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정찬 시간에 맞춰 라이언하트 저택에 마차가 멈춰 섰다. 정식으로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은 노아였다.
원래라면 집사인 리챠드가 손님맞이를 해야 했으나, 부쩍 바쁜 그를 대신해 아빠와 내가 나섰다.
“루나!”
뭐가 그리 급했던 건지.
노아는 마부가 마차 발판을 내려 주지도 않았는데,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노아 생각보다 빨리 왔ㄴ,”
“보고 싶었어.”
한달음에 달려온 노아가 나를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끝맺지 못한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깜짝 놀란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
“흠.”
언짢음이 담긴 헛기침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꼬옥 붙잡은 아빠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아빠에게로 옮겨졌다.
“아빠?”
“하던 말 계속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투였다.
어째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눈동자에서 거센 불길이 활활 일었다.
으음,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잠시 고민되긴 했지만, 일단은 손님인 노아를 반기는 게 먼저였다.
“오는 데 힘들지 않아써?”
“흠!”
“너 보러 오는 게 뭐가 힘들어.”
“크흠!”
노아와 한마디 한마디를 주고받을 때마다 옆에서 추임새가 들려왔다.
살다 살다 헛기침이 리드미컬하게 들릴 줄이야.
연신 목을 가다듬는 소리에서 느껴지는 출중한 박자 감각에 재능 낭비는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정말 못 말리는 사자님이라니까.
나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노아와의 대화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다행이댜. 릴리앙이 노아가 좋아하는 미트볼 스튜 해 쥬셨어.”
곧잘 대답하던 노아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거 네가 좋아해서 좋아하는 건데.”
“크흐흠! 크흠! 큼!”
이번에는 진짜 목구멍에 먼지라도 낀 걸까.
요란스럽다 못해서 방정맞기까지 한 소리 탓에 노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고 노아?”
“그러니까 내가 미트볼 스튜를 좋다고 한 건 너 ㄸ…….”
“크흠! 큼! 큼! 크흐흐흠!”
아이고, 내 귀 떨어지겠네.
결국 참지 못하고 아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빠, 괜챠나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
아닌 게 아니신 것 같은데.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도록 헛기침을 실컷 하셔 놓고서.
이제 와서 갑자기 태연한 얼굴이신 걸 보니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정말 괜찮으신 건가?’
속을 읽기 위해 표정을 살폈으나, 아빠는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기, 루나.”
반대쪽에서 노아가 옷소매를 슬쩍 잡아끌며 시선을 다시 가져갔다.
“응?”
“괜찮으면 이따 밥 먹고 같이 산책할래? 그때 못 했던 소꿉놀이를 마저 해도 좋고.”
쑥스러운지 뺨을 붉히는 노아와 내 사이로 커다란 손이 불쑥 끼어들었다.
으응?
몸이 위로 들리더니, 이내 아빠의 옆구리에 안착하게 됐다.
어어어?
나는 얼떨결에 나무에 열린 열매처럼 대롱대롱, 아빠의 옆구리에 매달린 꼴이 됐다.
노아가 황당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루나가 다리 아플까 봐서.”
너무나 당당하고도 뻔뻔한 말투였다. 깜빡하면 나도 속을 뻔했다.
저택에 돌아온 이후로 계속 앉아서 편지만 쓰다 왔는데, 다리 아플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전 괜챠나요, 아빠.”
내려 달라는 의미로 허공에 두 발을 동동 흔들었다.
“…….”
“괜찮다고 하네요.”
노아가 콕 집어서 지적해도 아빠는 고집스럽게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질투하시는 거였잖아?’
이제야 불만스럽게 꾹 다물린 입술이 실룩실룩거리는 게 보였다.
이대로는 절대 순순히 물러서실 것 같지 않았다.
힐끗 곁눈질로 나를 살핀 노아가 무언가 결심한 듯, 느릿하게 입술을 벌렸다.
“……장인어른.”
“뭐?”
아빠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졌다.
반대로 노아의 입술은 호선을 그렸다.
“장인어른, 이제 루나를 내려 줘도 괜찮을 것 같아요.”
“누가 네 장인어른이라는 거지?”
발끈한 아빠의 언성이 높아졌다.
만약 지금 수인화 되었더라면, 꼬리가 복슬복슬하게 부풀려진 채로 바닥을 불만스레 팡팡! 내리쳤을 것만 같았다.
아빠는 샐그러진 눈으로 노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아직 그의 오른쪽 옆구리는 내 차지였다.
“루나를 도와줬다고 들었다.”
“당연한 걸 했을 뿐이에요.”
“…….”
물끄러미 노아를 보던 아빠가 별안간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노아는 나보다 두 뼘은 더 커서 몸무게가 제법 나갈 텐데도 깃털처럼 가볍게 들었다.
“뭐, 뭐예요, 갑자기?”
고스란히 아빠의 반대편 빈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노아가 당황하며 발버둥 쳤다.
그러나 우리 사자님은 뻔뻔하게 눈 하나 깜짝 안 하셨다.
“밥은 식기 전에 먹는 거다.”
이게 갑자기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대충 사자님의 언어를 직역하자면…….
‘내 딸을 도와줬으니 사위 노릇은 한 번 봐주겠다.’
―라고 해석됐다.
아빠는 노아와 나를 양쪽 옆구리에 사이좋게 매단 채로 저택 안으로 위풍당당 들어가셨다.
* * *
우당탕탕 식사 시간이 끝났다.
어느덧 반쯤 기운 태양은 하늘에 걸린 구름을 붉게 물들여 갔다.
제일 먼저 정원으로 나온 노아는 한쪽 얼굴을 매만지며 식사 시간을 떠올렸다.
