가 머릿속이 텅 빈 미친놈을 어찌 감당할까?

어떤 비겁한 더티 플레이도 서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번에는 어떤 치트키로 판을 뒤집으면 좋을지, 깊이 고민하면서 헛간에 도착했는데.

“어?”

텅 빈 헛간이 우리를 맞이했다.

있어야 할 다페 남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망쳤나 보군.”

상황 파악을 빠르게 마친 아빠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끊어진 포박용 밧줄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개구멍이 뚫려 있었다.

“라이언하트 백작님. 루나를 위해서 당분간 라이언하트 가문의 경비를 강화해 주세요.”

떨어진 밧줄을 주워든 노아가 아빠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아빠와 할아버지의 눈동자 속 수심이 깊어졌다.

* * *

노아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리아노 공작가에 다녀온 이후로 내 주변에는 사망 플래그가 급증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쨍그랑!

“루나!”

외출을 할 때마다 화분이나 도자기 같은 것들이 발치 앞으로 떨어지곤 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서 한동안 외출을 자제하고 있는데도 이상한 일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내 활동 반경이 저택 근처로 줄어들자 방법은 바뀌었다.

쉬이이익, 팟!

【위험하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화살이 바로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아찔한 상황들이 펼쳐졌다.

그뿐이랴?

멀쩡하던 마차 바퀴가 갑자기 나간다거나, 누군가 던진 돌멩이로 인해 창문이 깨진다거나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저택 주변의 경비를 강화해도 별 소득은 없었다.

다행히 위기의 순간마다 아빠와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무사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 목숨을 노리고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것 같지는 않다는 거야.’

상대는 교묘하게 나를 겁주는 선에서만 일을 벌였다. 그로 인해 물리적으로 부상을 입은 적이 없는 걸 보면 확실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노리는 건가?’

그게 목적이라면 확실히 성공에 가까웠다.

이런 일이 벌써 일주일째 지속되는 바람에 라이언하트 가문은 초 예민 상태이니까.

특히나 아빠와 할아버지는 밤잠도 줄여 가며 2교대로 보초를 섰다.

‘언제까지고 이럴 순 없어.’

특히나 아빠 같은 경우에는 기껏 고쳐 놓은 불면증이 다시 재발하기 직전이었다.

더는 참아 줄 수 없었다.

8일째 되는 날 아침.

나는 아빠와 할아버지와 불러 모아 긴급회의를 열었다.

“더는 이렇게 지낼 수 없어여.”

눈 밑이 부쩍 퀭해진 두 남자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분명 다페 남작의 소행이다.”

【당장 가서 그 숨통을 틀어 버리고 오마.】

나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대놓고 고발하거나, 정면승부로 나설 수는 없었다.

물증은 없는 상태이니까.

어찌나 얍삽하게 감시망을 피해 가던지.

그간 모리스 대신관의 심복 노릇을 하면서 쌓인 내공이 허투루 쌓인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심증만으로는 무턱대고 걸고넘어질 수는 없써요.”

“어째서지?”

“이렇게 치밀히 일을 꾸미고 움직이는 걸 보면 절대 다페 남쟉 혼자서 꾸민 일은 아닐 거에여.”

【배후에 누가 있다는 건가?】

“녜. 그 무식이라면 군대를 이끌고 저택에 쳐들어오지 않았을까여?”

하긴.

아빠와 할아버지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리아노 공작이었다면, 노아가 일찌감치 눈치를 채고 내게 언질을 줬을 터였다.

던버르레 공작의 솜씨 역시 아니었다.

그는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현금 박치기로 해결 보려는 스타일이니까.

그렇다면 짐작 가는 이는 딱 한 명.

“모리스 대신관일 꼬에요.”

“그쪽으로 감시를 보내도록 하겠다.”

【차라리 대신전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것은 어떻냐?】

세 사람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한창 해결 방법을 고안해 내고 있을 때, 2층 집무실의 창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님, 아가님!”

“토리!”

토리의 티셔츠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순간 불안함이 엄습했다.

“토리 무크, 상황을 보고하도록.”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감지한 아빠가 침착하게 물었다.

“테러가,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녜?”

테러라니?

아빠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피해 규모는?”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테러라 아직 파악 중에 있습니다. 현재 파악된 바로는…….”

토리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로 인해 피헨느 씨와 프로스트 남작께서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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