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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15/142)

115화

아이의 눈물에 장사인 어른은 없다.

결국 아빠와 리챠드는 나란히 침대에 눕게 됐다. 두 남자가 두 다리 뻗고 누운 걸 본 게 일주일만이었다.

“그럼 세 분 다 좋은 꿈 꾸세요.”

웨인투르가 불을 끄고 나가려 하자, 리챠드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무래도 웨인투르 씨에게 괜한 짐을 짊어지게 만드는 것 같아 영 마뜩잖습니다.”

“그간 몸을 다 회복했으니, 이제 밥값을 해 볼 생각입니다.”

웨인투르는 빨간 장갑을 고쳐 끼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굳이 밥값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라이언하트 가문은 궁핍하지 않다.”

 아빠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근심을 표했고, 웨인투르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가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저조차도 포기한 삶을 빚졌으니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게 수인들의 도리니까.

본디 수인은 받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는 법.

그 곧은 심지를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아빠와 리챠드는 더는 웨인투르를 말리지 못했다.

“웨인투르, 그래도 리챠드 말대로 안 가면 안 돼여?”

“아가님께서도 제가 혹 다칠까 봐서 걱정하시는 건가요?”

쉬이 부정하지 못했다.

웨인투르 역시 내가 품기로 한 나의 친애하는 가족이니까.

웨인투르를 보고 있자니 부상을 입고 입원한 피헨느와 프로스트의 얼굴이 자꾸 겹쳐 보였다.

“오늘은 같이 쉬고 내일 아침에 다 같이 가요. 녜?”

“누군가 한 명은 죄 없는 이들이 휘말리는 일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네 명이 다 누우면 침대 다리에게는 가혹한 시련이 될 테고요.”

그녀가 우리 셋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침대를 보며 농담을 던졌다.

“웨인투르 씨께서 저를 대신해 저택 보초를 서 주시겠다는 호의까지는 마다하지 않겠습니다만. 화재 현장에 직접 가시는 것은 반대하고 싶습니다.”

“동의하는 바이다.”

두 남자가 우려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아직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검투장의 일들이 남아 있으니까.’

그곳에서 이름을 날렸지만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수인 검투사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다.

‘세 치 혀가 만들어 낸 단두대에 올라가게 되겠지.’

그걸 모를 두 남자가 아니었다.

복수를 위해 에덴 제국에 잠복한 동안 그들이 숱하게 겪은 날들이 있었기에.

“원래 예정된 대로 그냥 제가 다녀오는 게 좋겠습니다.”

“제게도 기회를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듣다 못 한 리챠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걸, 웨인투르가 말렸다.

“지난날은 사정이 있어서 참기만 했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별이 된 내 아이를 위해서라도 맞서 싸우고 싶습니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그녀는 여느 때보다 강인한 결심으로 차올랐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다물었다.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우려보다 훨씬 강한 여인이라는 것을.

“무엇보다 제가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웨인투르가 내게 다가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다치지 않고 돌아오기로 약속하겠습니다.”

그 약속에 걸린 무게를 알았다.

웨인투르는 아이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나는 엄마가 권투 할 때가 제일제일 멋쪄 보여요!>

사활이 걸린 검투장 생활 중에도 그녀가 끝까지 날붙이를 들지 않았던 이유는 딸아이와의 약속 때문이었으니까.

“반드시 약속 지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와요, 웨인투르.”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웨인투르가 저택을 떠났다.

달이 유독 밝은 밤이었다.

* * *

웨인투르는 정말 약속을 지켰다.

새벽 여명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이른 시간. 별 탈 없이 돌아온 웨인투르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녀 손에는 의문의 남자가 붙들려 있었다. 복면을 쓴 자였다.

그는 손발이 포박되어 있었고, 입에 재갈 같은 것이 물려 있어 말을 하지 못했다.

오래간만에 아빠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건, 뭐지?”

“돌아오는 길에 수상한 자가 근처 여관에서 얼쩡거리고 있기에 잡아 왔습니다.”

“근처 여관이라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근방 여관 중, 모리스 대신관 일당들의 표적이 될 만한 곳이라면 한 곳뿐이었다.

‘우리 니드 보육원 식구들이 지내는 곳.’

나는 시선을 돌려 웨인투르의 발치에 무릎 꿇려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포박된 사내는 한눈에 봐도 살수로 고용된 자 같았다.

“아마 그쪽에도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여관 사람들은 무사해여? 아무도 안 다쳤쬬?”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프리마 숲에서 살수에서 쫓겼던 때가 떠올라서였다.

“그곳에 아는 분이라도 있습니까?”

“스트리트 3가 파란 지붕의 여관이라면, 일전에 루나가 지냈던 보육원 식구들이 머무는 곳이다.”

아빠가 불안해하는 나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그분들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친 이는 아무도 없어요.”

“다들 아직 그 여관에 있써요?”

“일단 급한 대로 여관에 머무는 분들 모두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 다행이었다.

모두가 무사하다는 말에 한시름을 놓은 나와 달리, 아빠는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끄나풀은 하나인가?”