‘얼굴 뚫릴 뻔했네.’
식사 내내 이어진 이든의 맹렬한 눈빛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화끈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제 맞은편에 앉았던 이든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는 노아가 서툰 솜씨로 작게 자른 미트볼을 루나에게 건넸을 때,
‘그걸 그렇게 덥석 먹어 버리실 줄은 몰랐어.’
루나에게 향했던 수저가 남의 입에 쏙 들어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이든 라이언하트의 입속에!
게다가 눈빛은 또 어땠는가?
노아의 수저를 입에 문 채로 놓아주지 않아서, 그는 고스란히 이든의 이글이글거리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노아는 몹시 앙칼진 고양이에게 미움을 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뭐, 아무래도 좋았다.
‘루나랑 단둘이 산책할 수 있게 됐으니까.’
사실 이든은 식사 후에도 루나와 노아의 산책에까지 따라 오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루나가 마음이 약해서 정말로 그럴 뻔했다.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자신은 초대받은 손님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연금발의 집사가 나타났다.
[각하. 밀린 일이 산더미입니다. 오늘마저 자리를 비우신다면 제가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낸 그는 웃는 낯이었다.
[리챠드, 오늘만큼은 안 된다.]
[저도 오늘만큼은 절대로 양보 못 합니다, 각하.]
이윽고 집사는 제 덩치의 두 배나 되는 이든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어디론가 데려갔다.
중간에 이든이 힘으로 버티려 했지만, 무어라 속삭인 귓속말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던 모양이다.
노아에게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장인어른님의 입을 봉쇄해 버리다니…….’
그 집사님, 굉장하시잖아?
다시 떠올려 봐도 마음이 웅장해졌다. 노아는 저도 모르는 사이 리챠드에게 존경심을 품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써?”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회상에 빠져있던 노아를 현실로 끌어다 놨다.
고개를 돌리니 하얀 토끼 같은 조그마한 아이가 총총총 노아에게로 다가왔다. 노아의 표정은 곧장 밝아졌다.
“그냥. 루나 너랑 이렇게 밤늦게까지 같이 있는 건 오랜만인 거 같아서.”
“흐음, 뭔가 있는 거 같은뎨?”
“그러는 루나 너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아냐?”
“어떻게 알아써?”
“난 네 표정만 봐도 알지.”
동그랗게 커진 파란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
‘무슨 말을 하고 싶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노아는 궁금증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재촉하지 않고 침착하게 기다렸다.
한참 오물오물거리던 연분홍빛 작은 입술이 드디어 움직였다.
“있찌, 노아.”
“응, 루나.”
쉽게 꺼내기 힘든 얘기인가 보네.
제 이름을 불러 놓고 막상 본론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노아는 슬그머니 루나의 손을 잡았다.
“걸으면서 얘기할까?”
손을 꼭 잡고서 이끌자 루나가 순순히 따라왔다.
두 아이는 뒤뜰을 걸었다.
바람이 안고 온 비누향과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감촉이 좋았다.
노아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발맞추어 걷던 루나가 별안간 멈춰 서자, 감상에 젖어 있던 그도 함께 제자리에 섰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한뎨…….”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그건 맹세코 진심이었다.
노아는 루나가 주는 오이라면 한 박스라도 먹을 자신이 있었고, 구운 파인애플도 꾹 참을 수 있었다.
싫은 것도 기꺼이 감내하고 해낼 만큼 루나가 좋았다.
“리아노 공작가에서 다시 나오는 건 어때?”
……이건 예상 못 했던 주제인데.
노아의 대답에 잠시 텀이 생겼다.
그게 또 신경 쓰였는지, 제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평정심이 돌아온 노아가 최대한 부드럽게 이유를 물었다.
“갑자기 왜?”
“리아노 공작이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고 있다묘. 그러다 노아도 괜히 휘말리게 될까 봐서.”
처음 노아가 각각의 이유로 입양을 희망하는 세도가 중, 리아노 공작가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마법 명문 가문에서 힘을 길러서 루나를 지켜 줄 거야.’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게 있었다.
노아 그 자신이 천재적인 마법사였다는 사실이었다.
입양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곧장 파양을 선택하지 않았다. 괜히 루나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노아는 자신이 속한 리아노 공작가와 라이언하트 가문의 관계가 그리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간의 행보로 봤을 때, 라이언하트 백작의 목적은 분명했다.
‘부패한 세도가를 타도하는 것.’
어린 노아의 시선으로 봤을 때, 리아노 공작가는 확실히 썩은 권력에 속했다.
‘맨날 모리스 대신관이랑 뭔가를 작당하던걸.’
주말마다 자신을 데리고 대신전에 쓸데없이 들락날락할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노아는 대충 눈치를 챘음에도 별말 없이 꾹 참고 견뎠다. 재미없고 시시한 마법 수업에도 최선을 다해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이유는 정말이지 간단했다.
‘언젠가 루나에게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언제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그였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 들고나올 수도 있었지만, 안절부절못하며 제 눈치를 보는 루나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잠시 넋을 잃었다.
“이제 막 적응했는뎨,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건 힘든 선택이라는 거 알아.”
아, 이 꼬맹이를 어쩌면 좋아.
주머니 속에 넣어 놓고서 혼자만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역쉬, 갑자기 그러는 건 힘들겠지?”
아니, 루나 네가 걱정해 주니까 전혀 힘들지 않아.
―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이어지는 루나의 폭탄선언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정 힘들 거 같으면 라이언하트 백쟉가로 입양 올래? 내가 아빠한테 부탁드려 볼게.”