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42)

117화

상황 파악을 하는 데 시간은 오래 필요하지 않았다.

화난 얼굴의 군중들.

울먹이는 보육원 아이들.

그들과 홀로 맞서고 있는 수녀님.

누가 봐도 갈등의 현장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항상 단정함을 유지하던 수녀님의 옷이 진흙으로 더럽게 얼룩져 있었다.

“얼른 썩 안 사라져?”

“위협적인 언사는 삼가 주세요. 아이들이 겁먹었어요.”

수녀님은 겁먹은 아이들을 등 뒤로 숨기며 다수에게 홀로 맞섰다.

“지금 애들이 문제야? 당신네 때문에 우리 쪽 상가에 부정 타게 생겼는데!”

가장 앞선 사람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그러자 나머지들도 옳다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니드 보육원인지 뭔지, 다 무너져 가는 건물이 수도에 가당키는 하냐고.”

“미관을 해치는 건 둘째 치고 우리 애들이 보고 이상한 거 배울까 봐 무섭다니까요?”

“말씀 가려서 하세요. 애들 들으니까.”

수녀님이 저렇게 화난 모습을 처음 봤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웃으시는 분이었는데.

“저거 봐. 아주 사람 잡겠네. 수준 떨어져서 원.”

“우리 수녀님 욕하지 마!”

수녀님 앞으로 머리가 뻗친 남자아이가 나섰다. 보육원의 개구쟁이, 톰이었다.

“톰, 너는 나서지 마라.”

“싫어요. 수녀님 혼자서 욕먹는 거 보고만 있을 수 없어요.”

수녀님의 만류에도 톰은 꿈쩍하지 않았다. 톰은 아직 6살짜리 꼬맹이면서 자신보다 덩치가 몇 배는 더 큰 어른들을 노려봤다.

“이참에 저것들 싹 다 쫓아냅시다. 처음부터 비스랑 어울리지 않는 종자들이었으니까.”

“옳소. 안 되면 힘으로라도 쫓아내면 되는 것 아니요?”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사람의 ‘수준’을 따지게 만들고, ‘급’을 내리게 만든 걸까.

다 똑같은 사람일 뿐인데.

“맞아! 저자들 때문에 우리 골목도 테러 당하기 전에 부지런히 내쫓자고.”

사람들은 저마다 계란이며 토마토나 진흙덩어리처럼 던질 거리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대로 뒀다가는 당장에라도 있는 것을 총동원해 보육원 식구들을 공격할 기세였다.

“그만들 하세여!”

더는 들을 것도 없이 나섰다.

“루나!”

“꼬맹아!”

나를 알아본 수녀님과 톰은 놀라서 소리를 쳤고,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게 굴었던 이들이 주춤거렸다.

“루나라면…… 라이언하트 백작 가문의 아기 영애님?”

누군가의 혼잣말 덕분에 상황이 더 악화되지는 않았다. 보육원 식구들을 핍박할 때는 적극적으로 나섰으면서 막상 ‘라이언하트 백작가’의 이름은 두려운 모양이었다.

웨인투르가 내 앞으로 서며 그들을 향해 경고했다.

“들고 있는 무기를 거두지 않으면 아가님을 향한 공격 의사로 간주하고 호위의 본분을 다할 것입니다.”

“누, 누가 라이언하트 영애님을 공격한다고 했습니까?”

그들은 손을 뒤로 잽싸게 숨겼다.

아무리 그래도 백작가에 정면으로 맞설 용기는 없어 보였다.

“수녀님, 괜챦으세요?”

“오, 루나. 어제 저분을 보낸 게 너로구나.”

수녀님은 간밤에 신세를 진 웨인투르를 알아보았다. 수척한 얼굴로 애써 내게 웃어 보이는 모습에 도리어 내 마음이 미어졌다.

‘역시 이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같이 있는 게 낫겠어.’

그쪽이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모리스 대신관이라면 목표물을 놓치지 않으려 할 테니까.’

지금쯤이면 대신관은 자신이 보낸 살수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술수로 보육원 식구들을 위협할지 몰랐다.

“우리 저택으로 같이 가여.”

“이미 라이언하트 백작님께 충분히 신세를 지고 있는데 어찌 또 그러니.”

“그렇지만 달리 갈 곳이 없으시쟈나요. 아빠도 허락해 쥬셨어요.”

수녀님은 차마 답을 하지 못했다. 수중에 있는 돈을 모아 따로 숙소를 잡는다고 해도,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니 오빠들을 위해서라도요. 녜?”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구나.”

눈가며 코끝이며 얼굴을 붉힌 채로 훌쩍이는 언니 오빠들을 돌아본 수녀님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 일은 잊지 않고 꼭 책임을 물을 꼬에요. 라이언하트 백작가의 이름을 걸고요.”

“하지만 저희도 억울합니다!”

무리 중에 대표격으로 보이는 자가 나서서 외쳤다.

“억울? 그건 정당하게 돈을 지불하고도 쫓겨난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단어가 아닌가여?”

“저희는 그저 두려워서 그랬을 뿐입니다. 어제 하루 사이에 몇 군데에서 테러가 난 줄 아시나요?”

