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42)

118화

노아는 보육원에 있을 때부터 인기가 많았다. 또래 여자아이들한테는 물론이었고 남자아이들도 노아와 놀고 싶어 했다.

‘특히 톰이 노아를 무척 좋아했었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톰은 노아를 볼 때마다,

[야. 그런 시시한 소꿉놀이 말고, 우리랑 전쟁놀이하자. 오늘 스트리트 3가 애들이랑 하기로 했단 말이야.] 

―라며 졸랐다. 그러나 노아는 매번 나랑 숲으로 풀꽃이나 따러 다니며 엄마 아빠 놀이를 했다.

그런 날이면 톰은 늦은 저녁에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돌아와 프리마 숲에서 모아온 풀꽃을 돌로 콩콩콩 찍고 있는 우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쫑알거렸다.

[에이씨. 케빈네한테 또 졌어. 이번엔 거의 이길 뻔했는데. 노아, 네가 있었으면 이겼을 거야. 오늘은 저 코흘리개랑 놀아 줬으니까, 다음은 우리랑 전쟁놀이해야 한다?]

[생각해 보고.]

[어? 진짜지? 너 약속했다!]

톰은 전쟁놀이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가 우리 보육원의 골목대장이라 했다. 케빈은 스트리트 3가 쪽의 골목대장이었고.

두 골목대장은 라이벌인 동시에 죽마고우였다.

나는 너무 작고 어려서 언니 오빠들이 하는 전쟁놀이에 따라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케빈의 얼굴은 처음 보는 거지만…….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지네.’

귀에 딱지가 앉도록 톰에게 전해 들어서 그런가?

개구쟁이 티가 팍팍 흐르는 빨간 뒤통수를 보고 있으니, 불안했던 마음이 놓였다.

“도움을 실컷 받아 놓고서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바뀔 수 있어요?”

“뭐라고?”

“엄마, 라이언하트 가문 덕분에 형이 꿈을 이뤘다고 좋아했잖아.”

“얘는 무슨 말을……. 너 이리 안 와?”

케빈과 같은 머리 색을 가진 여자가 다급히 아들에게 손짓했지만, 케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할리슨 아저씨는 얼마 전에 라이언하트 가문의 지원 덕분에 엘리슨 누나가 다음 달부터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게 됐다고 좋아하셨잖아요.”

“크, 크흠!”

처음부터 줄곧 스트리트 3가의 대장으로 나섰던 이의 이름이 ‘할리슨’이었나 보다.

그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그만해, 아빠.”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여자아이가 어른들 틈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할리슨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엘리슨! 여긴 왜 따라온 거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라이언하트 가문이 축복이고 행복이라고 해 놓고서, 이렇게 갑자기 말 바꾸는 건 비겁한 거 같아.”

할리슨도 딸아이 앞에서는 영락없는 아버지였다. 제일 선단에서 무리를 주도했을 때와는 다르게 딸이 뾰로통해 있자,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앤 아주머니는 기부 센터에서 집 앞에 가로등을 설치해 줘서 밤길이 안전해졌다고 좋아하셨고요.”

이후로도 케빈의 입에서는 수혜받은 것이 줄줄이 나열됐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의 금쪽같은 자식들이 튀어나와서 라이언하트의 편을 들어줬다.

‘뭐야, 여기 있는 모두가 라이언하트 기부 센터의 수혜자들이었어?’

실컷 우리 가문에게 도움을 받아 놓고서, 이제 와 태도가 돌변한 어른들이 밉거나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원래 약한 자일수록 주변 분위기와 환경에 쉽게 휩쓸리는 법이니까.

나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아기라서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마음이 뭉클해지는 건…….

“이제 우리가 도움받은 거에 대한 은혜를 갚을 때가 아니겠어요?”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 케빈이 우리를 위해 나서 주고 있다는 거였다.

“맞아! 그러자 엄마!”

“아빠도요, 네?”

골목대장 케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튀어나왔다. 아이들이 저마다 부모에게 매달려서 설득하자, 어른들은 흔들렸다.

‘어째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의리 있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어른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보육원 식구들을 향한 적대감이 누그러든 눈치였다.

“그래. 사실은 나도 내키지는 않았어, 그냥 무서웠을 뿐이지.”

“나는 누가 동조하라고 계속 부추기는 바람에…….”

적의가 사라진 자리에 미안한 마음만이 남았다.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으로 내 눈치만 살폈다.

“사과하실 거면 지금들 하세요.”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고르 씨?’

돌아보니 정말로 우리의 후원을 받는 가죽 장인, 그레이고르였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지?’

그는 핍박하던 무리가 아니었다.

케빈의 옆에 서는 걸 보니, 아이들과 함께 온 것 같았다.

‘그레이고르 씨가 아이들을 모아서 오신 걸까?’

시선이 마주치자 내게 눈인사를 건넨 그레이고르가 어른들을 향해서 돌아섰다.

“우리, 애들한테는 부끄러운 어른이 되지 맙시다.”

감개무량함이 차올랐다.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레이고르. 오늘 느낀 이 기분과 감정 잊지 말고 자식에게 죠은 거울이 되어 쥬세요.]

언젠가 그에게 했던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감격해 있는 내 앞으로 케빈이 다가왔다.

“안녕, 네가 루나구나. 음, 아니. 루나 라이언하트 영애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편하게 루나라고 불러듀 돼.”

