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난데없이 발생한 테러로 인해 비스의 번화가는 소란스러웠다.
“이게 갑자기 무슨 난리래?”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래도 이 난리 중에 인명 사고는 크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지.”
“다행이긴, 이 사람아! 츄르 상점과 릴까스 가게의 주인장들이 다쳐서 당분간 나란히 영업 못 하게 생겼는데. 무슨 낙으로 사나 몰라.”
“아, 그 얘기 듣긴 했는데. 진짜야? 아이를 구하려다가 다쳤다며?”
무수한 소문을 뚫고 피헨느와 프로스트 남작이 입원해 있는 리르다 병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2인실로 안내받았다.
“피헨느! 프로스트 남쟉밈!”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피헨느가 벌떡 일어나 우리를 맞이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아가님의 가게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절뚝이는 다리로 나와 아빠에게 거듭 고개를 숙였다.
“부상은?”
“전 괜찮습니다.”
“부서진 건물은 수리하면 그만이니까 신경 쓸 것 없어.”
“하지만 츄르 상점은 단순히 기물 파손 수준을 넘어서 복구 작업이 오래 걸릴 겁니다.”
본인이 다친 와중에도 가게를 지키지 못했던 것을 신경 쓰는 피헨느가 안쓰러웠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도로 간이 의자에 앉히며 질문했다.
“화재까지 발생했다고 했쬬?”
“네, 아가님. 면목 없습니다.”
“아이챰, 그런 건 괜찮대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두 분, 다친 곳은요?”
“저는 발목 인대가 놀란 것뿐이라서 괜찮은데 프로스트 씨가…….”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프로스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의식이 없었다.
발목에 붕대만 감은 피헨느와 달리, 프로스트는 이름 모를 의료 기기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확연히 프로스트 쪽이 더 심하게 다친 것처럼 보였다.
“전신에 화상을 입었군.”
이든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프로스트의 상태를 살폈다.
“프로스트 씨가 저와 아이를 구하겠다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 바람에.”
“평범한 인간이니까 회복 시간은 오래 걸리겠어.”
“의사의 소견으로는 깨어난 후에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피헨느의 시선이 힘없이 늘어진 프로스트의 손등 위에 머물렀다.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이 바보 같은 남자가 대체 어쩌자고 거길 뛰어든 건지…….”
그녀는 무언가를 참아내려는 듯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아랫입술의 미세한 떨림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늘 차분한 편에 속했던 피헨느가 이런 표정을 짓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저 마음을 왠지 알 것 같아.’
일전에 펄펄 끓는 소스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앞뒤 가릴 것 없이 몸을 던졌던 이든의 행동이 떠올랐다.
괜스레 내 속도 뜨거워졌다.
“오는 길에 보고받아써요. 고의적인 방화인 것 같다고.”
“네. 이런 쪽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피헨느가 우리 앞으로 부러진 화살을 꺼냈다. 화살대에는 살짝 불에 그슬린 쪽지가 묶여 있었다.
아직 탄 냄새를 머금고 있는 쪽지를 열어 봤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처음 보는 낯선 필체에서 적대감이 읽혔다.
그것은 앞으로도 내 주변 사람들이 다치게 될 거라는 겁박이었다.
“그리고 화재 지점에서 이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피헨느가 내게 반쯤 형체가 없는 것을 건넸다.
“이건…….”
어그러지고 불에 탄 흔적 때문에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눈에 익은 문양이 적혀 있었다.
니드 보육원 화재 때 봤던 폭죽이 뭉텅이로 묶여 있었다.
이로써 적은 확실해졌다.
* * *
병문안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아빠와 나는 회의에 들어갔다.
리챠드는 츄르 상점 수습으로 부재중이었고, 할아버지는 저택 주변을 순찰하러 나가셔서 우리 둘뿐이었다.
“대책이 필요해요. 가게와 센터들에 경비를 보충할 수 있을까여?”
“불가능하다. 지금도 일손이 부족해. 경비대를 고용할 재정은 충분하지만, 신뢰의 문제다.”
아빠의 말대로 무턱대고 아무나 고용할 수 없었다. 수도 비스에서 고용되는 경비대 대부분은 다페 남작가의 소속이니까.
“그럼 저택의 경비 배치를 쥴이고 그쪽으로 돌리는 건요?”
“다른 건 몰라도 네 주변을 소홀히 할 수 없어.”
“그렇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오늘과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에요.”
이번에는 다행히도 피헨느와 프로스트 남작님 두 분 다 무사히 목숨을 건졌지만, 미래는 장담할 순 없다.
앞으로도 불시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에는 다행히 프로스트 남작이 목숨 걸고 구한 덕에 아이는 무사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운이 좋아서였다.
만약 폭발이 더 컸더라면?
그 상황에서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든 피헨느와 프로스트 남작이 없었더라면?
자칫하면 우리와 관련도 없는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을 뻔했다.
그랬더라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무거웠을 거야.
‘그 자식들이 남긴 쪽지에 따르면 오늘은 시작일 뿐이라고 했어.’
더 큰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그간 망각하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이곳이 사망 플래그가 난무하는 피폐 소설 속이라는 걸.