“근처를 샅샅이 찾아봤으나, 이자 외에는 없었습니다. 심문을 통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심문은 내가 직접 한다.”

아빠가 직접?

의외의 처사였다. 사실상 보육원 식구들의 안위는 이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든에게 있어 철저히 남일 테니까.

그런데도 아빠는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나섰다.

원래의 이든 라이언하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그런 그를 변하게 만든 건…….

“이리 와, 루나.”

형형한 기운의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향할 때 부드럽게 누그러들었다.

나는 내게 손을 뻗은 이든을 향해 총총총 달려가 안겼다.

이렇게 문득문득 그의 사랑을 느낄 때마다 새삼스럽게 마음이 뭉클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지껄일지 들어나 보지.”

아빠의 명령에 웨인투르는 살수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 주었다.

살수는 입이 자유로워지자, 혀를 아무렇게나 놀렸다. 

“나 하나 없애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내 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서슬 퍼런 말을 해 댔다.

당장이라도 무기가 있다면 나한테 덤벼들 것 같은 기세였다.

“주제도 모르고 건방진 네 딸을 탓해라.”

“주제를 모르는 건 그 주둥아리겠지. 다물어라.”

“모든 원망이 네 딸에게 향할 것이다. 주변이 불행해지는 건 모두 네 딸의 어리석음 때문이니까!”

나 때문에 주변이 불행해질 거라고?

그가 쏟아 내는 맹렬한 힐난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적대감 넘치는 갈색 눈동자가 마치 내 폐를 움켜쥔 것처럼 숨이 막혔다.

“다 네 탓이야!”

핏대를 높이며 소리를 지른 살수가 벌떡 일어서 나를 향해 달려 들려 했다.

동시에 이든이 한쪽 팔을 뻗어 내 눈을 가렸다.

‘!’

앞이 캄캄해진 와중에 양쪽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무언가 강하게 살덩이를 강타하는 소리, 그리고 살수의 외마디 비명이 차례대로 들렸다.

“커억!”

몸이 포박된 살수의 공격은 내게 닿지 못했다.

보이지 않지만, 아빠와 웨인투르의 합작인 듯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건방진 혀를 ……버리고 싶지만.”

“아가님의 정서상 당장은 참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내 따님께 그다지 저급한 장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으니까.”

“좋은 아버지가 다 되셨네요.”

아빠와 웨인투르의 대화 밑으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목젖을 강타당한 듯, 한참을 쿨럭거리던 살수가 악에 받친 소리를 냈다.

“네놈들은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ㅇ……!”

재차 들린 타격음에 살수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한 채 허공에 메아리쳤다.

아빠의 손가락 틈새로 얼핏 상황이 보였다.

“흐억!”

공기를 직선으로 가로지른 빨간 주먹이 살수의 중요 부위 바로 앞에서 멈췄다.

직접적인 가격 없이 위협만 했을 뿐인데, 창백하게 질린 살수는 까무룩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이내 남자의 바짓가랑이 사이가 흥건히 젖어 들었다.

“리챠드가 보면 한 소리 하겠군.”

아빠가 혀를 쯧 찼다.

“일단 정신을 다시 차릴 때까지는 다른 곳으로 치워 두겠습니다.”

“좋은 생각이군. 내 따님의 눈을 굳이 버릴 필요는 없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를테면 지난번에 스치듯 말했던 지하 감옥 같은 곳에서- 어마어마한 심문이 있으리라 예상됐다.

나름대로 내 동심을 지켜 주시려 노력하시는 것 같았지만. 어쩐지 아빠와 웨인투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빠, 살려 두셔야 해여.”

“……왜지?”

아빠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움찔했다.

이거 봐봐. 내가 말 안 했으면 정말 큰 일 치르실 뻔했다니까.

“깨어나면 풀어 줄 꼬에요.”

“풀어 준다고?”

“녜. 어차피 캐물어도 소용업써요. 모리스 대신관한톄 세뇌되어 있으니까요.”

만일 꼬리가 잡혔을 경우를 대비해 뒀을 것이다. 언제든지 자르고 모르는 척하기 쉽도록.

“배후가 누구인지 불지 않는다면 경고로 써먹어도 된다.”

살벌한 말이었다. 맹수의 세계에서 잡은 사냥감을 경고로 쓴다는 의미는…….

마른침을 조용히 삼켰다.

아빠는 한다면 하는 사자였다.

물론 지금 써먹기에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라이언하트 가문과 관련된 곳에서 흉흉한 일이 일어나는 상황이라면, 그런 식의 겁박은 괜한 소문만 불러일으킬 터.

‘애써 올려놓은 우리의 평판을 바닥으로 떨어트려 놓으려 하는 걸지도 몰라.’

오히려 모리스 대신관이 원하는 그림이 그려질지도 몰랐다.

“으음, 아빠. 그 방법은 좋지 않을 것 같아여.”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

“당연히 있쬬.”

사실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쯤은 어림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미안하지만, 모리스. 나는 바보처럼 당할 생각이 없어.

“우리한테는 히든카드가 있쟈나요.”

“히든카드?”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둘에게 씨익 미소 지었다.

“벤 쟝 씨를 부를 때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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