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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119/142)

119화

매일 오전, 리아노 공작가는 후계자에게 마법 수업을 가르친다. 차기 가주가 될 후계자로서 철저히 관리되는 노아는 매일 수업을 들어야 했다.

‘재미없어.’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노아에게 있어 시시하고 따분한 것이었다.

‘이런 건 애초부터 할 수 있었는걸.’

노아에게는 마법은 ‘학문’이 아니라, 그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영역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가르쳐 주기 전부터 이미 능숙히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러기로 루나와 약속 했으니까.’

수업 시간 중에 딴생각에 빠지는 것은 이제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노아는 주로 루나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앞으로 공쟉밈이 이것저것 해 보라고 시키면 무조건 잘 못 하는 척해. 알아찌? ]

그렇게 말할 때의 눈빛이 어찌나 좋던지.

아직까지 뇌리에 선연히 박혀 잊히지 않았다.

온전히 노아를 향한 걱정으로만 가득 찬 푸른 눈동자.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강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앞으로도 쭉, 루나의 걱정을 자신이 독식하고 싶었다.

‘루나가 다른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는 건…… 싫어.’

불에 익힌 뜨거운 파인애플을 먹는 것보다, 향이 강한 오이를 먹는 것보다 더 싫었다.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루나에게 거짓말을 했던 날은.

[그런데 가끔 나도 모르게 제어가 안 될 때가 있어.]

[마법이?]

[응.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마법이 저절로 발현될 때가 있거든. 그럴 땐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노아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은 순간부터 곧장 마법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부러 약한 척했다.

그 애의 걱정이 좋아서.

제 걱정을 하는 동안만큼은 그 애의 머릿속에 오직 자신뿐이니까.

길어지는 생각의 꼬리를 쫓아가다 보면 늘 끝은 하나였다.

‘보고 싶다.’

지금쯤이면 그 문제는 해결됐으려나?

노아는 창밖을 내다보며 수업 내용을 한쪽 귀로 흘려들었다.

이번에는 어떤 핑계를 대고 찾아가면 좋을까, 따위의 생각에 잠겨 있는데 수업 도중에 집사가 찾아왔다.

“도련님. 라이언하트 가문에서 도련님을 뵙고자 하는 요청이 들어왔는데, 무어라 답변을 보낼까요?”

“지금. 지금 당장 갈게요.”

노아는 고민할 것도 없이 미어캣처럼 벌떡 일어났다.

수업 내내 나른하다 못해 가라앉아 있던 보랏빛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 * *

보육원 식구들과 함께 저택에 돌아온 나는 여러 곳에 보낼 편지를 쓰느라 바빴다. 이제 막 황제 폐하께 쓴 편지를 토리의 손에 쥐어 보낸 후에야 아빠와 대화를 나눌 여유가 생겼다.

“벤 쟝 할부지는요?”

“한 시간 전쯤 보냈다. 아마 지금쯤이면 다페 남작가의 저택에 들어갔겠지.”

“들키진 않았겠찌요?”

“그랬더라면 진즉 소식이 들려왔을 것이다.”

하긴, 다페 남작의 성격상 첩자가 든 것을 알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뻔했다.

동네방네 소문내다 못해 사주한 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려 들겠지.

“무소식이 희소식이겠녜요.”

“자리 잡는 대로 마도구로 연락한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한데, 무슨 정보를 얻으려는 거지?”

“곧 있으면 사냥의 밤 축제를 하쟈나요. 대비를 해야죠.”

“그 추악한 짓거리에 동조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아빠의 표정이 험하게 구겨졌다. 

수인족인 그로서는 썩 내키지 않는 주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쾌한 감정을 꾹 참고서 내 의견을 들으려고 노력했다.

“아빠. 나 믿쬬?”

“쓸데없는 걸 묻는군.”

틱틱거리는 말투와 달리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내게는 마치 ‘당연한 말이니 굳이 묻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우리의 이번 목표는 사냥의 밤 축제를 없애는 거예여.”

“무슨 수로?”

퍽 진지해진 맹수의 눈동자 속에는 무한한 신뢰가 깔려 있었다.

그는 나를 전적으로 믿었다.

고작 4살짜리 어린애가 ‘에덴 제국의 전통’을 깨부수겠다는 다소 허무맹랑한 발언을 했는데도 말이다.

사계절을 대표하는 축제는 곧 에덴 제국의 전통이다.

전통 축제를 없애 버리겠다는 발언은 ‘전통성’에 집착하는 골수 귀족에게는 절대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든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간 복수를 위해서 쌓은 자신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사냥감들을 다 빼돌릴 꼬에요.”

“벤 쟝을 보낸 이유가 그것이군.”

“녜. 그럼 이번 사냥의 밤 축제는 못 하게 되겠쬬?”

“당장 올해는 그럴 수 있겠지만, 내년에도 그들이 사냥감을 눈 뜨고 빼앗기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나?”

“그러니 올해에 아예 못을 박쟈는 거예요. 이 축제가 폐지돼야 하는 명백한 이유는 우리가 이미 쥐고 있으니까.”

일순 가늘어진 호박색 동공이 차츰 제 크기를 되찾아 갔다.