간담이 서늘해졌다.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경비대 인원이 부족하면 리챠드와 내가 맡으면 되니까.”
“하지만 아빠도 그렇고 리챠드도 여기서 잠을 더 줄였다가는 쓰러질지도 몰라여.”
이번 주 내내 두 남자가 제대로 쉬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 주변을 지키느라 잠은 쪽잠으로 해결하는 듯했고, 거기다가 이제 테러 현장의 뒷수습도 해야 하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터인데.
여기서 더 무리를 하시겠다고?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따님께서는 아빠가 인간들과 다르다는 걸 까먹은 모양이군.”
나를 안심시키려는 배려였다.
헝클어진 내 양 갈래 머리칼을 정성스럽게 정리해 주는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아직은 거뜬하니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그래도…….”
“쉬이, 괜찮아.”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이건 어른의 몫이야.
다정한 속삭임이 가슴 아팠다.
“버틸 수 있다는 거지, 힘들지 않다는 건 아니쟈나요.”
“피곤하지는 않나?”
아무렇지 않게 내 질문을 가로채 간 그는 도리어 내 표정을 살피며 나를 걱정했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인뎨.”
“부모란 원래 그런 법이다.”
그가 나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따뜻한 품속에서 서로를 향한 걱정이 잠시 오고 갔고, 회의는 재개됐다.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우리에게 밤은 짧았다.
본토의 지원군을 에덴 제국으로 밀입국시키는 방법.
역으로 대신전을 치는 방법.
모리스 대신관과 그 작당에게 감시를 붙이는 방법.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거론됐지만, 시간이 부족하거나 위험부담이 큰 문제 탓에 기각됐다.
회의는 계속해서 도돌이표였다.
시곗바늘이 새벽 1시를 가리킬 때쯤, 리챠드가 귀가했고 끝날 줄 모르던 회의도 잠시 멈추었다.
“두 분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왜 이렇게 늦게 와써요.”
“가져가야 할 서류가 있어서 잠시 들른 겁니다. 다시 또 나가 봐야 합니다.”
서류를 챙기는 리챠드의 모습은 겉보기에도 무척 피곤해 보였다.
“잠은요?”
“화재 현장 수습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오는 길에 겸사겸사 릴까스 가게도 살피고 왔는데, 그곳도 그곳 나름대로 상황 정리가 필요하더군요.”
직역하자면 당분간 쉴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어또캐…….”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밤이 늦었는데 얼른 잠자리에 드셔요, 아가님.”
왜 내 주변에는 본인 몸보다 내 걱정을 하는 사람들만 있는 건지.
고맙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상하기도 했다.
“몰골이 영 아니군. 쉬었다가 내일 해.”
아빠가 혀를 쯧 찼다. 아빠의 눈에도 리챠드가 한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나 보다.
“배려해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하나, 내일 오전 아가님의 호위는 제 차례라서 미뤄 둘 수 없습니다.”
“그럼 내가 대신 다녀올 테니까, 쉬어.”
“그러기엔 각하께서도 충분히 피곤해 보이십니다만. 오늘 밤 아가님의 곁을 지키는 것은 각하의 차례기도 하고요.”
리챠드 말도 옳다.
아빠 역시 리챠드 못지않게 피곤해 보였다. 게다가 오늘 밤 적의 위협으로부터 내 안전을 지켜줄 이는 아빠였다.
“원래 제가 해야 할 일이니 괜찮습니다.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얼른 아가님을 침실로 모시고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리챠드으…….”
나는 아빠의 품에서 내려와 리챠드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다리를 꼬옥 껴안으며 훌쩍거리니, 리챠드가 무릎을 굽혀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뚝 하셔요, 아가님. 그러다가 내일 아침에 두 눈이 밤 빵이 되겠습니다.”
“리챠드도 같이 쉬었으면 좋게써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를 번쩍 안아서 이든에게 안겨 주었다.
“좋은 꿈 꾸세요, 아가님. 내일 아침이 밝기 전까지 돌아오겠습니다.”
리챠드는 이든의 품에서 울먹거리는 나를 뒤로하고 집무실의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그런데 그 앞에는 웨인투르가 떡하니 서 있었다.
“웨인투르 씨?”
집무실 앞을 막고 선 웨인투르는 놀란 리챠드의 손에서 서류를 가로챘다.
“두 분 다 들어가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밤은 제가 아가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됐다.”
리챠드와 아빠가 동시에 말했다.
“충분한 휴식이 있어야 일의 능률도 오르는 법입니다.”
“마쟈요.”
웨인투르의 말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웨인투르 씨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은 가급적 빨리 처리해야 하는 일입니다.”
리챠드가 정중히 묵례하며 웨인투르에게서 다시 서류를 가져갔다.
그녀는 순순히 서류를 넘기며 덧붙였다.
“기어이 아가님을 울리고 싶으신 거라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자연스레 두 남자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아빠, 리챠드.”
나는 잔뜩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아빠와 리챠드를 차례로 보며 애원했다.
“오늘 저랑 같이 코코해요. 녜?”
아까부터 참고 있었던 눈물이 떨어질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눈꼬리 끝에 붙어 있는 걸 본 두 남자는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