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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116/142)

116화

“전적으로 내 딸의 뜻대로 따르겠다.”

한 치의 고민 없는 결정이었다.

간밤에 있었던 테러로 승마용품 제작 작업을 멈춘 탓에 벤 쟝은 곧바로 계획에 투입됐다.

“벤 쟝 할부지 하실 수 있쬬?”

“오, 나의 햇살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 드려야지 않겠슈?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볼까나.”

카멜레온 능력은 정말 볼 때마다 신기했다. 벤 쟝의 원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살수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후후, 어떻슈?”

“헉 완젼 똑같아!”

생김새에 한 번 놀라고 목소리를 듣고 한 번 더 놀랐다.

일전에 모리스 대신관으로 변신했을 때도 놀랐었는데.

새삼스레 카멜레온 수인의 능력에 감탄이 나왔다.

“이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겄슈?”

벤 쟝이 뿌듯한 표정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던 살수의 얼굴로 느물느물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감쪽같은 것도 모자라 소름 끼칠 정도군.”

“하하, 저기 저쪽 동녘 땅에서는 격한 부정은 칭찬이라던데, 내 부끄럽소.”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다.”

껄껄껄 웃는 벤 쟝에게 미리 적어 둔 지령을 쥐여 줬다.

“좋아요. 벤 쟝 할부지는 가을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잠복하시는 거예요. 잘하실 수 있쬬?”

“오, 그건 내 특기지! 통신은 지난번처럼 하면 되나?”

“녜. 토리 씨의 마법 도토리를 빌려 드릴게여.”

스텔라를 데리고 왔을 때도 도토리로 연락해 본 적이 있어서 사용법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저 남자는…….”

나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살수를 힐끔 바라봤다. 언제 얻어맞았은 건지,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있었다.

“아빠가 맡아 쥬세요.”

“뼛속까지 탈탈 터는 것은 식은 수프 먹기다.”

아빠는 눈을 번뜩이며 살수를 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빠한테 맡겨 놨으니 탈출 걱정은 없겠어.’

맹수의 집요함을 알고 있기에 뒷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 내가 신경 쓸 건 간단해.’

혹시 모를 추가 테러를 막는 것과 함정을 파 두는 것.

두 가지 다 이미 계획은 머릿속에 그려 두었다.

‘모리스 대신관, 네가 만들어 놓은 사망 플래그 따위 보란 듯이 극복해 주마.’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다칠까 봐, 혹은 죄 없는 사람들이 휘말릴까 봐 두렵긴 했다.

‘하지만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도피는 답이 될 수 없다.

때론 눈앞의 위기에 깨지고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부딪혀 봐야 극복도 할 수 있는 법이다.

‘게다가 난 혼자가 아니니까.’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라이언하트 가문의 식구들이 함께 싸워 주고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웨인투르, 보육원 식구들을 보러 가고 시퍼요.”

“아가님을 호위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신다면야, 언제든 환영이죠.”

웨인투르는 피곤한 기색 없이 내게 웃어 주었다.

* * *

모두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이든은 붙잡은 살수를 심문하기 위해 지하 어딘가로 사라졌고, 할아버지 엘베른은 저택 경비를, 리챠드는 검투장의 상황을 살피러 갔다.

나는 아빠의 허락 아래 웨인투르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

우리의 목적지는 스트리트 3가였다.

“저분…… 라이언하트 영애님 아니야? 그 옆에는…… 헉!”

“쉬잇. 눈 마주치지 말게. 괜히 얽힐 수 있으니 우리는 어서 우리 갈 길이나 가자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고개를 내리깔며 급히 자리를 옮겼다.

‘……응?’

방금 대놓고 피한 것 같은데.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어딘가 도망가기 급급한 듯 굴었다.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들을 붙잡아서 나무라지는 않았다.

어제 있었던 테러로 인해 마음이 뒤숭숭해서 그러려니 했다.

“새벽에 급하게 장소를 옮긴지라, 그리 시설이 좋은 곳으로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괜챠나요. 저택으로 데려올 생각이라서.”

“그분들 모두를 말이에요?”

“언제 또 위협에 노출될지 몰라여. 아빠한테는 손님용 빈방을 내어 달라고 부탁드려 놔써요.”

“허락을 받으셨군요.”

웨인투르가 짧게 탄성을 뱉었다.

놀라는 반응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수인들 중에 이든이 인간을 얼마나 싫어하는가에 관해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런 그가 자신과 하등 관련 없는 인간들을 가까이 두는 일을 선뜻 허락했다는 건 큰 의미였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보금자리 한편을 내어주는 일인데도 말이다.

‘나도 조금 얼떨떨하긴 해.’

사실 물어보면서도 이번에는 어떤 흑역사 선물로 딜을 해야 할까 고민을 했었는데.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선뜻 허락을 해 줘서 놀랐다.

“옮긴 곳은 이쪽, 건물입니다.”

웨인투르가 파란 지붕의 건너편 건물을 가리켰다. 다른 곳에 비해서는 조금 낡은 구석이 있었다.