나는 흔쾌히 이름을 허락했다.

그는 보육원 식구인 톰의 친구이기도 했고, 딱히 또래 아이에게 신분을 들먹이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반가워, 루나. 난 케빈이야. 네 얘기는 많이 들었어.”

“내 얘기를? 누구한톄?”

톰이 얘기를 한 건가?

그는 한창 수녀님과 언니 오빠들을 챙기고 있었다. 톰이 종종 사고뭉치처럼 굴긴 해도 누구보다 보육원 식구들을 아끼는 애였다.

“뭐, 저 녀석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들을 일이 많아서. 너 사진술사 폴 알지?”

“폴? 당연히 알지!”

루나 신문사를 위해서 항상 열심히 일해 주는데 어찌 그를 기억 못 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폴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 형이거든.”

케빈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폴에게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동생이 있다고 했다.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특별히 호의적으로 굴었던 이유도 동생이 생각나서였다고 들었다.

세상 진짜 좁네?

“우리 형이 은혜는 갚으면서 살아야 한댔어.”

“폴이 정말 멋진 동생을 뒀네.”

“나보다 더 어린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 이상하네.”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벅벅 긁는 케빈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때였다.

어수선한 상황이 정리되는 틈에 웨인투르가 관중들 무리에서 한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 왔다.

“아가님. 말씀하신 주동자를 잡았습니다.”

“이, 이거 놔!”

남자가 웨인투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껏 발버둥 쳤다.

어찌나 거세게 저항하던지, 남자의 옷깃에 붙은 단추가 툭 떨어졌다.

데구루루 구른 단추는 내 발 앞으로 굴러왔다.

떨어진 작은 단추를 집었다. 단추의 뒷면에는 익숙한 인장이 그려져 있었다.

‘역시나. 모리스 대신관이 사람을 심어 둬서 주동했네.’

잡힌 남자에게만 따라붙는 아이가 없는 걸 봤을 때, 교묘하게 사람들 틈에 껴서 선동한 것 같았다.

“웨인투르. 이 남자도 함께 저택으로 데려갈 꼬에요.”

“네. 그럼,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잠시 재워 두겠습니다.”

웨인투르가 주먹을 꽉 고쳐 쥐고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 뭐? 때, 때리려고? 수, 수인이 사람을 때린다! 사람을 죽……!”

붉은 주먹이 뻗어졌다. 바람을 가르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내질러진 주먹이 남자의 코앞에서 멈췄다.

“……?”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은 남자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

“헉!”

바로 눈앞에 멈춘 붉은 주먹을 본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현역 때는 3대 1000도 쳤거든.” 

웨인투르가 남자에게 속삭였다.

붉은 주먹은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항복을 받아 냈다.

‘이로써 증거를 하나 더 수집했네.’

웨인투르가 기절한 남자를 챙기는 사이, 톰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케빈! 너 어떻게 알고 왔어?”

“노아한테 연락이 왔거든. 우리가 도와줄 일이 있다고 해서 얼른 애들을 모아서 왔지.”

노아가 보냈다고?

하기야, 소문은 비스 전역에 퍼진 것일 테니 리아노 공작가에도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노아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던 걸까?’

문득 노아가 보고 싶어졌다.

“아, 그리고 앞으로 이쪽 골목에는 사람을 보낼 필요 없어.”

케빈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는 우리가 자경대를 만들어서 지킬 거야.”

어느새 케빈 뒤로 쪼르르 선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안 그래도 이번 일로 라이언하트 쪽에 신경 써야 할 곳이 여기 말고도 많다고 들었거든.”

그것 역시 노아에게 들은 걸까?

자세한 속사정까지 깊이 헤아려 줄 이는 그밖에 없었기에 확신했다.

“그건 그렇지만. 어떻게 할 생각인뎨?”

“이래 봬도 다들 전쟁놀이로 단련돼서 달리기는 자신 있어서 말이야. 이쪽 골목의 지름길을 우리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고.”

“맞아!”

아이들이 씩씩하게 동조했다.

“하지만 위험하쟈나. 어른을 상대로 해야 할 수도 있는뎨?”

“물론 직접적으로 싸우겠다는 건 아냐.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라이언하트 가문에 바로 연락을 할게. 그때는 도움을 줄 수 있겠어?”

당연히 가능한 제안이었다. 인원 배치에 있어서도 훨씬 효율적이기도 했고.

그들이 직접 나서서 수상한 자를 우리 쪽에 보고해 주면, 우리는 신고를 받을 때만 사람을 보내면 된다.

“그리고 어차피 경비병들한테 도움을 요청해도 우리의 말은 들어 주지도 않는걸.”

케빈이 바닥을 걷어차며 콧방귀를 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아이들의 부모가 보육원 식구들을 왜 쫓아내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차피 다페 남작가 일원은 평민들의 안위 따위 관심 없으니까.’

궁지에 내몰려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그들에게도 지키고 싶은 가족들이 있기에.

“무엇보다 노아가 우리한테 그렇게 간절히 부탁한 건 처음이었거든.”

케빈이 코끝을 찡긋하며 속삭이듯 덧붙였다.

“우리 한 명 한 명한테 다 편지를 보내서 부탁했다니까? 친구라면 당연히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자경단’도 노아의 아이디어였다니.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노아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노아, 나는 네가 없는 곳에서도 너의 사랑을 받고 있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