내 말의 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검투장 때처럼 비리를 고발하겠다는 거로군. 좋은 수이긴 하다만, 한 번 당한 방법에 또 당할까?”

아빠도 참. 별걸 다 걱정하신다니까.

“제가 다페 냠쟉을 뭐라고 부르는지 잊으셨어여?”

“아, 무식이.”

아빠가 담백한 어투로 다페 남작의 별명을 부르는 것에 웃음이 났다.

“정답임미댜. 원래 한 번 크게 당한 적이 있으면 조심스러워지쟈나요. 이번에 보낸 살수는 나름 신임하는 사람이었을 꼬에요.”

“그자가 사실은 위장한 첩자라는 걸 꿈에도 모르겠군.”

“등쟌 밑이 어두운 법을 똑똑히 알려 줘야 하지 않게써요?”

덧붙이지 않아도 그는 내 말의 핵심을 알아들었다.

이번에도 비리가 터져서 논란이 커지게 된다면, 이미 한 차례 황제에게 찍힌 다페 남작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힘들 것이다.

사교계와 정계에서 묻어 버리는 것만큼 확실하고 통쾌한 복수가 또 있을까?

아마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다페 남작은 편히 잠들지 못하겠지.

“빼돌린 초식 수인들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해 놓겠다.”

“그럴 필요는 없써요. 리모델링한 검투쟝에서 지내게 할 거니까.”

“거긴 치료 센터로 쓴다고 한 것 아니었나?”

“명목상으로는 그렇쵸.”

이번만큼은 아빠에게도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계획을 차근히 설명했다.

“사냥의 밤 축제의 가장 큰 논란거리는 ‘놀이’라는 이름으로 잔혹성이 포장됐다는 거쟈나요. 4살짜리인 저도 알고 있는 문제가 왜 아직도 화두 되지 않는지 알아여?”

“사람들의 인식이지.”

“마쟈요. 그 인식을 바꿔야 해요.”

사냥놀이가 잔혹하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모리스 대신관이 심어 놓은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수인을 가축 취급하는 문화가 뿌리내린 거야.’

나는 잘못된 인식을 뿌리째 뽑아내 버리고 새롭게 정립할 생각이었다.

“만약에 수인들이 인간과 공생하는 친구라는 인식을 세운댜면 어떨까요?”

“……그게 가능할 리가.”

아빠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건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마, 친구라는 이름으로 배신당했던 과거의 그 순간에 여전히 매여 계신 듯했다.

문득 언젠가 리챠드가 아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저는 각하께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길 바라니까요.]

리챠드가 어떤 마음으로 그 소리를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꽉 쥔 아빠의 주먹 위로 살포시 손을 얹었다.

“저는 아빠가 죄책감에서 벗어나길 바라여.”

“…….”

동공 속, 금빛 호수에 잔잔한 떨림이 일었다.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또다시 그런 일이 반복될지도 몰라여.”

본디 죄악은 대물림되는 법이다.

아빠를 상처 줬던 이들의 후손은 크게 장성하여 똑같은 악습을 되풀이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2의 이든 라이언하트가 생겨날 테고, 해를 거듭할수록 감정의 골이 깊어지겠지.’

돌이킬 수 없게 될 정도로 적의와 원망이 쌓이게 된다면 그 말로는 어떨까?

아마 파멸뿐이리라 생각됐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불행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번엔 아빠 혼쟈가 아니에요.”

제가 있잖아요.

“같이 나쁜 놈들 뚝배기 깨고, 사냥의 밤 축제를 폐지시켜요. 녜?”

이든의 다리를 꼬옥 껴안으며 말했다.

‘아빠랑 함께 싸워 줄게요.’

그런 내 진심이 닿은 걸까.

천천히 허리를 숙인 이든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는 소중한 것을 살피듯 꼼꼼히 내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내 따님께서 함께해 준다면, 불길에 뛰어들어야 한대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내 이마에 한 번.

오동통통한 뺨에 한 번.

찰랑찰랑 흔들리는 양 갈래 머리카락에 한 번.

다정히 입술을 맞춘 아빠는 나를 끌어안고 일어섰다.

“가장 먼저 무얼 하면 되지?”

“협박하러 갈 꼬에요!”

“너다운 계획이군.”

작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가 나를 목말 태웠다.

“여론을 이용하는 게 좋을 듯싶다.”

“안 그래도 폴에게도 연락을 해 두려고요. 우리한테는 ‘그것이 알고 싶습니까’가 있쨔나요?”

“일전의 살수를 심문한 자료도 필요하겠군. 정리해서 보내도록 하겠다.”

역시 척하면 척인 건, 우리 사자님밖에 없다니까?

“아빠 최고!”

“얼마큼?”

으음. 짧게 고민한 나는 인심 좋게 양 엄지를 척 내밀어 보였다.

“쌍 따봉 최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어쩐지 아빠의 걸음걸이가 꽃을 만난 나비처럼 나풀나풀 붕 떠 있었다.

아빠가 기분이 좋으니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왠지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만 같았다.

‘어디 보자. 이제 마지막 에피소드인 <사냥의 밤> 축제까지 대략 석 달 정도 남았지?’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흘러갈 것이다.

특히…… ‘그걸’ 준비하려면 시간이 촉박해.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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