“숙박비만 계산하고 바로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종이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니, 퀴퀴한 마른 먼지 냄새가 풍겼다.

암막 커튼과 깨진 조명으로 인해 안은 밖보다 어두워 보였다.

“주인장 없는가?”

“자리를 잠시 비웠나 봐여.”

보통 종소리가 들리면 반기러 나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손님을 맞이해야 할 카운터가 텅 비어 있었다.

“저쪽에서 말소리가 들립니다.”

나보다 청각이 더 예민한 웨인투르가 한쪽을 가리켰다. 두런두런 들리는 대화 소리를 따라가니 두 남녀가 심각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어쩌려고 그 사람들을 다 쫓아낸 거야?”

“그럼 어떡해. 돈이 궁한데. 그 손님들이 라이언하트 가문이랑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단 말이야.”

우리 가문 얘기가 왜 나오는 거지?

그들의 대화를 자세히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나 참, 단체 손님이 와서 이번 달은 발 뻗고 자나 싶었더니만.”

“그냥 모르는 셈 치고 받지 그랬어.”

“거, 며칠 숙박비 받자고 건물을 통째로 날려 먹을 일 있어? 자네도 어제 들었잖아. 츄르 상점이랑 릴까스 가게가 있던 건물이 난리 난 거.”

“그럼 라이언하트 가문과 엮이면 봉변을 당할 거라는 소문이 진짜란 말이야?”

“난들 알아? 일단 소문이 흉흉하니까 피하고들 보는 거지.”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를 두고 어린아이를 구한 영웅들이라며 떠들었던 것 같은데, 하루아침에 소문이 180도 바뀔 줄이야.

‘이것도 아마 모리스 대신관의 소행이겠지.’

이런 식으로 상황을 제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대신관의 오랜 개수작 중 하나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원래 대신관이라면 ‘기르신 신문’을 통해 언론 플레이를 했을 텐데, 이번에는 소문을 이용했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간에 당분간 그쪽 가문이랑 엮이지 않는 게 좋을 듯해.”

“이 사람아. 그런 유언비어를 퍼트렸다가 잡혀가면 어떡하려고.”

“내가 언제 없는 말을 지어냈어? 어제 난리 난 곳이 모두 라이언하트 가문에서 운영하는 곳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하는 말이지.”

“하긴. 찝찝하긴 해. 쫓아내길 잘했네, 잘했어.”

더는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쫓아냈댜니요?”

라운지에 앉아 있는 남녀에게 다가가니 그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라…… 라이언하트 영애님?”

그들은 단번에 내 얼굴을 알아봤다. 근래 하도 신문에 실린지라 비스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탓이었다.

“여, 여, 영애님께서는 여기 어쩐 일로.”

“어젯밤에 온 단체 손님들을 만나러 와써요.”

주인장으로 보이는 여자는 당황한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대답하지 못하였다.

“설마 그 사람들을 다 쫓아냈다는 건 아니져?”

“그, 그것이…….”

웨인투르가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를 보며 언짢은 기색을 표했다.

“분명 값을 톡톡히 치르러 오겠다고 약속한 것 같은데, 어찌…….”

“도,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서 그렇지요! 사람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돈이 대수입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여?”

“죄송하지만 나,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

겁에 질린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구르던 여자가 눈을 질끈 감고 용기 내어 외쳤다.

“이보게!”

“영애님께서는 재산이 많으실지 몰라도 제게는 이 건물이 전부입니다. 이곳마저 불타 없어지게 되어 버린다면 제게 남는 건 없어요. 부디 이곳을 떠나 주세요.”

“그 말은 지금 우리 아기님께 무례한 행동인 걸 모르나?”

“저라고 그러고 싶은 건 아닙니다. 지금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셔도 같은 답을 들으실 겁니다.”

웨인투르의 항의에도 우리는 건물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덩그러니 거리에 선 우리를 향해 힐끗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축객령이라니.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걱정이 피어올랐다.

“그럼 쫓아낸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뎨요?”

“난들 압니까. 아마 광장 쪽에 가 있든가 하겠지요.”

여자는 눈치를 슬쩍 보며 우리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소금을 뿌렸다.

‘이거구나, 모리스 대신관이 노린 것이.’

문득 깨달았다.

신문으로 언론 플레이를 했을 때는 통제가 가능한 정도였는데, ‘입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아까부터 묘하게 우리를 피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었네.’

반나절도 안 돼서 제멋대로 덩치를 불린 소문은 라이언하트 가문을 ‘불행의 근원’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이다.

“아가님, 괜찮으십니까?”

웨인투르가 내 표정을 살피며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로 울 아기가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은 나를 더 독하고 단단하게 만들 뿐이니까.

“지금 기죽어 있을 때가 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기 전에 보육원 식구들을 빨리 찾아야 해여.”

“광장은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웨인투르가 나를 들쳐 안고 빠른 걸음으로 광장을 향했다.

금방 도달한 광장에서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안 꺼져? 당장 애들 데리고 사라지라고!”

여러 사람이 떼를 지어 삿대질을 하고 있었고, 보육원의 수녀님이 겁먹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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