“그게 이 사람들이랑 무슨 상관인뎨요?”

“그건…….”

“어제 테러가 난 곳이 모두 라이언하트 가문과 관련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쟈나요. 제가 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서.”

사람들의 입이 다물렸다.

나는 지금 이곳에 아빠나 노아가 없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남자가 이 소리를 들었다면 분명 불같이 화를 냈을 테니까.

“오늘은 아가님을 생각해서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웨인투르가 지친 기색의 수녀님을 부축했다. 나는 우는 언니 오빠들을 달래어 일으켰다.

사람들은 선뜻 우리를 막지는 못하고 멀뚱히 바라보며 웅성거리기만 했다.

“저렇게 보내도 되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 그래도 귀족가의 자제인데 함부로 막을 수는 없잖아.”

당장은 모면할 수는 있겠지만,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이번 작전은 인정한다. 모리스 대신관이 우리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다는 것을.

‘사실 살수나 테러로 인한 금전적인 손해는 부수적인 문제야.’

지금 가장 큰 문젯거리는 ‘평판’이었다.

다른 오래된 가문에 비해 지지 기반이 약한 라이언하트 가문이 비스에서 잘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아닌 ‘평판’이었다.

츄릅츄릅 병의 치료제.

요리 대회를 휩쓴 릴까스.

기부 사업과 황제의 후견 선언.

그동안 엄청난 노력으로 쌓아 올린 라이언하트 가문의 평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백 번 잘한 것보다 한 번 못한 걸 더 잘 기억한다더니만.’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모리스 대신관은 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줬을 뿐인데, 원망의 화살은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지금 보니까, 저 호위하는 자 말이에요.”

누군가 대장 격 되는 자에게 하는 말이 선명하게 내 귀에 꽂혔다. 왜 여러 목소리 중 하필 그자가 하는 말이 내 주의를 끌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검투장에서 사라졌다던 수인 검투사 아니에요?”

“맞네, 그 캥거루 검투사!”

대장이 소리치자 잠잠해지나 싶었던 군중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신문에서 본 적 있어요. 빨간 장갑을 끼고 다니는 캥거루 수인! 엄청 폭력적이라고 들었는데.”

“저렇게 막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예요? 누가 가서 경비병들을 불러와 잡아가라고 해요.”

경비병이 출동한다면 웨인투르를 잡아서 가두려고 할 것이다. 단지 힘이 강한 수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것만큼은 안 돼.’

검투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그녀의 자유를 뺏기게 둘 수는 없었다.

“웨인투르는 제 호위 기사예여.”

“저 위험한 짐승이 말입니까?”

내가 편을 들고 나서자, 군중들은 당황해했다.

‘귀족가의 영애가 수인의 편에 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서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이런 설전에 익숙지 않은 평민들이라 그런지 상황은 어찌어찌 잘 헤쳐나갈 기미가 보였다.

‘잘하면 서로 큰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겠어.’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흠, 이쯤 되면 라이언하트 가문의 사상을 의심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또 들려왔다. 아까부터 거슬렸던 목소리였다.

재빨리 그쪽을 쳐다봤지만, 야비하게 사람들 틈에 숨어 버려서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사상’이라고 했어.

보통 대중의 입에 쉬이 오르내리는 단어는 아니었다.

나는 불현듯 누군가를 떠올렸고, 본능적으로 그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인투르. 방금 말한 사람을 잡아 와요.”

“네, 아가님.”

웨인투르가 사람들에게로 한 발짝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이 방어 태세를 갖췄다.

“가, 가까이 다가오지 마!”

지레 겁을 먹은 이 중 하나가 손에 쥔 것을 웨인투르에게 던졌다. 그녀는 날아오는 토마토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철퍽!

물렁물렁한 토마토즙이 그녀의 주먹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그것이 피라도 되는 양,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저, 저거 봐.”

“우리를 공격할지도 몰라…….”

“저 미친 수인이 날뛰기 전에 우리가 잡자.”

여론은 빠르게 뭉쳐졌다.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님, 저 위험한 캥거루 수인을 저희에게 넘기십시오! 저희도 영애님을 위험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던질 거리를 고쳐 쥐며 우리 쪽을 바라봤다.

“백작가의 영애님을 공격하는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마십시오.”

웨인투르가 주먹을 고쳐 쥐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 역시 여차하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힘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냐, 안 돼. 이런 식으로는 모리스 대신관이 원하는 그림대로 될 뿐이야.’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라이언하트 가문에 대한 평판이 더 나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 있자니, 웨인투르가 잡혀갈 위험이 크다.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나가면 좋지?’

뾰족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긴장감은 더 커졌다.

마침내 누군가가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는 순간.

“그만 멈춰요!”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사람들 틈 사이로 비집고 나타났다.

……누구지?

그가 우리를 보호하듯 두 팔을 벌려 사람들 앞을 막아섰다. 처음 보는 뒷모습이었다.

“케빈?”

사람들 틈에서 아이를 알아본 자가 있었다.

“창피하지도 않아요?!”

아이가 소리쳤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익숙한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케빈이라면 노아랑 톰이랑 같이 종종 전쟁놀이하던 애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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